광풍 거친 바람에 휘말려 갈 곳을 잃은 새여. 그대의 지친 날개를 누일 장소를 마음의 위안을 얻을 장소를 그대 곁을 휘몰아치는 폭풍을 건너 바람이 머무는 안락한 대지에서 나 그대를 기다린다.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리는 땀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허리를 붙잡은 두 손은 풀릴 생각도 없이 점점 더 힘을 가해오고 있었다. 엉덩이 사이로 드나드는 뜨거운 기둥이 뱃속을 거칠게 휘저었다. 들어오고 나가는 움직임이 반복될 때마다 저절로 등골이 휘고 몸이 떨렸다. 저릿저릿한 쾌감과 수치감이 교차되며 온 몸을 뜨겁게 달구고 있었다. "으...ㄱ.." 억눌린 신음 소리가 입술 사이로 새어 나오자 뒤에서 거칠게 움직이던 남자가 한 순간 모든 동작 을 멈추고 귓가에 속삭임을 전했다. "좀 더 소리내. 참지 않아도 좋아." 낮게 울리는 목소리는 깊은 곳에 음란함을 품고 있었다. 남자의 손이 앞으로 다가와 흰 액체를 떨 구며 방출을 기다리고 있는 것을 붙잡았다. "헉." 순간적으로 놀라 숨을 삼키자 귓가에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너는 아직도 제대로 소리를 내지 않는 군? 남자라면 쾌감에 약한 건 당연하지. 참을 필요 없 어." 그러나 그 말을 들은 순간 오히려 더 숨을 삼키며 벌어진 입술을 다물었다. 귓가를 맴돌던 입술이 길게 뻗은 목으로 내려왔다. 목줄기에 혀를 가져다 대고 핥자 오싹하는 느 낌이 등골을 달렸다. 남자는 부드러운 금색 머리카락을 왼손으로 움켜쥐고 오른손으로는 쉴 새 없이 발기한 상징을 주 물렀다. 점차 숨소리가 거칠어지고 억지로 다물고 있던 입술이 저절로 벌어졌다. 억눌려 제대로 된 소리로 도 들리지 않는 신음 소리가 조금씩 새어나왔다. 남자의 움직임이 조금 더 빨라졌다. 멈춰있던 허리의 움직임도 다시 시작되었다. 이윽고 방출을 기다리며 부풀어 오른 그 순간, 남자는 기둥 끝을 세게 붙잡고 해방되는 것을 막았 다. "으윽..." 괴로운 듯한 신음소리가 들려오자 남자는 입술 끝을 올리며 웃었다. "가고 싶지....?" 대답대신 돌아온 것은 거친 숨소리와 격렬하게 떨리는 몸의 움직임이었다. 침대를 짚은 두 손이 무너질 듯 비틀거렸다. 그러던 어느 순간 억눌린 신음만을 내뱉던 붉어진 입술 사이로 이름 하나가 새어나왔다. "케....이스...워크...." Part 1. 찢긴 잔상 즉위식이 이틀 앞으로 다가왔다. 2년 전 갑작스레 병을 얻어 쇠약해지기 시작한 황제 페히너는 1년이 채 지나기도 전에 모든 국정 을 황태자인 케이스워크에게 넘기고 지금은 요양을 위해 제국 남단에 위치한 별궁에 가 있었다. 황제가 병을 얻기 이전부터 이미 국정의 절반 이상을 손에 쥐고 있던 케이스워크는 황제가 쓰러진 이후 대부분의 전권을 위임받았다. 그리고 이제 머지 않아 리카도 제국의 황제는 케이스워크가 된 다. "황태자 전하, 사이드 공국에서 사신이 도착했습니다." "별궁으로 안내하고 알현은 오후로 미룬다." 즉위식을 이틀 앞두고 정신없이 바쁜 이 때에 케이스워크는 집무실이 아닌 다른 곳으로 향하고 있 었다. 그런 케이스워크의 뒤를 따라다니며 재가가 필요한 일들을 말하고 있는 것은 현 국무 대신인 스톨 스 공작이었다. 이제 나이 60을 바라보는 늙은 공작이 케이스워크의 뒤를 따라다니며 업무 보고를 하는 광경은 이미 1년 전부터 눈에 익은 것이어서 황궁 안을 지나가는 시녀나 시종들, 심지어는 기사들조차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본궁을 빠져나간 케이스워크가 향하고 있는 곳은 황후가 기거하는 달의 궁이었다. 원래 그곳의 주 인은 현 황제인 페히너의 부인이자 케이스워크의 모친인 체피나안 황후였으나 그녀는 황제와 함께 남쪽에 있는 별궁으로 옮긴지 오래였다. 그렇다면 달의 궁은 비어있어야 하겠지만 그곳에는 1년 전부터 누군가가 기거하고 있었다. 케이스워크가 발걸음을 빨리 해 달의 궁 앞에 이르자 그제서야 스톨스 공작은 황태자를 따라가는 것을 멈췄다. "각 나라의 사신들을 대접하는 데 부족함이 없도록 하게, 공작. 사이드 공국 사신과의 알현은 오후 4시에 시작한다. 그 전까지 다른 일은 모두 공작에게 맡기겠다." "알겠습니다. 전하." 늙은 공작이 허리를 숙여 인사하자 케이스워크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의 궁 안으로 들어갔다. 달의 궁에 소속된 시녀들은 황태자가 나타나자 일제히 하던 일을 멈추고 정중하게 인사했다. 그러 나 케이스워크는 그들 중 어느 한 명에게도 시선을 던지지 않고 목표로 한 곳을 향해 걸어갔다. 어린 나이였던 8살 이래로 늘 그림자처럼 케이스워크의 뒤를 따르던 회색 눈동자를 가진 청년은 이미 2년 전에 모습을 감췄다. 잠시 자리를 비우겠다고 말한 이래로 그는 돌아오지 않았다. 언제 돌아오겠다고 확실하게 대답하지는 않았지만 케이스워크는 세상에서 유일하게 17년 동안 부 관이 되어준 청년을 신뢰하고 있었다. 그러나 2년이 지난 지금까지 황태자의 부관으로 알려져 있 던 스위드는 연락도 없었고, 나타나지도 않았다. 늘 여유 있는 표정으로 일관하던 케이스워크의 표정에 균열이 가기 시작한 것은 스위드가 돌아오 지 않게 된 이후였다. 반년이 지나는 동안은 케이스워크도 아무 걱정을 하지 않았다. 그 정도라면 충분히 있을 수 있는 기간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황제의 병이 깊어지고 , 전권이 케이스워크에게 넘어오는 동안에도, 1년이 지난 후에도 스위드는 나타나지 않았다. 케이 스워크는 근심에 휩싸여 한 동안 업무를 제대로 처리하지 못했었다. 그리고 2년이 흐른 지금은 차 갑고 난폭한 성격이 되었다. 언제나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하기만 했던 스위드는 케이스워크에게 있어 완충제 역할을 해 주었던 것이다. 감춰져 있던 본성을 억누르고 매력적인 황태자 역할을 연기하는 데 가장 큰 도움을 준 것 은 다름 아닌 늘 뒤에서서 그를 보좌하는 스위드의 존재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런 스위드의 존재가 사라진 지금 케이스워크를 지탱해 줄 무엇도 남아있지 않았다. 스스로도 놀랄 만큼 케이스워크는 스위드에게 많은 것을 의지하고 있었다. 아무런 준비도 없이 스 위드의 존재가 사라지고 나자 케이스워크는 걷잡을 수 없이 무너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황태자 로서의 케이스워크는 누구에게도 부족하다는 소리를 듣지 않을 정도로 완벽했다. 거침없이 이어진 케이스워크의 발걸음은 어느덧 달의 궁 중심부에 위치한 황후의 방에 다다랐다. 굳게 닫힌 오크목으로 만들어진 문 앞에 이르자 앞에서 대기중이던 시녀들과 시종들이 허리 숙여 인사했다. "내가 나갈 때 까지는 무슨 일이 있어도 문을 열지 마라." "네, 전하." 케이스워크는 시선을 뒤로 한 채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그레이프 공국산 고급 양탄자가 깔 린 넓은 거실을 지나쳐 침실 문 앞에 이른 케이스워크는 잠시 걸음을 멈췄다. 문 안쪽에서는 작은 소리 하나 들려오지 않았다. 케이스워크는 작게 숨을 내쉰 뒤 문을 열었다. 반 안에서는 엷은 꽃향기가 퍼져 나왔다. 창가 쪽에 위치한 커다란 침대는 반투명한 흰색 천개로 가려져 있었고 그 안에 누워있는 사람의 실루엣이 천개 너머로 보였다. 잠이 든 듯, 천개 안쪽에 등을 보인 자세로 누운 사람의 모습은 작 은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이윽고 케이스워크는 침대로 다가가 천개를 걷어 올렸다. 매끄러운 흰 등을 드러낸 채 잠이 든 청년의 모습을 확인하자 그제서야 굳어져 있던 케이스워크의 얼굴에 미소가 돌아왔다. 사이드 공국에서 리카도 제국으로 파견된 사신 일행의 대표는 페르마 대공왕의 막내 동생인 겔트 너 후작이었다. 이틀 후에 있을 황태자 케이스워크의 즉위식을 축하하는 사절과 외교 교섭이라는 두 가지 임무를 띄고 리카도 제국을 방문한 겔트너 후작은 알현실에 부관과 함께 앉아 황태자가 들어서기를 기다 리고 있었다. 초조했지만 노련한 외교관답게 겔트너 후작은 그런 심정을 얼굴에 드러내지 않은 채 적당히 식은 차를 마시고 있었다. 그리고 약속했던 4시 정각이 되자 황태자 케이스워크가 알현실에 모습을 드러냈다. 27살의 화려한 외모를 가진 제국의 황태자는 여유 있는 표정으로 사이드 공국 외교관의 인사를 받 았다. 자리에서 일어서 황태자를 맞이했던 겔트너 후작은 케이스워크가 자리에 앉자 다시 착석했 다. "바쁘신 와중에 시간을 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황태자 전하." 30대 후반으로 보이는 편안한 분위기를 가진 겔트너 후작이 인사말을 건네자 케이스워크는 미소 띈 얼굴로 그의 인사에 답했다. "아니, 오히려 사이드 공국에서 내 즉위식을 축하하기 위해 귀하를 보낸 것을 기쁘게 생각하고 있다고 페르마 대공왕께 전달해 주게, 후작." "당연한 말씀을 하시는군요." 의례적인 인사말이 오가고 나자 이번에는 각 나라의 근황을 묻는 말이 이어졌다. 겔트너 후작은 페르마 대공왕이 즉위 선물로 사이드 공국산 명마 다섯 마리를 보냈다는 말을 꺼냈고, 케이스워크 는 그 말에 크게 기뻐했다. 그러나 이 자리에 있는 누구도 그것이 진심이 아니라는 사실을 모르지 는 않았다. 겔트너 후작은 아직 본론을 꺼내지도 않았고, 케이스워크는 의식적으로 그 화제를 피해가기 위해 여유를 부렸다. "페르마 대공왕께는 세 명의 아들 외에도 두 명의 공주가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나이가 어떻게 되나?" "첫째 공주님은 17살이시고 둘째 공주님께서는 15살이십니다." 겔트너 후작이 대답하자 케이스워크는 생각에 잠긴 듯 잠시 말을 하지 않았다. 현 황후인 체피나안 황후는 센 왕국 출신이었다. 대륙의 실권을 쥔 다섯 명의 유력자들은 힘의 균 형을 깨지 않기 위해서 결혼 상대자를 자국에서 뽑지 않기로 협약을 맺었다. 그리고 그 협약은 리 카도 제국의 차기 황제가 될 케이스워크에게도 유효한 것이었다. 케이스워크는 황태자비를 두지는 않았지만 후궁에게서 이미 한 명의 아들을 낳았다. 정식으로 황 태자가 될 확률은 그리 높지 않지만 즉위 후 황후가 선택되고 그녀가 아이를 낳기 전까지는 그 아 들이 황위에 가장 근접해 있다는 사실은 분명한 것이었다. "기회가 된다면 두분 공주님의 초상화를 볼 수 있었으면 좋겠군." 그 말은 명백히 사이드 공국에서 리카도 제국의 황후가 뽑힐 가능성이 있다는 말이었다. 겔트너 후작은 유리한 소식을 들은 덕분에 잠시 이곳을 리카도 제국을 찾은 중요한 용건을 잊을 뻔했다. 어떤 순간에도 흔들리지 않고 자국의 이익을 얻어낼 수 있어야 하는 것이 외교관으로서의 소양인 데 잠시 그것을 잊을 뻔 한 것이다. 이 사실 하나만으로도 겔트너는 황태자 케이스워크가 얼마나 심계가 깊은지 깨달을 수 있었다. 아 무래도 이번 협상은 황태자에게 유리하게 진행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 컴백입니다. ^^ 연휴 동안에는 오랜만에 가족들이 집에 다 있어서 아무것도 못하고 놀았습니다. 푸하하 =ㅂ=; 그동안 리니지2에서 다크엘프를 키웠습니다. 첼시피온(!)을 이름으로 붙여주었습니다. 첼시피온은 따져보면 그냥 엘프 마법사여야 하지만 저는 다크엘프를 좋아하는 관계로 다크엘프 마법사가 되었습니다. 호홋 ^-^;; 리니지2 캐릭터들을 보면 다들 몸매가 죽여주고 얼굴도 괜찮아서 뭔가 뭉게뭉게 하게 됩니다. 자, 이제 다시 연재를 시작하니까 열심히 써야하는데 요즘 잠귀신이 붙어서 (쿨럭;;;) 본론을 피해 가는 이야기를 한 시간이나 하고 나서야 겔트너는 겨우 본론을 꺼낼 수 있었다. 외교 에 능한 겔트너였지만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다. 상대가 제국의 황태자라는 것도 있지만 사실 열쇠 를 움켜쥐고 있는 당사자였기 때문에 섣불리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원래대로라면 국가간의 외교 문제로 불거져 전쟁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었지만 케이스 워크에게는 충분히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그리고 그 원인을 제공한 것은 다름 아닌 사이드 공 국 쪽이었기 때문에 황태자의 심기를 거스를 생각은 처음부터 할 수 없었다. 사실 황제 페히너의 그늘에 가려 가치가 제대로 드러나지 않았지만 케이스워크는 결코 아버지에게 뒤지지 않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한 나라를 다스린다는 것은 권력에 욕심을 부린다고 해서 가능한 일이 아니다. 더군다나 왕이 중 심이 되어 나라를 움직이는 사회에서는 더더욱. 힘으로 따지자면 신의 보석을 품고 있는 신의 보석의 계승자들을 빼 놓을 수 없지만 지금까지 대 륙의 역사에서 신의 보석을 얻은 자들이 나라의 지배자가 된 적은 없었다. "이제 돌려 보내주실 때가 되지 않았습니까." "그건 무슨 말이지?" 전혀 모르겠다는 듯이 되묻는 케이스워크를 보고 겔트너는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외교관으로 일해 온 능숙한 처세술로 얼굴에 감정을 드러내는 행동은 하지 않았다. 그러나 겔트너의 부관은 참지 못하고 얼굴에 불쾌감을 드러냈다. 케이스워크는 놓치지 않고 그 표 정을 관찰하며 입가에 웃음을 머금었다. 겔트너는 그것을 알아차리고 아차 하는 심정이 되었지만 이미 벌어진 일을 되돌릴 재주는 가지고 있지 않았다. "1년입니다." 겔트너의 부관은 분위기를 파악하지 못하고 입을 열고 말았다. "그래서? 지금 이 자리에서 나를 추궁하겠다는 건가?" 케이스워크의 얼굴이 싸늘하게 굳어졌다. "아닙니다. 저희 잘못을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단지." "단지?" "황태자님이 보호하고 계시는 분이 저희 사이드 공국의 다음 왕위를 이을 분이라는 사실을 잊 지 말아주셨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케이스워크는 소리 죽여 웃었다. "시작은 사이드 공국에서 하지 않았나? 그대들은 제국인이 분명한 라딘 라메르를 납치했다. 행 방을 모른다고 대답했지만 라딘 라메르는 제국의 오래된 가문인 라메르 가의 차남이고 빛의 보석 의 계승자다. 그의 가치가 어느 정도인지 모르지는 않겠지? 그런 그를 데려간 만큼 내가 사이드 공국의 왕자를 보호하고 있다고 해서 그것이 죄가 되지는 않지. 나는 분명히 처음부터 밝혔다. 라 딘 라메르를 되돌려보내면 왕자 역시 사이드 공국으로 보내주겠다고." 그 동안 말을 피하고 있던 만큼 한번 말고가 트이자 케이스워크는 몰아붙이듯 내뱉었다. 겔트너는 억지로 표정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부관의 얼굴은 여지없이 구겨졌다. 용병길드에서 의뢰 를 받아 라딘 라메르를 납치했던 자들이 황태자에게 그 사실을 밝힌 것은 이미 오래 전의 일이었 다. 증거가 명백하게 드러나 있는 이상 사이드 공국에서는 자신들이 한 일이 아니라고 발뺌할 수 없었 다. 게다가 의뢰를 한 당사자였던 첼시피온 왕자 역시 자신이 의뢰를 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그리고 1년 전, 케이스워크는 그로트 아카데미에 머물고 있던 첼시피온 왕자를 황궁으로 초대했다 . 말이 초대였지 그것은 억류였다. 그리고 1년이 지난 지금까지 첼시피온은 고국으로 되돌아가지 못했다. 밝혀져 있지 않지만 신의 보석의 주인중 한 명인데다 뛰어난 마법적 재능을 가지고 있고, 요정의 피를 이은 첼시피온이 아 무리 이유가 있다고 해도 황궁에 억류되어 있을 까닭은 없었지만 처음 황궁에 억류된 1년 전부터 지금까지 단 한번도 다른 곳에서 첼시피온의 모습이 발견된 적은 없었다. 겔트너가 더욱 불안감을 느끼고 케이스워크에게 말을 조심하는 까닭은 여기에 있었다. 어떤 방법 으로 케이스워크가 첼시피온 왕자를 잡아두고 있는지 알지 못했기 때문에 페르마 대공왕 역시 함 부로 움직이지 못하고 몇 번이나 사신을 보내는 방법을 썼다. 그러나 케이스워크의 대답은 한결같았다. 라딘 라메르를 되돌려 보내라, 그 전에는 놓아줄 수 없다고. 페르마 대공왕이 첼시피온을 그로트 아카데미에 보낸 것은 확실히 빛의 보석을 계승한 라딘 라메르와 친분을 가지게 하고 그를 사이드 공국으로 데려오기 위해서였다. 그 계획은 순조롭게 진행되었고, 용병길드에 의뢰하는 방식으로 계획은 완수 직전에 이르렀다. 그러나 도중에 라딘 라메르는 어딘가로 사라져 버렸고, 누구도 행 방을 알 수 없게 되었다. 결국 모든 책임을 지게 된 것은 사이드 공국, 첼시피온이 된 것이다. "그대들의 뜻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나 역시 양보해야 할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은 충분히 구 분해 두고 있다. 즉위식까지 충분히 휴식을 취하도록. 즉위식에는 첼시피온 왕자도 나올 테니 쌓 인 이야기가 있다면 그 때 하도록 하게. 그럼, 오늘은 이것으로 용건이 끝난 것으로 하지." 일방적으로 대화를 끝낸 케이스워크는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황태자가 일어섰는데 자리에 앉아 있을 수 없게 된 겔트너와 부관 역시 자동적으로 몸을 일으켰다. "사이드 공국에서 온 사신을 숙소로 모셔라." 케이스워크가 시종을 불러 명령하자 둘은 어쩔 수 없이 인사를 하고 나서 알현실을 빠져나갈 수밖 에 없었다. 사이드 공국의 사신을 내보내고 난 케이스워크는 낮게 웃었다. 라딘의 실종과 뒤이은 스위드의 실종으로 인해 리카도 제국은 동시에 두 명의 신의 보석 계승자를 잃었다. 지금까지 밝혀진 바로는 대륙을 움직이는 다섯 명의 유력자가 속한 다섯 나라에 각각 한 명씩 계 승자가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누구인지 밝히지 않은 나라가 많았지만 현재 대륙에는 신이 지상에 남겨두고 간 여섯 개의 보석이 모두 주인을 찾았다. 이미 19년 전에 어둠의 보석의 주인이 된 스위드의 존재를 숨기고 있던 제국은 라딘 라메르가 빛 의 보석을 계승한 사실을 일부러 알렸다. 그것은 제국에 두 명이나 되는 보석의 계승자가 있다는 사실을 밝히지 않기 위해서이기도 했고, 다른 나라의 움직임을 살피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그러나 라딘 라메르가 본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내고 나서 그 사실을 밝히겠다며 움직이던 스 위드가 라딘의 뒤를 이어 실종되자 조급해진 것은 케이스워크 쪽이 되었다. 어머니를 만나러 가겠다고 말한 이후 되돌아오지 않는 스위드를 찾기 위해 케이스워크는 마녀 휘 트린에게 연락을 취했지만 그녀는 스위드는 이미 예전에 자신이 있어야 할 장소를 선택했고, 자신 은 아들의 의사를 존중한다고 대답했다. 결국 케이스워크는 최후의 수단을 선택했다. 라딘 라메르가 실종된 원인을 제공한 첼시피온 왕자 를 억류한 것이다. 그를 억류하는데는 휘트린의 도움을 받았다. 마녀의 힘은 인간으로서는 전부를 측량할 수 없을 정 도로 깊은 것이어서, 휘트린이 건 몇 시간에 걸친 마법 봉인 끝에 첼시피온은 더 이상 마법을 쓸 수 없게 되었다. 마법을 쓸 수 없는 첼시피온은 더 이상 두려운 존재가 아니었다. 비록 그의 몸의 반을 채운 것이 요정의 피라지만 날쌘 몸놀림이나 사람의 마음을 읽는 능력 같은 것은 탈출하는 데 조금도 도움이 되지 못했다. 사이드 공국의 사신을 내보내고 나서 케이스워크 역시 알현실을 빠져 나와 집무실로 향했다. 케이 스워크가 집무실 책상에 앉자 황제의 허가가 필요한 서류를 정리해 두고 있던 서기관이 책상 위에 서류 뭉치를 올려놓았다. 케이스워크는 말없이 서류를 읽고 싸인을 하거나 명령서를 쓰면서 시간을 보냈다. 몇 시간 동안 말없이 일에 열중하고 있던 케이스워크는 식사를 집무실로 가져올 것을 명령하고 집 무실 안에서 간단하게 식사를 마쳤다. 그리고 나서 늦은 시간까지 밀린 일들을 처리했다. 내일 하 루는 즉위식을 위한 준비를 해야하므로 일을 처리할 수 없을 것이 분명했기 때문에 미리 해두어야 할 일은 많았다. 모든 일을 끝마치고 나서 케이스워크는 집무실을 빠져 나와 다시 달의 궁으로 향했다. 황후의 방 에 들어가자 낮과 마찬가지로 천개 안쪽에 누워 있는 청년은 미동조차 없이 잠들어 있었다. 케이스워크는 천개를 걷어올리고 침대로 들어가 한쪽 끝에 걸터앉았다. 걸치고 있던 옷을 하나 둘 씩 벗어 던지고 맨 몸이 된 그는 시트를 걷어올리고 넓은 침대 중앙에 누운 청년의 곁에 몸을 눕 혔다. 가느다란 근육으로 감싸인 아름다운 청년의 몸을 감상하던 케이스워크의 시선은 어깨를 넘어서 자 라난 웨이브진 금발 머리카락에 이르렀다. 케이스워크도 금발이었지만 청년의 머리카락은 부서질 것 같은 엷은 색이었고 가늘고 아름다웠다. 게다가 손끝에 닿는 감각이 너무 부드러워서 기분이 좋을 정도였다. 깨끗하고 흰 피부 위에는 곳곳에 붉은 흔적이 남아 있었다. 케이스워크는 자신이 만들어낸 그 흔 적을 일일이 손끝으로 쓰다듬었다. 한참동안 몸을 쓰다듬고 머리카락을 훑어도 청년은 눈을 뜨지 않았다. 그러나 케이스워크의 손이 엉덩이 사이로 파고들자 서서히 감겼던 눈이 뜨였다. 긴 금색의 속눈썹 사이로 푸른 눈동자가 드러났다. 어딘지 모르게 멍하게 느껴지는 푸른 눈동자는 케이스워크가 손을 멈추지 않고 내부로 파고들자 고통스러운 듯이 흔들렸다. "...그..만..." 쉬어버린 목소리가 입술 사이로 새어나왔다. 평소에 청년을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같은 사람이 낸 목소리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그의 목 소리는 갈라져 있었다. "넌 이걸 좋아하잖아. 안 그래? 첼시피온?" 케이스워크는 첼시피온의 내부로 들어간 손가락을 거칠게 움직였다. 그러자 첼시피온이 낮은 신음 성을 흘렸다. 곡선을 그리고 있던 눈썹이 치켜 올라가고 아름다운 얼굴에 고통의 흔적이 드리워졌다. "겔트너." 케이스워크는 손가락의 움직임을 멈추지 않은 채 그 이름을 내뱉었다. 고통으로 인해 찌푸러져 있 던 얼굴이 놀라움으로 바뀌었다. "이번에는 페르마 대공왕도 꽤 안달이 난 모양이야. 동생을 다 보내고 말이야." "윽..." 내부를 휘젓던 손가락이 한번에 빠져나가자 첼시피온은 참지 못하고 신음했다. "이틀 후 즉위식에서 만날 수 있게 해 주지. 하지만 쓸데 없는 말은 하지 않는 것이 좋아, 첼 시피온. 넌 영리하니까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싶어하는 지 더 이상 말하지 않아도 될 거야. 그렇지 ?" 상체를 일으키려던 첼시피온은 케이스워크의 손에 의해 동작을 제지당했다. 케이스워크의 두 손이 첼시피온의 허리를 붙잡았다. 첼시피온은 그 동안의 경험에 의해 다음에 이어질 일을 깨닫고 몸을 피하려 했지만 케이스워크의 힘을 당해낼 수 없었다. "크읏...!" 케이스워크가 한번에 내부로 들어왔다. 내벽에 와 닿는 뜨거운 감각과 형태가 지나칠 정도로 생생 하게 느껴져서 첼시피온은 몇 번이나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지금까지 그래왔듯 첼시피온은 벗어 날 수 없었다. 마법을 잃어버린 이후로 첼시피온은 그 동안 자신을 지탱해 왔던 의지마저 완전히 잃어버린 것 같 았다. 아니, 분명 처음 마법을 봉인당하던 시점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비록 마법은 봉인 당했지만 첼시 피온은 요정의 아이였고 바람의 보석의 계승자였다. 비상한 머리를 가졌다고는 해도 보통 인간에 불과한 케이스워크의 손에서 빠져나갈 자신은 충분히 있었다. 그러나 그런 생각이 자신의 착각에 불과했다는 것을 깨닫게 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 지 않았다. 케이스워크는 첼시피온의 몸을 짓밟았다. 다른 생각을 하지 못할 정도로, 몸을 일으킬 수 없을 정 도로 격렬하게 첼시피온을 가졌다. 보통 사람과는 다른 사고방식에 감정을 가지고 있던 첼시피온도 육체의 고통과 남자에게 짓밟힌다 는 충격에서는 벗어날 수 없었다. ================================================================= 네. 남정네의 정체는 예상하신 분들도 계시듯이 첼시피온이었습니다. ^^;; 처음에 이 부분을 쓰고 나서 상현이와 이야기 했던 것이 떠오르는군요. 호홋. 어서 뒷 이야기를 써야 하는데 요즘 제정신이 아니라 참....괴롭습니다. 추석은 다들 잘 보내셨으리라 생각합니다. 저는 제사만 지내고 집에서 내내 책 읽고 뒤굴뒤굴 했습니다. -0-;;; 케이스워크와 연결된 부분에서 질척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귀를 막고 싶었지만 첼시피온은 들어 올린 상체가 무너지지 않도록 지탱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힘겨웠다. 유연하고 부드러운 게다가 아름다운 몸을 자신의 것으로 만든 지 일 년. 케이스워크는 스위드를 잃은 후 무너진 마음을 첼시피온을 통해 메웠다. 비록 그 방법이 잘못된 것이라고 해도 케이스워크는 이제 더 이상 생각을 바꿀 마음은 없었다. 라딘 라메르의 실종에 첼시피온이 관여했지만, 그도 라딘의 현재 행방을 모른다는 사실은 알고 있 었다. 하지만 케이스워크는 그 이유를 들어 언제까지고 첼시피온을 잡아둘 수 있다면 그렇게 할 생각이었다. 차라리 이대로 라딘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케이스워크의 바램은 그대로 이루어지는 것 이다. "마법을 봉인당했다는 사실이 알려지지 않도록 행동하는 것이 좋을 거야. 첼시피온. 내가 하고 싶어하는 말이 뭔지는 잘 알고 있겠지?" 첼시피온은 맞닿은 피부를 통해 전해지는 케이스워크의 진심을 읽어내고 또 다시 몸을 떨었다. 케 이스워크를 둘러싸고 있는 광기는 너무 깊고 어두워서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제국의 황태자로 태어나 지위를 위협받을 일도 없고, 지금까지 황태자의 이름에 걸맞는 행동을 보 여온 사람인데 어째서 이렇게 깊은 광기를 가지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인간 안에는 누구나 깊은 광기를 숨기고 있는 것이고, 그것은 첼시피온도 예외는 아니었다 . 아직 스스로 깨닫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케이스워크는 대답하지 않는 첼시피온의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자, 첼시피온. 어서 대답해." 더욱 더 깊이 삽입된 케이스워크를 느끼며 첼시피온은 낮게 신음했다. 비록 몸은 완전히 케이스워 크에게 빼앗겼지만 첼시피온은 적어도 최후에 남은 자존심은 버리지 않았다. 요정의 피가 섞였다는 것은 인간이지만 인간이 아니기도 하다는 뜻이 되었다. 첼시피온은 극단적 으로 자신의 정신을 부수거나 깊은 곳으로 침잠되는 행동은 하지 않았다. 허리를 붙잡고 있던 손이 풀리고 깊이 연결되어 있던 엉덩이 사이로 손가락이 파고들었다. 더 이 상 공간이 없을 정도로 밀착된 그곳을 억지로 비집고 들어온 손가락 때문에 첼시피온은 얼굴을 찡 그렸다. 쾌감과 뒤섞인 고통이 온 몸을 경직시켰다. "어서 대답해." 케이스워크가 재촉했지만 첼시피온은 신음 소리 이외에는 어떤 말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몸 은 함락 당했어도 아직 마음은 무너지지 않았다. 케이스워크는 손가락을 넣은 자세 그대로 격렬하게 허리를 움직였다. 그런 그의 움직임은 첼시피온이 정신을 잃고 몸을 축 늘어트릴 때까지 계속되었다. 황태자 케이스워크가 리카도 제국의 황제로 즉위하는 날. 첼시피온은 시종과 시녀들의 시중을 받아가며 목욕을 마치고 옷을 입었다. 케이스워크가 보낸 흰 색 예복은 첼시피온에게 잘 어울렸다. 흰 피부와 균형 잡힌 몸, 그리고 조금 야윈 듯한 아름다운 얼굴은 타인의 시선을 잡아 끌기에 충 분했다. 평소에도 인간과는 다른 미모로 인해 유명했던 그였지만 요즘은 그 아름다움에 애처로움 이 더해져 과거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사람들의 시선을 끌어들였다. 침대에서 벗어나 옷을 입고 걸음을 옮기는 동안 첼시피온의 표정은 조금씩 달라졌다. 무표정하던 얼굴이 온화한 웃음을 머금고 익숙한 표정을 지었다. 그것은 불과 1년 전까지만 해도 첼시피온의 얼굴에 떠올라 있던 온화한 표정이었다. 즉위식은 본궁에 있는 대 연회장에서 이루어진다. 첼시피온이 대 연회장에 도착했을 때 그곳에는 이미 각국에서 온 축하 사절단과 제국의 귀족들로 가득했다. 사람들은 친한 자들끼리 모여 작은 목소리로 각자 환담을 나누고 있었다. 첼시피온이 모습을 드러내자 사람들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일제히 시선을 집중시켰다. 첼시피온 이 황태자에게 억류되고 있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무슨 일이라도 생긴 것은 아닐까하고 궁금해하는 표정들이 역력했지만 첼시피온은 이전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모습으로 나타났다. 사람 들은 안도한 것인지 그렇지 않으면 실망한 것인지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으며 첼시피온을 바라보다 가 황태자의 등장을 알리는 목소리에 그쪽으로 주의를 돌렸다. 화려한 황제의 예복을 입고 등장한 케이스워크는 연회장 중앙에 마련된 단상을 향해 걸어갔다. 즉 위식을 주재하는 것은 그로트 아카데미에서 교수로 재직중인 늙은 신관이었다. 많은 시선을 받으며 단상 위에 오른 케이스워크가 신관이 씌워주는 보석으로 장식된 황제의 관을 쓰고 나서 손을 대는 것이 아까울 정도로 화려한 황제의 홀을 손에 들고나자 신에게 황제가 되었 다는 것을 고하는 것으로 즉위식은 끝이 났다. 설명은 간단했지만 꽤 까다로운 예식 절차 때문에 길어진 즉위식을 첼시피온은 여유 있어 보이는 표정으로 지켜보았다. 즉위식이 끝나고 나자 낯익은 얼굴이 첼시피온에게 다가와 말을 걸었다. "잘 지낸 모양이구나." 숙부인 겔트너였다. 첼시피온은 부드럽게 미소지으며 숙부에게 인사했다. "오랜만입니다. 숙부님." 겔트너는 얼굴이 조금 야윈 듯 했지만 예전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첼시피온의 모습을 확인하자 눈 에 띄게 안도한 표정을 지었다. 첼시피온이 가진 힘을 의심한 것은 아니지만 1년 동안이나 붙잡혀 있었다는 사실이 그를 불안하게 한 것이었다. 언제나 냉정하기 그지없는 페르마 대공왕 조차 1년 이 지나고 나자 직접 겔트너를 불러 제국에 갈 것을 명령했을 정도이니 겔트너의 걱정은 당연한 것이었다. "건강해 보여 다행이지만 어째서 돌아오지 않는지 모르겠구나. 내가 모르는 무슨 생각이 있는 거라면 더 이상 말은 않겠지만..." "말씀 대로입니다. 제게도 생각이 있습니다. 제 입장은 잊지 않고 있으니 아버님께도 그렇게 전해 주시기 바랍니다." 첼시피온이 처한 상황을 모르는 겔트너는 첼시피온이 충분히 돌아올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돌아오 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차라리 첼시피온이 힘을 봉인 당했다는 사실을 밝힌다면 케이스워크 의 행동은 충분히 문제가 되지만 첼시피온은 그 사실을 밝히지 않았다. 케이스워크가 미리 언질을 하지 않았다고 해도 밝히지 않았을 것이다. "언제가 될지는 알 수 없지만 반드시 아버님께서 흡족하게 여기실 만한 결과를 가지고 돌아가 겠습니다." 첼시피온의 말은 특별하게 강조한 것도 아니고 평상시처럼 부드럽게 말했을 뿐이었는데도 겔트너 에게 신뢰감을 느끼게 만들었다. 아마도 그것은 첼시피온이 타고난 요정의 피가 주는 힘인지도 모 른다. 첼시피온의 아름다운 얼굴과 부드러운 표정, 온화한 목소리를 접한 사람은 누구도 쉽게 첼시피온 을 거부하거나 그가 하는 말을 믿지 않는 경우가 없었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그렇게 믿고 대공왕께 전해드리겠다." 겔트너가 연회장에 가득 모인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멀어져 가자 첼시피온은 복잡 한 연회장에서 벗어나 정원과 연결된 테라스로 나갔다. 하늘을 올려다보자 색이 조금씩 짙어지며 밤이 다가온다는 것을 알려 주고 있었다. 첼시피온은 자신을 향하고 있는 몇몇 사람들의 시선을 눈치채고 있었지만 그것을 무시해 버린 채 정원으로 나갔다. 엷게 풍겨오는 꽃향기가 바람에 실려와 코를 간질였다. 이런 식으로 온 몸 가득 대기를 느낄 때면 모든 것을 잊고 그 감각에만 몸을 맡길 수 있었다. 이 렇게 모든 것을 잊는 동안 첼시피온은 자신이 겪은 일이나 지금 상황도 모두 잊는 것이 가능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평화로운 정원을 응시하던 첼시피온의 뇌리에 문득 2년 전에 아카데미에서 헤어진 이후로 소식을 듣지도 못하고, 결국 첼시피온이 케이스워크의 손에 떨어지게 된 원인을 제공한 존재. 라딘이라는 이름을 가진 소년의 얼굴이 떠올랐다. 얇지만 선명한 검은색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던 창백한 피부의 소년은 첫인상 자체는 약해 보였지 만 결코 약하지 않은 특이한 존재였다. 더군다나 가문의 스캔들 때문에 제대로 된 교육도 받지 못 하고 갇혀 지냈다는 소문과 달리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은 제대로 할 줄 알았고, 성격 또한 강인했 다. 더군다나 언어에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어서 얼마 다니지 않은 아카데미에서도 그 실력을 인정할 정도였다. 그러나 그 소년 역시 너무나 쉽게 첼시피온을 믿었고, 첼시피온이 진심으로 자신을 믿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자 크게 화를 냈다. 그것은 믿음을 배반당한 사람이 보여주는 당연한 모습이었지만 라 딘은 보통 사람과는 조금 달랐다. 원래 처음부터 첼시피온은 라딘의 말을 믿지 않았다. 요정의 피가 주는 힘은 소년의 말이 진실이 라고 말해 주었지만, 라딘이 말하는 세상이 실존할 리가 없었다. 라딘은 그저 사고의 충격으로 인 해 기억에 혼란을 일으킨 것뿐이라고 첼시피온은 확신했다. 라딘은 첼시피온이 아무렇지 않게 곁에 다가가는 것을 막아서지는 않았다. 하지만 진심으로 화를 냈다. 첼시피온에게 그런 식으로 마음을 드러내며 부딪쳐온 존재는 처음이었다. 아무리 외모가 아름다워도 사람들의 감탄을 자아 낼 정도로 뛰어나다고 해도 그들의 의식 깊은 곳 에는 첼시피온은 인간이 아니다. 혹은 반쪽짜리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담겨있었다. 그리고 첼시피온이 아름다운 것은, 마법에 뛰어난 것은 모두 요정의 피가 섞였기 때문이라거나 페 르마 대공왕의 아들이기 때문에 당연한 것이라고 말했다. 첼시피온에게는 두 명의 여동생과 한 명의 형, 그리고 한 명의 남동생이 있었다. 형은 정치적인 수완이 상당히 뛰어났고, 동생은 어린 나이부터 검술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페르마 대공왕의 자식들 중에 대외적으로 가장 잘 알려져 있는 것은 형제들 중 유일하게 인간이 아닌 요정의 피가 섞인 첼시피온 이었다. 첼시피온이 타고난 인간이 아닌 듯한 외모가 그를 알려지게 만든 원인이 되기도 했지만 페르마 대 공왕은 다른 자식들을 첼시피온의 그늘에 숨겨 드러나지 않게 만들었다. 첼시피온은 그 이유를 알 고 있었지만 지금까지 단 한번도 그 이유를 문제 삼은 적도 없고, 아버지가 자신에게 시킨 일에 의문을 가진 적도 없었다. 그러나 라딘을 만난 이후로 첼시피온의 생각은 조금씩 달라졌다. 여전히 라딘의 말은 믿지 않았지 만 라딘 이라는 사람 자체에 대한 흥미는 상당히 커졌다. 라딘은 혼자 있어도 빛을 낼 줄 아는 뛰 어난 보석이었다. 그리고 지금. 케이스워크에게 철저하게 몸을 빼앗기고 마법까지 잃어버린 지금에 와서야 첼시피온은 겨우 스스 로를 돌아볼 여유를 얻었다. 아직도 며칠 전 케이스워크가 귓가에 속삭이던 목소리가 생생했다. 그의 목소리를 떠올리자 저절 로 오싹하고 등골이 떨려왔다. 2년 전까지 첼시피온을 지배해 온 목소리가 페르마 대공왕의 것이었다면, 지금 첼시피온을 지배하 는 목소리는 황태자에서 이제는 제국의 황제가 된 케이스워크의 것이었다. 마음은 그를 거부해도 몸은 아무렇지 않게 그의 행동을 받아들였다. 그런 육체의 반응과 정신의 반발 사이에서 첼시피온은 고통을 겪고 있었다. 아무리 인간과는 다르다고 해도 아직 첼시피온은 10대인 소년이었고, 그의 세계를 만든 것은 페르마 대공왕이었다. 그 세계가 한번에 달라진 것이다. 온화함을 유지하고 있던 첼시피온의 얼굴이 서서히 균열을 일으켰다. 첼시피온의 내면을 유지하고 있던 인간으로서의 얼굴과 요정으로서의 얼굴이 서로 반발하며 부딪 치고 있었다. 휘청. 순간적으로 첼시피온의 몸이 비틀거렸다. 갑자기 몸 속에서 토기가 치밀어 올라 금방이라도 속에 서 끓어오르는 것을 게워내고 싶어졌다. 하지만 그것은 단지 첼시피온이 느끼고 있는 감각일 뿐이 었다. "여기서 뭐하는 거에요....? 연회장에 들어가 있어야 하는 사람으로 보이는데..." 정원 한 가운데 멈춰서 있던 첼시피온에게 말을 걸어온 것은 낯선 소년이었다. 고급스러운 정장을 익숙하게 입고 있어서 한 눈에 귀족이라는 것을 알게 해주었다. 단정해 보이는 용모를 가지고 있 어서 조금 더 나이를 먹으면 상당히 눈에 띄는 외모로 자랄 것이라는 예상을 하게 만드는 열살 정 도 된 소년이었다. "산책." 첼시피온은 자세를 바로 하며 짧게 대답했다. 타인에게 친절한 태도를 유지하는 것은 버릇이 되었 지만 지금은 소년의 금발 머리를 보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나빠졌다. "어디 아파요? 얼굴 색이 안 좋은데...?" 처음에는 아이다운 호기심으로 말을 걸었겠지만 옆에서 얼굴을 들여다본 결과 첼시피온의 안색이 상당히 안 좋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소년은 이번에는 근심 섞인 어조로 물었다. "방으로 돌아가서 쉬면 괜찮아 질 거야." 첼시피온은 그렇게 대답하고 나서 소년의 얼굴을 보지도 않고 몸을 돌렸다. 그러나 몇 걸음 걷지 않아 이번에는 가장 마주치고 싶지 않은 얼굴과 맞닥트려야 했다. "왜 여기에 나와있지, 첼시피온?" 즉위식을 마치고 연회장 안에서 귀족들을 상대하고 있어야 할 케이스워크가 정원에 나와 첼시피온 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있었다. 첼시피온은 애써 표정을 되돌리며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케이 스워크는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머금은 채 첼시피온의 얼굴을 쓰윽 하고 스쳐 지나가 뒤쪽에 서 있을 소년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카예드." 아무래도 첼시피온에게 말을 걸었던 소년은 케이스워크가 알고 있는 사이인 모양이었다. "왜 연회장에 가지 않았지?" "유모가 가라고 했지만 내가 싫다고 했어요. 나는 아버지의 아들이지만 황태자가 될 리가 없으 니 처음부터 가지 않는 게 좋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어린 소년치고는 상당히 야무진 말투였다. 하지만 첼시피온은 소년이 한 말에 들어있던 한 마디의 단어에 놀랐다. ".....아버지...?" 그리고 자기도 모르게 소리내어 중얼거리자 케이스워크가 피식하고 웃더니 비어있던 손을 들어 소 년을 불렀다. "이리로 와라, 카예드. 소개하지. 이쪽은 사이드 공국에서 온 첼시피온 왕자다." 천천히 몸을 돌리자 조금 전의 소년이 첼시피온을 올려다보며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이쪽은 내 아들인 카예드다." "왠지 그럴 것 같았어요. 유모에게 들었는데 황궁에 요정의 피가 섞인 다른 나라 왕자님이 와 있다고요. 정말 아름답군요." 아이의 눈에도 첼시피온의 외모는 보통 인간과는 다르게 보인 모양이었다. 하지만 첼시피온은 그 말에 순수하게 기뻐할 여유가 없었다. 이제 보니 카예드라는 소년의 눈매는 케이스워크와 흡사했다. 게다가 푸른색이지만 약간 붉은 기 가 도는 눈동자나 선명한 금발은 소년이 황실의 핏줄이라는 사실을 확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조금 전에 느낀 불쾌감은 잘못된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예전 같았으면 이렇게 소개를 받으며 말 을 듣기 전에 둘의 관계를 알아 차렸겠지만 지금의 첼시피온은 예전 같지 않았다. 그 동안 쌓여온 피로가 마치 첼시피온이 가지고 있는 요정 특유의 능력조차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 도록 억누르고 있는 것만 같았다. "자, 너는 연회장에 가 있거라. 나는 이 분을 방으로 데려가겠다. 타국의 귀빈을 소흘히 대접 해서는 안되니까." "네, 아버지. 하지만 저는 그냥 제 궁으로 돌아갈게요." 케이스워크는 예의 바르게 말하는 카예드의 뺨에 허리를 숙여 입을 맞추고는 정원에서 작별을 고 했다. 아이의 그림자가 완전히 사라지고 나자 케이스워크의 표정이 완전히 돌변했다. "아무래도 요정 왕자님께는 사람이 많은 곳은 편하지 않은 것 같으니 방으로 돌아갈까?" 낮게 가라앉은 케이스워크의 목소리를 기분 나쁘게 받아들이며 첼시피온은 발을 내딛었다. ============================================================== 삐딱한 케이스워크씨에게도 귀여운 아들이(!!) 있었습니다. -ㅂ-;;; 요즘 새벽마다 리니지2를 하느라고;; 부들거리고 있습니다. 그래도 소설은 쓰고 게임을 하자는 생각에 한편 다 쓸때까지는 게임 금지!라고 스스로에게 말하고 있지만 손이 자꾸 리니지 단축키를 누르려고 하는군요 -0-; 주문한 책이 잔뜩 배달와서 그것도 봐야하는데 시간이 모자라요.. 며칠 전에는 언니와 이런 얘기도 했습니다. 디키 : 언니, 우리 둘은 자매니까 한 사람이 잠 자면 다른 사람도 같이 잔 걸로 치면 좋을텐데. 그러면 나는 안 자도 되는데 말이야. 언니 : 그럼 주말에는 넌 진짜 안 자도 되겠다. 제 언니는 잠이 많고;; 저는 매일 밤을 새다보니 저런 실없는 말도 하곤 합니다. -ㅅ- "라메르 백작님, 안녕하십니까." 겔트너는 사람들과 어울리지 않고 연회장 한쪽에 서서 와인을 들이키고 있던 라메르 백작에게 다 가가 인사했다. 불미스러운 스캔들에 휩싸여 있던 라메르 가문은 2년 전, 라딘 라메르가 신의 보석을 얻은 이후로 예전의 명예와 부를 되찾았고 지금은 제국 제일의 귀족 가문으로 거듭났다. 실종된 라딘 라메르의 행방은 찾아내지 못했지만, 라메르 가문이 대귀족의 선두에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겔트너 후작님이시군요. 안녕하십니까." 차분한 목소리로 인사를 건네는 라메르 백작을 겔트너는 조심스럽게 관찰했다. 결국 모든 일의 원흉은 다름 아닌 라메르 백작가에 있었다. 라딘 라메르도 피해자였지만 지금은 죽었는지 살았는지 조차 알 수 없는 그의 존재가 사이드 공국의 왕자인 첼시피온에게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동생분의 소식은 아직 없습니까?" 겔트너는 자연스럽게 안부를 묻는 것처럼 라딘을 화제로 꺼냈다. 그러나 라메르 백작은 당황하는 것 같지도 않았다. 그저 자연스럽게 아직 찾지 못했다고 대답했을 뿐이었다. "무척 안타까운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정말 아무렇지 않아 보이는 라메르 백작의 태도에 겔트너는 의문을 느꼈다. 라딘 라메르의 존재는 확실히 라메르 백작가에 있어서 이득이 되는 존재는 아니었다. 그의 존재로 인해 가문은 파국의 길을 걸었다. 물론, 누구도 그 소년이 진짜 원인이 아니라는 사실은 잘 알고 있었지만 그러나 라 메르 가문의 스캔들은 라딘을 빼놓고는 이야기 할 수 없는 것이었다. 겔트너는 대화를 나누는 간간이 라메르 백작의 표정을 관찰했지만 그는 동생의 실종 사실 때문에 고민하는 것처럼 보이지도 않았고 불안한 것 같지도 않았다. 골칫거리가 사라졌다고 속시원히 말 할 수 없는 것은 라딘 라메르가 신의 보석의 계승자 중 한 명이기 때문이었다. 사실 사이드 공국에서도 그 소년을 손에 넣기 위해 첼시피온을 아카데미에 입학시키지 않았던가. 올해로 서른 살이 된 라메르 백작은 제도 최고의 미모로 이름 높았던 모친의 용모와 오랜 대귀족 의 혈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던 부친의 용모를 그대로 물려받아서인지 나이보다 훨씬 젊어 보였 지만,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무게감을 가지고 있었다. 현재 라메르 백작가가 제국에서도 손꼽히는 유수의 귀족가문이라는 사실을 굳이 상기하지 않더라도 라메르 백작의 전신에서 느껴지는 분위기 는 함부로 취급할 수 없는 것이었다. "오라버니." 한참 겔트너가 테이드에게 이런 저런 말을 걸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였다. 활짝 핀 꽃처럼 농 익은 미모를 가진 아름다운 여인이 미소 띈 얼굴로 다가와 말을 걸었다. 그녀가 꺼낸 호칭을 듣고 겔트너는 그녀의 정체를 파악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말이 아니더라도 그녀에 대한 소문은 사이드 공국까지 퍼져 있었다. "취드린 공작부인이 아니십니까?" 겔트너가 인사말을 건네자 루사벨라는 부드러운 음성으로 그의 말에 대답하며 살짝 고개를 숙였다 . "제가 두 분의 대화를 방해한 건 아닌지 모르겠군요." "아닙니다. 얼마 전 예쁜 따님을 낳으셨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루사벨라는 부드러운 표정으로 감사의 말을 건넸다. 루사벨라 역시 스물 여섯이라는 나이로는 보 이지 않을 만큼 충분히 매력적이고 아름다운데다 몸매 역시 뛰어났다. 과거에 라메르 백작가에 불 미스러운 일만 생기지 않았더라도 충분히 다른 나라의 왕비가 될 수도 있는 여인이었지만 지금은 공작부인으로서 나름대로 입지를 굳히고 있는 것 같아 보였다. "오라버니와 오랜만에 만난 탓에 따로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데, 잠시 자리를 옮겨도 괜찮을까 요?" 루사벨라의 말을 듣고 겔트너는 고개를 끄덕였다. 외교관이라는 직책 때문에 많은 사람들과 만났고, 대륙을 움직이는 다섯 명의 유력자라 불리는 5 개국의 왕과도 모두 만났었다. 실제로 그들 중 한 명은 겔트너의 친형이기도 했으니 그 역시 함부 로 얕볼 만한 인물은 아니었지만, 라메르 백작가의 두 남매는 겔트너에게서 부담을 느끼고 있는 것 같지도 않았다. 묘한 여유로움을 느끼게 만드는 매력적인 두 남매는 우아하게 인사를 하고 나 서 연회장을 빠져나갔다. "방금 전 그 사람은 분명 이번에 사신으로 왔다던 사이드 공국의 겔트너 후작이죠?" 겔트너 본인에게 직접 소개를 들었지만 루사벨라는 확인 차 다시 물었다. 테이드는 대답하지 않았 지만 루사벨라는 처음부터 대답을 들을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바로 다음 질문으로 넘어갔다. "라딘이 실종된 후부터 오라버니는 너무 많이 변했어요. 제가 모르는 무슨 일이 있었던 거죠?" 루사벨라는 중간 과정을 모두 생략하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라딘이 실종된 지 벌써 2년. 온갖 수단을 다 사용해 대륙 전체를 다 찾았지만 라딘의 행방은 어디 에서도 발견할 수 없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는 동안 테이드는 라메르 백작으로서 해야 할 일에 몰두하며 루사벨라와도 만 나지 않았다. 몇 달 전 루사벨라가 아이를 낳았을 때 한 번 공작가로 찾아온 게 다였다. "나에게도 말 할 수 없는 일인가요? 예전에는 말할 수 없었어도 지금은 이야기 해 줄 때도 되 지 않았어요...? 벌써 2년이 지났어요." 무엇이 있었는지 확실하게 알지는 못했지만 루사벨라는 여성 특유의 예감으로 테이드를 변화시킨 원인이 막내 동생인 라딘에게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사실 루사벨라 역시 라딘으로 인해 어느 정도의 변화를 겪었다. 그녀는 아직 라딘에게 제대로 사과도 하지 못했고, 누나로서 해 주고 싶은 것들도 해 주지 못했다 . 라딘이 신의 보석의 주인이 된 후에 라딘이 그 힘에 적응하기 위해 거의 침대에 누워 지내던 동 안 얼굴을 잠깐 본 것이 다였다. 그 후에 라딘은 아카데미에 들어갔고 얼마 지나지 않아 실종되었 다. 그리고 2년이 지난 것이다. 한동안 침묵을 지킨 채 어둠이 내려앉고 있는 정원 한 구석을 응시하고 있던 테이드가 겨우 입을 열었다. "라딘은..... 갈 길을 선택했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라딘은 우리들의 동생이지만 한 사람이기도 해. 라딘은 결국 두 번째를 택했다." 왠지 씁쓸하게 들려오는 테이드의 목소리를 흘려보내며 루사벨라는 얼굴을 살짝 찌푸렸다. 테이드 가 하는 말을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어느 정도는 알아 차렸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라딘은 라메르 백작가의 일원이고 동생이에요. 저는 그 사실을 단 한번도 잊은 적이 없어요." 테이드는 루사벨라의 얼굴을 응시하다가 다시 시선을 돌렸다. 시선 끝에 비친 하늘의 끝자락은 어 둡고 깊은 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테이드는 지워지지 않는 그 날의 기억을 떠올렸다. 지금 눈에 비치는 색은 마치 그 날의 하늘빛을 닮았다. 라딘을 떠나보내고 점점 어둡게 물들어가던 하늘과 깊고 검던 바다처럼. 걸치고 있던 옷이 거칠게 벗겨지고 침대 위로 무너져 내렸다. 피하기 위해 몸을 돌렸지만, 마치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단단한 손이 몸을 결박했다. 그리고 다리를 벌리고 바로 내부로 침입해 왔다. 파고드는 순간 느껴지는 격통이 몸을 경직시켰지 만 몇 번 움직임이 반복되자 몸은 그 거친 동작에도 쉽게 적응해 버렸다. 이런 건 내가 아니다라고 첼시피온은 마음속으로 몇 번이나 중얼거렸지만, 그 말은 곧 케이스워크 의 목소리에 의해 지워져 버렸다. "널 처음 봤던 때부터 네 얼굴의 그 가면을 깨주고 싶었다." 첼시피온은 정면으로 보이는 케이스워크의 얼굴을 마주보고 싶지 않아서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하지만, 그러자 케이스워크는 기다렸다는 듯이 세차게 허리를 움직였다. 내부를 휘젓는 움직임이 너무 거세서 첼시피온은 억누른 신음을 흘리며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흔들었다. "그리고 결국 네 가면은 깨어졌지." 즐거운 듯이 말하는 케이스워크의 목소리는 선명하게 들려왔지만 첼시피온은 그가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즉위식이 끝나고 연회를 다 마치기도 전에 케이스워크는 정원에 있던 첼시피온을 데리고 달의 궁 으로 돌아왔다. 그리고는 몇 시간 동안이나 끊임없이 첼시피온의 몸을 탐했다. 이제는 익숙해질 법도 했지만 첼시피온은 뜨거운 불기둥 같은 케이스워크를 받아들일 때마다 마음에서 피어오르는 거부감을 감추지 못했다. 몸은 어느 정도 익숙해졌을지 몰라도 정신은 여전히 케이스워크를 거부 하고 있었다. 쾌락으로 몸이 흥분하면 흥분할수록 마음은 더욱 싸늘하게 식어갔다. 그런 것은 케이스워크 역시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더욱 더 첼시피온의 몸 속 깊은 곳으로 자신을 들이밀었다. "....이제...그만..." 거부해도 멈추지 않는다는 것은 잘 알고 있었지만 첼시피온은 힘이 빠진 손으로 케이스워크의 어 깨를 밀어냈다. 그러나 되돌아온 것은 비웃음뿐이었다. "요정의 피라...아주 좋지. 보통 사람이었다면 이런 생활을 1년 동안이나 견디지 못했을 텐데, 넌 정말 대단해, 첼시피온." 낮은 웃음소리가 들림과 동시에 내부에 뜨거운 것이 가득 퍼져갔다. 뜨겁게 달아올랐던 것이 수축 하는 것이 느껴졌지만 케이스워크는 자신을 빼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지난 1년 동안 첼시피온은 분명 변했다. 하지만 변한 것은 첼시피온만이 아니었다. 케이스워크 역 시 과거의 그와는 상당히 달라졌다. 어느 순간부터인가 모든 것이 조금씩 어긋나기 시작해서 이제는 걷잡을 수 없을 만큼 삐뚤어져 버 렸다. 대체 무엇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지 첼시피온은 생각해 내려 애썼다. 그리고 어느 순간 눈을 감은 채 움직이지 않고 있던 첼시피온이 이름 하나를 내뱉었다. "....라딘..." 신음처럼 내뱉은 그 이름을 듣고 케이스워크는 낮은 목소리로 웃었다. "그래, 결국 모든 원인은 그 소년이지. 하지만 이제는 달라. 나는 너를 붙잡았고, 쉽게 놓아줄 생각은 없다." 내벽에 느껴지던 이물감이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첼시피온은 당장이라도 벗어나고 싶었지만 케이 스워크의 손은 결코 그를 놓아주지 않았다. 몇 시간에 걸친 행위가 끝나고 완전히 지쳐서 손끝하나 제대로 움직이지 못한 채 침대 위에 몸을 맡긴 첼시피온을 내려다보며 케이스워크는 단련된 몸 위에 옷을 걸쳤다. 1년 동안이나 첼시피온을 안아왔지만 케이스워크는 단 한번도 함께 밤을 보낸 적이 없었다. 행위가 끝나고 나면 언제가 됐 건 반드시 본궁으로 돌아갔다. 첼시피온은 케이스워크가 옷을 다 입고 방에서 빠져나갈 때까지 눈을 감은 채 움직이지 않았다. 그의 기척이 방 안에서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도 한참이 더 지나서야 첼시피온은 눈을 떴다. 하늘거리는 천개가 침대에 드리워진 채 외부로부터 첼시피온을 가려주고 있었지만 첼시피온은 흐 트러진 시선으로 희뿌연 천자락을 바라보았다. 지금의 자신은 불투명한 저 천과 같다고 첼시피온은 생각했다. 이제는 익숙해진 하반신의 둔통과 다리 사이로 흘러내리는 이물감이 느껴졌지만 첼시피온은 몸을 움직일 생각도 하지 않았다. 케이스워크가 떠나고 나면 한동안 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 생각을 정리한다. 생명이 없는 인형처럼 그렇게 누워있는 동안 첼시피온은 머리 속으로 생각을 정리하고 다시 본래의 자신을 되찾았다. 이미 부서져 버린 부분은 어쩔 수 없지만 그래도 첼시피온은 자신이 누구인지 무엇을 위해 이곳에 남아 있는지 잊지 않았다. ".... .... ....." 한참이 지나고 나서 눈에 거의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작게 첼시피온의 입술이 움직였다. 그 입술 사이로 흘러나오는 것은 보통 사람들은 무슨 의미인지 알아들을 수 없는 요정의 언어였다. ========================================================================= #_# @-@ @^@ 지금 제 상태 입니다. 36시간 가량 잠을 안 잤습니다. =ㅂ=;; 뭔가 신경 쓸 일이 생겨서 그것 때문에 고민하다가 고민을 안 하려고 발악하다가 결국 이래저래 잠을 안 잤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반넘게 유체이탈을 한 듯한 상태입니다;;; 에...이번 주말에는 또 알바가 있는 관계로 연재를 쉴 가능성이 높습니다. 내일 정신을 차리느냐가 관건입니다. ;; 어쨌든 첫번째 파트는 끝났습니다. ^^ Part 2. 검은 마법사 등까지 내려오는 윤기가 흐르는 검은색 머리카락은 목덜미 부근에서 흰색 가죽끈으로 하나로 묶여 있었다. 양쪽 귀에 매달린 손가락 마디 하나 정도 되는 길이의 은 귀걸이는 투박한 직선 형태였지만 자세 히 살펴보면 그 막대 같은 모양의 은 위에 육안으로는 제대로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빽빽하고 섬 세한 문자가 새겨져 있었다. 소년은 무심한 표정으로 강 건너편을 바라보며 무의미한 동작을 반복 하고 있었다.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눈동자는 제대로 주변의 풍경을 바라보고 있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순간. "늦어." 소년의 입에서 투덜거림이 새어나왔다. 낮은 개울가에 앉아 건너편을 바라보는 소년의 등은 검은색 망토에 가려져 있었지만 몸을 감싼 형 태로 대충 소년의 체형을 짐작할 수 있었다. 투덜 거리던 소년은 건너편을 향하던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발목까지 잠기는 높이의 개울물은 맑 고 투명했다. 바닥에 깔린 크고 작은 돌들을 응시하다가 소년은 망토에 가려져 있던 팔을 움직여 개울물에 손끝을 담궜다. 손끝을 통해 전해지는 차가운 감각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한적하구나...." 이번에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소년이 중얼거렸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개울물에 손을 담궜다가 다시 빼내기를 반복하던 소년의 등뒤에 같은 복 장을 하고 있는 청년의 모습이 나타났다. "조금 늦었다." 갑작스럽게 사람이 나타나면 놀랄 법도 한데, 소년은 조금도 놀라지 않고 자연스럽게 일어나 몸을 돌렸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조금이 아니잖아?" 차분한 청년의 목소리에 소년은 감정이 고스란히 담긴 목소리로 쏘아 붙였다. 그러나 그것이 진짜 로 화를 내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소년도 청년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집은 구했어?" "응, 길드에 등록을 하고 오느라 조금 늦었다." 집을 구했다는 소리가 나오자 그제서야 소년의 표정이 조금 누그러졌다. "이제 겨우 집다운 집에서 살아보는 건가..." 소년은 작게 중얼거리며 가벼운 몸놀림으로 개울을 뛰어넘었다. "그럼, 어서 가자." 소년의 뒤를 따르는 청년은 온화한 눈으로 앞서가는 소년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정말 여기가 맞아?" "길드에서 소개받았으니까 맞겠지." "하지만 마법사가 산다기엔 어울리지 않는 곳이야...." 두 명의 남녀가 작은 목소리로 말싸움을 하며 정원을 지나 저택 입구에 멈춰섰다. 문고리를 잡고 문을 두드리자 기다렸다는 듯이 저절로 문이 열렸다. 두 남녀는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지만 목소리는 내지 않았다. "저...이곳이 마법사님이 살고 계시는 곳이 맞습니까?" 문안에 들어선 남자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자 2층 계단을 통해서 단정한 외모의 청년이 내려왔다 . "길드의 소개로 오셨습니까?" 긴 검은 머리카락을 하나로 묶은 청년은 신비한 느낌을 주는 회색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다. "네. 고급 마법에 관한 의뢰는 이곳으로 가라고 하더군요." "그렇다면 잘 찾아오셨습니다. 은밀함이 필요하거나 긴 시일을 두고 효력이 필요한 일이 있다 면 제게 말씀해 주시면 됩니다." 겉보기에는 낡아 보이는 저택이었지만 안으로 들어서자 깔끔하게 관리된 듯한 내부가 드러났다. 두 남녀는 저택 내부를 둘러보며 청년이 안내하는 대로 응접실로 보이는 방으로 따라 들어갔다.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의자에 앉자 남녀 중 남자 쪽이 먼저 입을 열었다. "저희들의 흔적을 다른 사람들이 찾지 못하도록 해 주실 수 있습니까?" 그 한마디를 듣고 청년은 두 남녀가 무슨 목적으로 이곳을 찾았는지 알아차렸다. 말하자면 사랑의 도피를 앞두고 집안에 들키지 않도록 처리해 달라는 것이 목적일 것이 분명했다. 평범한 차림이기는 했지만 남녀의 모습은 결코 평민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네, 물론입니다. 목적지를 밝혀 주신다면 원하는 대로 처리 해 드리겠습니다." 청년이 입가에 미소를 떠올리며 대답하자 그제서야 남녀는 안도한 듯이 한숨을 내쉬었다. "아, 차 준비가 늦었군요. 향이 좋은 과일차는 어떻습니까?" 청년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묻고는 짧게 주문을 외쳤다. 그러자 테이블 위에 고급스러워 보이는 흰 색 다기 세트가 나타났다. 남녀가 놀란 눈으로 그것을 바라보자 청년은 티포트에 손을 뻗어 찻잔에 따르기 시작했다. 방안에 엷은 과일향이 떠돌았다. 그로트 아카데미의 유명인이었던 두 사람이 아카데미를 떠나고 나서 이제 아카데미의 유명인이 된 것은 샤르코 상단의 쌍둥이였다. 평소에 친하게 지내던 라메르 가문의 막내 아들 라딘이 실종되고 나서 쌍둥이는 무엇에 홀리기라 도 한 듯이 마법에 열중했다. 마법이란 재능을 타고나지 않으면 쉽게 대성할 수 없는 것이었지만 쌍둥이는 어느 정도 가지고 있던 재능을 노력으로 커버했다. 쌍둥이 라서가 아니라 정말 친했기 때문에 둘은 늘 함께였고, 말로 표현하지 않아도 서로의 의사 를 파악할 수 있을 정도로 마음이 잘 통했다. 덕분에 한 명이 정교한 마법 주문을 완성시키는 동 안 다른 한 명이 방어 마법을 펼쳐 보호하는 식으로 해서 전투에 관련된 마법에서 뛰어난 실력을 보여주었다. 그뿐 아니라 텔레포트 마법이나 실생활에 응용해서 쓸 수 있는 마법들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쌍둥이의 노력은 아카데미 마법부의 교수들도 인정할 정도였고 둘은 그런 주위 사람들의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들의 일에 열중했다. "카드리. 잠깐만." 리올은 강의실에서 빠져나가는 카드리를 붙잡았다. "왜?" 카드리가 고개를 돌리며 묻자 리올은 작은 목소리로 자신을 따라오라고 말했다. 강의실을 빠져 나와 인적이 드문 건물 뒤편으로 돌아가고 나서야 리올은 걸음을 멈췄다. "뭔데 그렇게 조심스럽게 부르는 거야?" 평소와 다른 리올의 모습에 카드리가 쏘아 대듯이 묻자 리올은 살짝 웃었다. "첼시피온 왕자 말이야." "황태자님이 끌고 갔잖아. 그게 뭐?" 라딘의 실종 후 황실에서 벌어진 몇몇 일에 대해 쌍둥이는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 중에 서 눈에 띌 만한 가장 큰 변화라고 한다면 황태자의 부관이었던 스위드가 자취를 감춘 이후 황태 자의 성격이 달라졌다는 것과, 첫 번째 희생양이 된 것이 첼시피온 왕자라는 것 정도였다. 그러나 쌍둥이는 첼시피온이 어떻게 되었던 간에 그것은 큰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어차 피 타인인데다가 샤르코 상단이 대륙을 주름잡는 큰 손이라고 해도 평민인 자신들과 왕족. 그것도 요정의 피까지 섞인 왕족이 다른 입장이라는 것은 지나칠 정도로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지 않더라도 첼시피온 왕자가 라딘을 속였고, 그 사실 때문에 라딘이 크게 화를 냈었다는 사 실은 쌍둥이도 잘 알고 있는 바였다. "황제 즉위식장에 나왔대. 아버님이 하는 얘기 못 들었어?" 리올이 아버지에게서 들었던 말을 전하자 그제서야 카드리의 표정이 달라졌다. "진짜야?" 카드리는 어제 상단 내에서 맡고 있는 일을 처리하느라 다른 곳에 다녀왔기 때문에 지금에서야 그 소식을 듣게 된 것이다. "별로 이상한 점은 없다는데 그래도 첼시피온 왕자씩이나 되는 사람이 계속해서 황궁에 있다는 건 뭔가 문제가 생겼다는 거겠지?" 라딘과 관련되어 일어난 일련의 사태와 가장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쌍둥이는 다 른 사람들에게는 그저 신기한 화젯거리에 불과한 사건에 지나칠 정도로 흥미를 가지고 있었다. 라딘은 가끔씩 쌍둥이에게 연락을 취해 왔다. 가장 최근에 받은 연락도 반년은 지났지만 라딘이 연락을 취하는 유일한 상대가 쌍둥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고, 쌍둥이는 그 사실에 충분히 만 족했다. 라딘이 마법을 배우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부터는 지지 않기 위해서, 그리고 다시는 예전과 같은 일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쌍둥이는 열심히 마법을 수련했다. 그리고 다시 라딘과 만난 다면 실력을 비교해 볼 것이라고 속으로 자신하고 있었다. "우리가 생각했던 두 가지 경우로 가정해 볼 수 있을 거야." 리올은 생각에 잠겨있던 카드리의 주의를 환기시키듯이 입을 열었다. "첫 번째는 첼시피온 왕자가 어떤 목적을 이루기 위해 황궁에 남아 있는 경우, 두 번째는 어떤 이유로 인해 억지로 붙잡혀 있는 경우." "하지만....첼시피온 왕자는 요정의 피가 섞여 있어. 그런 사람을 가볍게 제압할 수 있는 사람 이 있을까?" 카드리의 의문은 당연한 것이었다. "하지만 역시 중요한 건 첼시피온 왕자는 우리와는 깊은 관계가 있는 것도 아니고, 다른 사람 의 상황을 일부러 신경 쓸 필요도 없다는 것이지. 우리는 라딘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으면 되 니까." 의문을 떠올린 것도 잠시, 카드리는 곧 속 시원하게 결론을 내버렸다. 리올은 그런 카드리를 보고 어쩔 수 없다는 듯이 피식하고 웃었다. "그래, 라딘이 언제 돌아온다는 연락을 주는 가가 제일 중요하지." "참, 라딘을 만나면 그 이름으로 부르면 안 되는데 말이야. 하지만 도현이라는 이름은 너무 생 소한 것 같지 않아?" "어쩔 수 없잖아. 친구의 부탁을 들어주지도 못하는 사람이 될 수는 없으니까." 리올과 카드리는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며 가볍게 웃었다. 누군가가 사라졌어도, 다른 누군가가 그 자리를 채웠어도 시간은 흐르고 사람들은 그 속에서 살아 간다. 타인에게 일어난 일을 이해하고 마음 깊이 그것을 진심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은 그렇 게 많지 않았다. 하지만 쌍둥이는 진실을 떠나서 한 인간의 매력을 느꼈고, 친구라는 매듭으로 묶 이기를 원했다. 그것이 전부였다. "어쨌든 빨리 보고 싶다. 우리가 이렇게 기다리고 있는지 알고 있을까..." 카드리가 중얼거리자 리올은 피식하고 웃었다. 라딘과 얼굴만 마주 대면 말싸움을 할 게 뻔한데도 라딘이 없는 곳에서는 라딘이 보고 싶다고 말 하는 것이 정말 카드리 다웠다. ====================================================== 아직도 헤롱거리고 있지만, 어쨌든 한 편 정리해서 올립니다. 이번 주말은 쉽니다. ^^;; 모두 즐거운 주말 보내세요~ "백작님." 집무실 책상 앞에 앉아 서명이 필요한 서류들을 훑어보고 있던 테이드는 갑자기 벌컥하고 문을 열 고 들어온 노스를 빤히 쳐다보았다. 아무 말 없이 바라보기만 하자 노스는 얼굴을 조금 굳히더니 곧바로 책상 앞까지 다가왔다. "제가 분명 이번 만큼은 꼭 건강 검진을 받으라고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분명 그런 소리를 듣기는 했었다. 황제의 즉위식이 끝난 다음 날, 저택으로 돌아온 테이드에게 노스가 그렇게 말했고 테이드는 고개 를 끄덕였던 것이다. 그러나 닷새가 지나는 동안 테이드는 노스에게 찾아가지 않았다. "괜찮아. 내 몸은 내가 잘 안다." "백작님은 의사가 아닙니다. 아무리 건강하다고 해도 검진을 받는 것은 중요한 일입니다. 더군 다나 백작님 정도의 지위를 가진 분이라면 건강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말로 설명하지 않아도 잘 알고 계시리라 생각합니다만." 노스가 열변을 토했지만 테이드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라딘님이 곁에서 같은 말을 했더라도 똑같은 반응을 보이셨을지 궁금하군요." 노스의 입에서 동생의 이름이 나오자 테이드의 표정이 약간이지만 달라졌다. 노스는 오랫동안 테 이드를 알아 왔기 때문에 충분히 그의 마음이나 생각을 알아 차리고 있었다. 오랫동안 계속 되어온 라딘을 향한 증오가 이제는 애틋한 그리움 혹은 아쉬움이나 후회라는 감정 으로 뒤바뀌었다는 사실을. 이런 커다란 변화는 모두 2년 전. 테이드가 라딘이 탈출을 감행했다가 붙잡혀온 해변가에 다녀온 후로 눈에 띄게 겉으로 드러나기 시작한 것이었다. "원래 인간은 어리석은 존재입니다. 소중한 것은 잃어버리고 나서가 아니면 가치를 깨닫지 못 하는 것입니다." "내게 충고를 하려는 건가?" "물론입니다. 저는 10년도 넘게 라메르 가문을 위해 일해왔고, 백작님을 지켜봐 왔습니다. 이 정도의 말을 할 자격 정도는 충분하다고 생각하는데요. 제 말이 틀렸습니까?" 테이드는 노스의 뻔뻔한 얼굴을 바라보다가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다. 지금 가도록 하지." "지금 저와 함께 일어서시죠." 테이드는 졌다는 듯이 손에 들고 있던 서류를 내려놓고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똑같은 고용인의 신분이었지만 노스는 평민임에도 불구하고 테이드에게 하고 싶은 말을 다 했고, 테이드도 그 사실을 가지고 뭐라고 하는 일은 없었다. 노스의 숙소 겸 검진실로 마련된 넓은 방안으로 들어서자 여러 가지 약 냄새가 코끝을 자극했다. 저택 1층에 있는 방 세 개를 개조해서 만들어진 이곳은 하나는 노스의 침실이었고 방 두 개 중 하 나는 검진실, 또 하나는 안정이 필요한 사람들이 쉴 수 있는 방이었다. 이 방이 만들어진 것 역시 2년 전이었다. "이쪽으로 앉아 주십시오." 노스는 붉은 방석이 깔린 의자를 옮겨와 테이드에게 앉을 것을 권했다. 테이드가 의자에 앉고 나 자 노스는 선반에 놓인 여러 가지 약병들 중에 엷은 푸른 색의 액체가 담긴 병과 노란 색의 액체 가 담긴 병을 꺼내왔다. "먼저 이것을 마셔 주세요. 이것을 마시고 나서 어떤 부분이 아프다면 그쪽에 이상이 생긴 것 입니다." 노스는 먼저 푸른색 액체를 내밀었다. 테이드가 말 없이 그것을 받아 마시자 노스는 조용히 테이 드의 표정을 관찰하듯이 응시했다. 두 모금 정도 되는 액체를 마시고 나서 몇 분이 지나지 않아 테이드는 복부 윗 부분이 쿡쿡 쑤시 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살짝 눈썹을 찌푸리자 노스가 그것 보라는 듯이 표정을 바꿨다. "어디가 이상합니까?" 테이드는 한숨을 내쉬며 아픈 부위를 가리켰다. "위에 이상이 생기신 모양이군요. 위는 신경을 많이 쓰는 일을 하시는 분들이 쉽게 약해지는 부분입니다. 특히 백작님 처럼 지위가 높고, 처리할 일이 많으신 귀족 분들에게는 자주 병이 생기 는 부분입니다. 평소에도 통증을 느끼신 일이 있습니까?" "아니." 노스는 의심스럽다는 듯이 눈썹을 찌푸리다가 다시 선반 쪽으로 가서 이번에는 흰색 가루가 담긴 약병을 꺼내왔다. "이 약을 식사 전에 드시기 바랍니다. 차스푼 으로 한 스푼씩 드시면 됩니다." 약을 건네 주고 난 후 이번에는 노란 액체를 건네고 몸에 이상이 느껴지지 않는지 확인하고 나서 야 검진이 끝났다. 평소에도 몸 관리를 게을리 하지 않았던 탓에 별다른 이상은 없었지만 노스는 자신의 의무를 게을리 할 생각은 없었다. 검진이 끝나고 테이드가 의자에서 일어서려 하자 노스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물었다. "라딘님은...포기하시는 겁니까?" 느닷없는 질문에 테이드가 표정을 굳히자 노스는 부드럽게 미소지으며 말을 이었다. "2년 전부터는 찾으려는 노력도 하지 않으시는 것 같아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반드시 대답할 필요는 없었지만 테이드는 어떤 대답을 해야 할 지 망설였다. 가족들을 제외하고 라딘에 대해 가장 잘 아는 사람을 꼽으라고 한다면 바로 노스였기 때문이다. 그는 12년 전, 라메 르 백작가의 주치의가 된 후로는 계속 라딘을 돌봐왔고, 누구보다도 라딘의 상태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아직...포기한 건 아니야..." 테이드는 생각에 잠긴 듯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최근 몇 년간 라메르 가문에는 여러 가지 일들이 생겼다. 라딘의 기억상실, 라딘이 신의 보석의 주인이 된 사건, 가문의 재건, 라딘의 실종. 생각해 보면 라메르 가문에 일어난 여러 가지 일들은 모두 라딘을 중심으로 혹은 라딘이 원인이 되어 일어났다. 한 사람이 그렇게 많은 일들의 중심에 선다는 사실은 신기한 일이기도 했지만 그 만큼 라딘이 중 요한 사람이라는 뜻도 된다. 이상하게도 늘 겁에 질린 듯이, 주눅이 들어 방에 갇혀 있던 라딘 보다 기억을 잃어 버리고 나서 자신은 라딘이 아니라고 소리치던 그 모습이 더욱 선명하게 기억에 남아 있었다. 노스는 라딘을 늘 가엾게 여겼지만, 당당하게 말하고 쏘아보는 눈빛으로 시선을 피하지 않던 소년의 모습이 훨씬 더 라딘 라메르라는 이름에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대체 라딘은 2년 동안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까. 어쩌면 라딘에게 많은 것을 빼앗고, 증오와 멸시라는 감정만을 안겨주었던 가문을 떠나는 것이 라 딘에게는 훨씬 좋은 일일 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람은 자신과 연결되어 있는 장소를 쉽게 버릴 수 없다. 노스는 언젠가 라딘이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다시 되돌아 올 것을 기대하고 있었다. 어제 잠시 다른 곳에 외출했다가 돌아온 것처럼 그렇게 원래 있어야 할 곳으로 되돌아오기를. 라 딘이 변했듯이 테이드도 과거의 테이드가 아니다. 라딘이 되돌아온다면 이제는 테이드도 그를 진정한 라딘 라메르로서 자신의 동생으로 대해 줄 것 이 틀림없었다. 라딘은 지금 어디에 있는 지도 모르고, 무엇을 하고 있는지도 알 수 없게 완전히 사라져 버렸지만 , 라딘이 남겨놓은 많은 것들은 아직 사람들의 기억 속에 엷은 흔적으로 남아 있었다. 황제 즉위식이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번에는 제국의 중신들과 대귀족들이 모이는 연회가 열 렸다. 이 연회에 초대 받은 사람은 명실공히 제국을 움직이는 사람들이라는 뜻이 되기 때문에 초 대장을 받은 사람들은 알게 모르게 자랑스러워했고,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노골적으로 실망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초대장을 받고서도 별로 기뻐하지 않는 사람도 있었다. 황금 테두리가 둘러쳐진 초대장을 접으며 테이드는 낮게 한숨을 쉬었다. 별로 황궁에는 가고 싶지 않았다. 이전에도 그랬지만 케이스워크는 별로 상대하고 싶지 않은 타입이었다. 더군다나 요즘은 예전보다 훨씬 더 속을 알 수 없게 변해 버려서 테이드는 되도록 그와 마주치고 싶지 않았지만, 황제의 이 름으로 보낸 초대를 거절할 수는 없었기 때문에 잠자코 입궁 할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분명 2년 전의 테이드였다면 가문이 다시 제 자리를 찾은 것을 기뻐하며, 이번 초대도 기쁘게 받 아들였을 지 모른다. 케이스워크에게 호감이 가지 않는다는 사실은 다르지 않겠지만. 그러나 지금은 황제의 초대에 기쁨을 느끼기는커녕 귀찮음을 느낄 뿐이었다. 라딘과 함께 지내던 동안 테이드의 마음을 점령하고 있던 격렬한 증오라는 감정이 지금에 와서는 어째서 그토록 꺼지지 않고 계속 타올랐는지 이해할 수 없을 정도가 되어 있었다. 자신의 마음임 에도 불구하고 자연스러운 변화에 테이드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라딘이 사라지는 것을 바라볼 수 밖에 없었던 과거의 그 날 이후로 테이드는 라딘을 떠올 릴 때마 다 안타까움이 가슴을 채운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지만 라딘이 그렇게 떠나버렸어도 사실 자신이 할 수 있는 말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도 잘 알았 다. 동생을 동생으로 대하지 않고 가문을 몰락하게 만든 원흉으로 취급하며 진심으로 증오했던 것 은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일그러져 버릴 마음이, 쉽게 무너져 버릴 것 같은 자신의 나약한 마음이 무서워서 그렇게 행동한 자신이 원인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후회해도 지나간 시간은 되돌아오지 않는다. 그리고 테이드가 라딘에게 했던 행동 도 사라지지 않는다. 테이드는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보였던 2년 전 동생의 얼굴을 떠올렸다. 바람이 부는 해변가에 선 라딘은 침착하지만 강한 눈으로 테이드를 응시하며 안녕을 고했다. 그때 라딘이 당신은 내 형이 아니라고 했던 말을 그 당시 테이드는 인연을 끊자는 말을 한 것이라 고 해석했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 보면 라딘은 단순히 있는 그대로 말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 도 들었다. 어떤 일을 계기로 해서 사람이 쉽게 바뀌는 것도 사실이지만, 아주 커다란 원인이 없는 이상 다른 사람이 놀랄 정도로 사람이 바뀌는 일은 드물었다. 그러나 라딘은 기억을 잃었다고는 해도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달라졌다. 기억을 잃었어도 사람의 본성은 지워지지 않는다. 아니면, 주변 환경에 가려져 드러나지 않고 있던 라딘의 원래 본성이 그랬을 지도 모르지만, 테이 드는 아쉬움과 더불어 어렴풋한 의구심을 품고 있었다. 그것은 라딘이 사라지고 나서 지난 시간을 회상하는 동안 점점 강해졌다. 그렇다고 해서 라딘이 완전히 다른 사람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저 약간의 의구심이 든 것 뿐이었다. "출발하시겠습니까?" 테이드는 그 말에 정신을 차리고 걸음을 옮겼다. 저택 정문으로 나서자 백작가의 문장이 새겨진 마차가 준비되어 있었고 고용인들이 문 앞에 늘어 서 허리를 숙이며 테이드를 배웅했다. 테이드가 마차에 오르고 나자 네 마리의 흑마가 끄는 마차가 덜컥거리는 소리를 내며 출발했다. 문관들이 쉴 새 없이 움직이며 서류를 처리하기에 바쁜 황제의 집무실 안에서 이제 황제가 된지 얼마 지나지 않았지만, 집무실에 머무는 것에는 충분히 익숙해진 케이스워크가 기분 나쁜 듯이 얼 굴을 찡그리며 책상을 손가락으로 톡톡치고 있었다. 분위기가 분위기인 만큼 문관들은 섣불리 그에게 말을 걸지 못하고 서명이 필요한 서류만을 챙겨 서 책상 위에 올려두고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만을 반복했다. 원하는 것들을 하나 둘씩 얻어가고 있고, 더욱 견고한 위치를 다져가고 있는 현실이 확실하게 눈 에 보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케이스워크는 불만스러움을 느끼고 있었다. 모든 것이 마음의 문제라는 사실은 그 역시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마음이라는 것은 그렇게 쉽게 주인의 생각을 따라주지 않는다. 어제도 첼시피온의 몸을 지나칠 만큼 가졌다. 아름다운 요정의 몸은 질리지 않을 정도로 마음에 들었지만 몸은 굴복했어도 첼시피온이 마음까지 굴복하지 않았다는 것은 케이스워크도 잘 알고 있 었다. 요정의 피가 섞였다는 것은 완전한 인간도 아니며 완전한 요정도 아니라는 사실을 뜻한다. 보통 사람이었다면 완전히 망가져 버렸을 상황에서도 첼시피온은 담담함을 유지했다. 어떤 때는 눈물을 흘리며 매달리는 모습을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지만, 첼시피온은 결코 그런 행동을 한 적 이 없었다. 지금은 천개로 둘러 싸인 침대 안에서 잠들어 있을 아름다운 왕자의 모습을 떠올리던 케이스워크 는 마음이 나아지기는커녕 더욱 화가 난다는 사실에 얼굴에 드러날 정도로 짜증을 내고 있었다. 이럴 때 스위드가 있어 주었다면 마음이 한결 나아졌을 텐데, 스위드는 이년 동안 어디에서도 모 습을 보이지 않았다. 19년 전, 처음으로 스위드를 만났을 때도 그는 젊은 청년의 모습이었고 2년 전에도 계속 같은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다. 세상에는 정말 많은 종류의 사람들이 있고 인간과는 다른 삶을 사는 존재도 있지만, 그런 특이한 인종이라는 사실을 떠나 스위드는 케이스워크에게 있어 부관이자 스승이자 친구이자 형제였다. 스위드가 언젠가는 자신의 곁을 떠날 것이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케이스워크는 그 이별이 이 렇게 빨리 다가올 것이라는 사실을, 그리고 그 이별로 인해 자신이 얼마나 많은 타격을 입을 것인 지는 예상하지 못했다. 몸 속에서 끊임없이 치밀어 오르는 파괴적인 욕구와 가학 충동이 케이스워크의 머리와 가슴을 복 잡하게 만들었다. "황제 폐하. 초대객들이 도착하고 있습니다. 따로 만나실 분이 계시면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 케이스워크의 표정을 살피며 조심스레 말을 건 나이든 관리의 얼굴을 흘긋하고 쳐다보며 그는 연 회 때까지 누구도 만나고 싶지 않다고 대답하려 했다. 그러나 막 입을 열었을 때, 생각이 바뀌었 다. "라메르 백작이 도착하면 응접실로 데려오도록." "네, 알겠습니다." ====================================================================== 잠을 좀 자고 일어났더니 이제 눈이 덜 피곤하군요 =ㅂ=;; 어제는 정말 토끼눈이어서 제대로 눈을 뜰 수가 없었어요; 가뜩이나 양쪽 눈 시력 차이가 너무 심해서 쉽게 피로해 지는데, 저는 항상 눈을 혹사시키고 있습니다. -ㅅ-; 오늘은 뭔가 쓸 의욕이 샘솟는데 의욕만큼 손이 안 따라주는군요;;; "뭐야? 간단한 의뢰잖아. 그런 걸 받아도 되는 거야?" 투덜거리는 듯한 목소리가 되돌아오자 스위드는 작게 피식하고 웃었다. "귀족을 상대로 하는 일에는 언제나 큰 대가가 돌아오기 마련이지." "시시해. 마법을 배운 사람의 로망이란 건 그런 게 아닌데, 뭔가 눈에 띄게 화려한 걸 보여줄 수 있는 게 아니면 시시하잖아." "도현." 스위드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이름을 불렀다. 그러자 도현은 왜 부르냐는 듯이 시선을 돌렸다. "집은 어때?" 늦은 감도 있었지만 스위드가 묻자 도현은 희미하게 미소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에 들어." 겉보기에는 그렇게 괜찮아 보이는 저택은 아니었지만, 내부만은 상당히 깔끔하게 정리가 되어 있 었다. 이곳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지나치게 깔끔하고 단조로운 감이 들 테지만 도현에게는 현대적인 느낌을 되살리게 만드는 실내구조였다. 스위드는 도현이 주문한대로 내부를 꾸민 것이다. "고마워." 도현은 스위드를 바라보며 환하게 웃어 보였다. 탑에서 함께 보내며 마법을 배운지 벌써 2년. 외부에는 나가지 못했지만 그 기간동안 도현은 많은 것을 익히고 적응했다. 처음에는 적응할 생각도 하지 못하고 돌아갈 방법을 찾기 위해 초조한 시간을 보냈었는데 이제는 바다 건너 외국에서 살고 있는 것 같은 감각일 정도였다. 도현은 사람의 적응력은 대단하다는 사 실을 새삼스럽게 느낄 수 있었다. 이제 1년이 지나면 이곳에서 스무 살 생일을 맞이하게 될 것이고 어쩌면 앞으로도 계속해서 이곳 에서 생일을 맞아야 할 지도 모른다. 어떤 곳에 있어도 시간은 변함없이 흘렀고, 도현 역시 그 속 에서 살아있었다. 아직 마음 깊은 곳에서는 돌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잊지 않고 있었고, 원래 살던 곳을 포기한 것도 아니지만, 이제는 알고 있었다. 어쩌면 두 번 다시 자신은 이곳을 떠나 원래 세상으로 돌아갈 수 없을 것이라는 사실을. 현실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마법이라는 것을 배우고 이제는 어느 정도 익숙하게 사용할 수 있을 정 도가 되었지만, 조금씩 새로운 세상에 적응하고 이곳을 두 번째 고향으로 생각하겠다고 결심했지 만 그래도 100% 사실을 전부 받아들이기는 불가능했다. 그래서 도현은 스스로에게 약간의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 현실을 완벽하게 제대로 보려고 하지 않 고 시선을 돌리고 있었다. 일부러 스위드에게 어리광을 피우고 고집을 부리며 마음을 숨기고 있었다. 그런 사실은 스위드도 알고 있었지만 스위드는 도현의 어리광을 받아 주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도현의 마음이 망 가져 버릴 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요즘 황궁 소식은 어때?"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묻는 도현에게 스위드는 케이스워크가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는 사실을 말해 주었다. "나만 아니었으면 스위드도 지금은 황제의 부관이 되었을 텐데..." "지위 같은 건 나에게는 아무런 의미도 없어." "처음엔 전혀 그렇게 안 보였어. 그냥 조용한 부관인 줄 알았다니까." 도현은 처음 만났던 때의 스위드를 떠올렸다. 그때만 해도 도현은 스위드와 이런 사이가 되리라는 생각은 꿈에서도 하지 못했다. 사람의 운명이 라는 것은 정말 알 수 없는 것이라는 사실을 도현은 이제 와서야 확실하게 느꼈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이곳에서 이렇게 마법을 쓰며 살아가게 되었다는 사실 자체가 가장 큰 운명의 아이러니겠지만. "혹시 스위드가 없어져서 황태자...아니 황제님은 화를 내고 있지 않을까?" "황족은 강해. 지금까지 대륙의 역사를 만들어 온 것은 스스로 고귀한 피를 이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었지. 물론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많았지만, 대부분 권력을 쥐는 것은 권력 주변에서 태 어나고 살아가는 사람들이야." "그거야 어디서나 똑같은 거겠지. 정말로 세상을 움직이는 무수한 사람들은 그냥 공기 같은 존 재니까." 도현을 바라 보며 스위드 역시 과거를 잠시 회상했다. 휘트린에게 벗어날 수 있게 해준 케이스워크의 곁을 그가 죽음에 이르는 순간까지 지키겠다고 다 짐했던 자신이었다. 케이스워크에게 그런 맹세를 하지는 않았지만 그 역시 스위드가 항상 곁에 있 을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랬기 때문에 2년 전, 스위드가 자리를 비우겠다고 말했을 때도 이 유도 묻지 않고 스위드를 보내 주었던 것이다. 타인에게는 지독한 상대일 지 몰라도 스위드에게 있어 케이스워크는 결코 기피하거나 꺼려야 할 상대는 아니었다. 그러나 지금 스위드는 케이스워크의 곁이 아닌 도현의 곁에 있었다. 케이스워크는 혼자서도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인물이지만 도현은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자신이 곁 에서 지켜 주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선택한 일이었다. 이후에 케이스워크와 만나 추궁을 당한다고 해도 스위드는 지금의 결심을 바꿀 마음은 없었다. 한 번 마음으로 정한 것은 바꾸지 않는 것이 스위드의 방식이었다. 스위드의 눈에 비친 도현의 모습은 처음 만났을 때와는 많이 달라졌다. 귀를 살짝 덮는 길이였던 머리카락도 이제는 어깨를 넘어서 묶을 수 있을 정도가 되었고, 표정에도 어느 정도 여유가 생겨 났다. 어떻게 보면 외관만은 형제로 보일 만큼 둘의 분위기는 비슷해졌다. 그것은 도현과 스위드 가 신의 보석을 가졌기 때문이었지만, 그것을 모르는 사람들은 나이 차이가 약간 나는 형제라고 생각할 것이다. 생각에 잠긴 스위드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다시 저택 내부를 훑어보던 도현은 몇 걸음을 옮겨 스위 드의 곁으로 다가간 후 그의 어깨를 가볍게 쳤다. "생각은 그만하고 식사나 하러 가자." 그렇게 말한 도현은 바로 이동 마법을 읊조리기 시작했다. 작고 빠르게 중얼거린 목소리의 영향으로 바닥에는 흰색 마법진이 펼쳐졌다. 복잡하고 정교한 마 법의 문양과 문자들이 원안에 새겨지며 도현과 스위드의 몸을 감쌌다. 환한 빛이 몸을 감싸고 사라지자 주변의 풍경은 바뀌어 있었다. 숲과 연결된 마을 외곽에 도착한 도현은 옷차림을 점검했다. 마법사라는 분위기를 팍팍 풍기는 로브는 저택에 놔두고 왔기 때문에 도현은 바지와 셔츠, 그리고 가벼운 겉옷을 걸친 차림이었다. 스위드도 그리 다르지 않아서 둘을 이상하게 볼 사람은 없을 것 이었다. 도현은 조용한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스위드의 한 손을 잡아끌고서 마을 입구 쪽으로 걸어갔 다. 양쪽에 서 있던 경비병에게 가서 이 마을에서 가장 유명한 음식점이 어디냐고 묻자, 둘을 여 행을 위해 돌아다니는 귀족이나 부유한 집안 자제라고 생각한 경비병은 흔쾌히 마을 동쪽에 있는 음식점을 소개해 주었다. 이제는 몇 걸음 정도 앞서가는 도현을 바라보며 스위드는 입가에 미소를 떠올렸다. 이런 기분을 느끼는 것이 대체 얼마 만인지 스위드는 기억할 수 없었다. 태어나던 순간부터 스위드는 마녀의 아들이었고, 어린아이다운 유년시절을 보낸 기억도 없었다. 몸 속에 흐르는 마녀의 피는 오랜 시간의 기억을 담고 있었고, 그 피는 스위드에게도 영향을 미쳤 다. 그런 스위드에게 도현이라는 존재는 다가갈 수 없는 빛과도 같았지만 그와 동시에 가장 마음을 끄 는 친숙한 존재이기도 했다. 함께 있을 때 가장 마음이 편해지는 상대라고 생각했던 케이스워크 보다도 도현은 스위드의 마음을 온화하게 만들어주었다. 빛의 보석을 가지지 않았어도 아마 도현이라는 소년은 특유의 빛을 냈을 거라고 스위드는 생각했 다. 도현에게는 말하지 않았지만, 스위드는 현재 리카도 제국에서 어떤 일이 생겼는지 알고 있었다. 또한, 휘트린이 누구의 마법을 봉인했는지도. 리카도 제국이 아닌, 센 왕국에 거점을 잡은 것도 도현의 마음을 편하게 해준다는 의도도 있었지 만 사실은 스위드 역시 케이스워크와 지금은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 어떤 이유가 되었던 간에 약속을 어긴 것은 스위드였기 때문이다. "빨리 좀 와." 벌써 한참 앞서가던 도현이 멈춰선 채 스위드를 부르고 있었다. 스위드는 걸음을 빨리 해 도현에게로 다가가 가느다랗지만 단단한 어깨에 손을 올렸다. 맑은 검은색 눈동자가 스위드를 올려 보았다. 욕실에서 샤워를 마치고 가운 하나를 두른 차림으로 막 욕실을 나가려던 카드리는 얼핏 하고 돌아 본 거울 안에 나타난 얼굴 하나를 보고 깜짝 놀람과 동시에 반가움을 느꼈다. "오랜만이야, 카드리." 검은 머리카락을 자연스럽게 늘어트리고 있는 도현이 거울 안쪽에서 미소지으며 인사했다. 마치 어제 만났던 사람처럼 아무렇지 않게 인사하는 모습이 얄미워서 카드리는 휙 하고 고개를 돌렸다. "잘도 이제서야 뻔뻔하게 연락을 하시는군?" 불만스러움이 여실히 드러난 목소리로 말하자 도현은 피식거리며 웃었다. "그 동안 나도 살 곳을 구하고 이것저것 바빴어. 지금은 밖이거든." "정말?" 그 말을 듣자 카드리는 바로 거울에 달라붙을 듯이 가까이 다가서며 물었다. "그래서 어딘데?" "제국은 아니야." 도현이 뜸을 들이며 말하지 않자 카드리는 표정을 구겼다. "잠깐 기다리고 있어봐, 리올도 불러올테니까."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욕실에서 달려나간 카드리는 의자에 앉아 책을 읽고 있던 리올을 끌고서 욕 실로 돌아왔다. "안녕, 리올." 아무 설명도 없이 다짜고짜 욕실로 끌고 들어온 카드리에게 막 한마디를 하려던 리올은 거울에 비 친 도현의 모습을 보고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지도 잊은 채 친구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지금 제국은 아니지만 다른 나라에 있나봐. 어딘지 좀 물어봐." 카드리는 도현에게 들으라는 듯이 일부러 도현쪽은 쳐다보지 않고 리올에게 말했다. 그러자 도현 은 웃음 띈 얼굴로 대답했다. "센 왕국이야." "센 왕국? 왜 거기에 있어?" "제국으로 가기는 좀 곤란하잖아." "사람을 피하는 게 목적이라면 센 왕국보다는 차라리 대륙 끝에 있는 샤르코 왕국으로 가지 그 랬어." 도현은 여유 있는 표정으로 의자에 앉아 팔짱을 끼었다. "너무 멀리 가기는 싫거든. 너희와도 가끔은 만나야 하는데, 너무 멀면 곤란하지." "당장 만나자." 도현의 말이 끝나자 마자 카드리는 당장 만나자고 말했다. 그 성급한 말에 도현은 어깨를 들썩이 며 웃었다. 너무나 카드리 다웠기 때문이다. "만나는 것이야 문제가 안 되지만, 그 차림으로 오려고?" 그제서야 카드리도 아직 자신이 목욕가운 차림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듯 했지만 바로 소리질렀다. "이게 뭐가 어때서!" "당장 움직일 수는 없어. 이런 식으로 대화가 가능하니까 만나는 건 좀 나중으로 미루자." 리올이 차분하게 말했다. 카드리는 불만스러운 표정이었지만 리올이 왜 그렇게 말했는지 알고 있 었기 때문에 뭐라고 말하지는 않았다. "그건 그렇고, 알고 있어? 황궁에서 재미있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걸." "응?" 도현이 흥미를 드러내자 리올은 작게 웃으며 말했다. "그 동안 첼시피온 왕자에 대한 이야기는 네가 싫어하니까 피했지만 말이야. 지금 첼시피온 왕 자가 어떻게 되었는지 알면 너도 분명 놀랄걸." 첼시피온이라는 이름에 살짝 표정을 찌푸렸던 도현이었지만 리올의 말은 확실히 흥미를 당겼다. "첼시피온 왕자 말이야. 지금 황궁에 잡혀 있어. 자세한 사정은 모르지만 1년 동안 황궁에서 나오지 않고 있으니 잡혀 있다는 말이 맞겠지만." 그 말을 듣자 도현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첼시피온이 어떤 인물인데 케이스워크에게 붙들려 있다는 말인지 이해 할 수 없었다. "네가 없던 동안 여러 가지가 달라졌으니까." "맞아, 너는 그 동안 편하게 잘 지냈겠지만 우리는 엄청나게 바빴다고. 다음에 만나면 반드시 네 실력을 시험해 보겠어." 카드리는 욕실 벽에 비스듬히 기댄 자세로 서서 이죽거렸다. 그 표정이 너무 웃겨서 도현은 잠시 다른 것을 잊고 웃었다. ==================================================== 오늘은 푹 자서 기분이 상쾌 합니다. ^-^ 오늘부터는 열혈 자택 알바 and 글쓰기 모드에 돌입합니다. 오늘은 도현이도 나오고 스위드도 나오고 쌍둥이도 나왔습니다. 하핫. 열심히 부지런히 쓸 수 있도록 응원해 주세요. 자, 그럼 오늘도 모두 즐거운 하루 보내시길 바랍니다. 쌍둥이들과 연락을 마치고 나서 거울에 비친 영상이 사라지자 도현은 턱을 괸 채 생각에 잠겼다. 사실 탑에서 지내던 시간 동안 이전의 일들은 잊어버리고 있었다. 가끔 테이드에 대한 일을 생각하기도 했지만, 그것도 요즘은 거의 하지 않았고 첼시피온에 대한 일은 거의 의식적으로 잊으려고 애썼다. 첼시피온은 도현에게 있어 너무 쉽게 사람을 믿었기 때문에 얻은 교훈과도 같은 존재였다. 아름다 운 얼굴로 믿는다고 이야기하고서 결국에는 그 말을 보란 듯이 배반해 버렸다. 원래 세상에 있을 때 역시 친구라는 이름에 큰 비중을 두지 않았지만, 이곳에서는 달랐다. 모든 것이 낯설었고, 아는 사람도 없었다. 홀로 폭풍 속에 내던져진 것처럼 주위에 기댈 곳 하나 없는 상황에서 아무런 이유도 없이 믿을 수 있는 얼굴로, 말투로 순수하게 믿어주겠다고 말하는 사람에 게 마음을 열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거짓이었던 것이다. 첼시피온에게 느낀 배신감은 그래서 더욱 컸다. 도현에게 쓰라린 배신감을 안겨준 후에도 첼시피온은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전혀 모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것이 도현을 더욱 화나게 만들었다. 그런 감정을 가지고 헤어지고 난 후 첼시피온의 소식은 들은 적이 없었다. 나름대로 잘 지내고 있 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들려온 소식은 도현의 예상과는 전혀 달랐다. 그 첼시피온이 케이스워크에게 잡혀 있다라. 자세한 사정은 쌍둥이들도 모른다고 했으니 그냥 대략적인 상황만을 전한 것이겠지만 그래도 정말 이지 의외였다. 덕분에 도현은 첼시피온에 대한 감정도 잊고 그를 떠올릴 수 있었다. 사실 케이스워크에 대한 것은 기분 나쁜 상대라는 것 밖에는 알지 못한다. 아마도 스위드라면 그 가 어떤 성격인지 잘 알겠지만 도현은 관심도 없었고, 도현을 이 세계에 붙잡아둔 원흉이라는 생 각만이 남아 있었기 때문에 첼시피온과 케이스워크의 조합이 의외이기는 했지만 전혀 이상하다거 나 하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의 생각은 전혀 달랐다. "첼시피온 왕자가 제국에 억류되어 있다는 것은 최악의 순간에는 전쟁을 일으킬 만한 커다란 원인이 될 수도 있지. 그는 다름 아닌 페르마 대공왕의 아들이고 왕위를 물려받을 유력한 왕자니 까. 그 이유가 아니더라도 사이드 공국에서 첼시피온 왕자가 가지고 있는 입지는 상당히 커. 그는 사이드 공국이 배출한 최고의 마법사이기도 하거든." 스위드의 설명을 듣고 도현은 첼시피온이 그 정도로 중요한 위치라는 사실을 이제서야 겨우 알았 다. 물론 왕자라는 지위를 가진 사람이 보통일 거라는 생각을 한 것은 아니지만 첼시피온은 그가 가진 지위보다는 화려한 외모가 먼저 눈에 들어오기 때문에 다른 것을 생각할 여력이 없었던 것이 다. "스위드는 뭐 아는 거 없어?" 도현이 묻자 스위드는 살짝 웃으며 대답했다. "휘트린이 첼시피온의 마법을 봉인 시켰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지." "뭐?!" 도현은 그 말을 듣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언제? 왜 나한테는 말 안 했어?" "묻지 않았잖아." "말장난 할 기분은 아니야." 도현이 표정을 굳히자 스위드는 자리에서 일어나 도현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건 휘트린과 제국간에 벌어진 거래였어. 마녀로서 그녀가 해왔던 일을 한 것이고 그 일에 관해서는 나도 참견할 권리 같은 건 가지고 있지 않아. 그리고 첼시피온 왕자에 대한 것은 일부러 말하지 않았어. 그때의 넌 다른 것에 신경을 돌릴 수 있을 만큼 여유롭지 못했잖아." 스위드의 차분한 목소리를 듣자 도현의 표정이 조금 누그러졌다. 스위드가 말하던 때라면 분명 1 년 전. 어느 정도 마법을 익히고 나서 그 마법으로 원래 세상으로 돌아갈 방법을 찾을 수 있지 않 을까 하는 생각에 여러 가지로 조사하고 실험을 하던 때였다. 갖은 방법을 동원해 봤지만 결국 얻은 것은 깊은 절망감뿐이었다. "아니면 아직도 첼시피온 왕자에게 미련이 남았어?" 도현은 고개를 저었다. "스위드야 말로 아무렇지 않은 거야?" 스위드가 눈으로 뭐가? 라고 묻자 도현은 작게 케이스워크 라고 말했다. "이미 그와의 관계는 끝났어. 지금 내 곁에 있는 건 너야." 스위드는 불안하게 흔들리는 검은 눈동자를 바라보다가 눈꺼풀에 입술을 가져갔다.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예전처럼 강한 모습을 그대로 드러내지만 스위드의 앞에서만은 달랐다. 도 현은 계속 방황하고 있었다. 낯선 세상에 떨어진 소년은 시간이 지나도 아직 마음을 붙이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도현 을 붙잡아 줄 수 있는 유일한 존재는 지금은 스위드였다. 부드럽게 몸을 감싸안자 도현은 저항 없이 안겨왔다. 테이드는 황제와 대면한 자리에서 얼굴에 표정을 그대로 드러내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 하고 있었 다. 그 만큼 방금 들은 말이 테이드에게 미친 여파는 상당한 것이었다. 테이드는 황궁에 도착하자마자 황제의 부름을 받고 귀빈 전용 응접실로 안내 받았다. 그 후 케이 스워크와 인사를 나누고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눈 것까지는 좋았지만, 케이스워크가 꺼낸 제안은 정말 의외의 내용이었다. "그런 중책을 맡기에는 제 나이가 너무 젊습니다. 아마도 다른 중신들이 반기지 않을 것입니다 ." 테이드는 케이스워크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노력하며 겨우 그렇게 말을 꺼냈다. 그러나 케 이스워크는 빙긋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황제인 나도 젊으니 만큼 나와 이야기가 잘 통하고 생각이 잘 맞는 젊은 인재를 쓰겠다는 것 이 내 방침이지. 물론 선대부터 충성해 왔던 중신들을 내보낼 생각은 없으니 그 점은 걱정하지 않 아도 좋아." 케이스워크가 자신의 말을 전혀 들을 생각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테이드는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서른의 나이에 제국 재상의 지위에 오르라는 말을 듣고 놀라지 않을 사람이 과연 존재할까 라는 생각을 하며 테이드는 계속해서 이어지는 케이스워크의 말을 듣고 있었다. 과연 그가 무슨 의도로 그런 자리를 주는 지는 모르지만 거부할 수도 없는 이상 맡을 수 밖에 없 다는 것 역시 사실이었다. "내가 그대에게 재상이 되라고 권하는 것은 그대의 능력이 뛰어나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어왔기 때문이기도 하고, 또 그대의 가문이 겪었던 일에 대한 사죄이기도 하니 성심껏 맡아주길 바란다." 케이스워크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올 줄은 몰랐기 때문에 테이드는 놀랐지만 고개를 숙이며 감사 의 말을 전했다. 예전부터도 그랬지만 지금은 더욱 더 케이스워크는 읽을 수 없는 인물이 되어 있었다. 테이드가 동생인 라딘을 잃어버리고 달라졌듯이, 케이스워크 역시 늘 뒤에 그림자처럼 함께 달고 다니던 부 관 스위드를 잃고 난 후 더욱 더 애매하게 변해버렸다. 테이드는 문득 2년 전 라딘과 함께 있던 스위드를 떠올렸다. 과연 케이스워크는 스위드가 어디에 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을까. 테이드는 자기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2년 전... 스위드를 본 적이 있습니다." 그 한마디에 케이스워크의 표정이 돌변했다. 케이스워크는 붉은 빛이 강한 보라색 눈동자로 테이드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 만 테이드는 케이스워크가 무언으로 대답을 묻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2년 전 언제인지, 황궁에서 만난 것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닌지 같은 어리석은 질문은 하지 않았다 . "라딘과 함께 있는 것을 봤습니다." 테이드는 무언가에 홀리기라도 한 것처럼 지난 2년간 마음 속에만 담아 두었던 사실을 이야기했다 . 누구에게도 라딘을 봤다는 이야기는 한 적이 없었다. 그리고 케이스워크에게도 그 이야기를 할 생각은 없었다. 불과 몇 분전까지만 해도 자신이 케이스워크에게 이 말을 하게 되리라는 사실은 조금도 예상하지 못했다. "그래...그렇군..." 케이스워크는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스위드라는 이름을 정말 오랜만에 들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언제나 항상 고개를 돌리면 그 자리 에 변함없이 서 있던 회색 눈동자를 가진 청년은 이제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군..." 케이스워크는 다시 한 번 중얼거렸다. 이미 스위드가 자신을 떠났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있기는 했지만, 이제는 확실해졌다. 스위드는 다른 주인을 선택한 것이다. 그 주인이 무척 의외의 인물이기는 했지만 누가 새 주인인가는 중요 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스위드가 케이스워크에게서 떠났다는 것. 그 사실이었다. "그럼, 이제 연회장에서 다시 만나도록 하지." 테이드는 망설임 없이 바로 인사를 하고 응접실에서 나갔다. 테이드는 케이스워크의 표정을 읽지 못할 정도로 어리석지 않았다. "그래, 그렇단 말이지......" 케이스워크는 몇 번이나 같은 말을 중얼거리고 있다는 것도 깨닫지 못한 채 어딘가를 응시했다. ".....그....만..." 연회장에서 테이드가 재국 재상으로 임명되었음을 발표하고, 갑작스러운 발표에 놀라는 귀족들의 표정을 바라보며 웃음 짓던 기억도 났다. 평소 보다 훨씬 오래 연회장에 머물다가 달의 궁으로 발걸음을 옮기고 문을 열고 나서야 케이스워 크는 정신이 명확하게 깨어나는 것을 깨달았다. 마치 이곳에 오기 전까지만 해도 뿌연 안개에 감싸여 있던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케이스워크는 밑에서 발버둥치는 육체의 존재를 깨닫고 그제서야 명확한 시선으로 상대방을 응시 했다. 평소보다 훨씬 격렬한 몸짓에 견디지 못하고 첼시피온이 그의 몸을 밀쳐 내려 노력하고 있었다. "나는.... 당신의 화풀이 상대가 아니야." 의외로 흔들림 없는 목소리였다. 그 동안 제대로 무슨 말을 한 적이 없었던 첼시피온이 그런 말을 하자 케이스워크는 갑자기 술에 취했다가 깨어난 듯한 기분을 맛보았다. "무슨....소리지...?" 케이스워크가 처음 보는 낯선 생물을 바라보는 듯한 시선으로 바라보며 묻자 첼시피온은 단호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내게 다른 사람을 겹쳐 보지 말라는 이야기야. 당신의 마음에 새겨진 그림자가 뚜렷하게 보여 ." "큭." 케이스워크는 입가를 일그러트리며 첼시피온의 목을 손으로 잡아 눌렀다. 숨이 막힌 첼시피온이 손을 떼어내기 위해 노력했지만 케이스워크는 손에서 힘을 풀지 않았다. 그리고 첼시피온이 정신을 잃은 채 축 늘어지고 나서야 그는 겨우 손을 뗐다. 흰 목에는 선명하게 붉은 손자국이 새겨져 있었다. ==================================================== 오늘은 글이 안 써져서 참.....오래 걸렸습니다. 이제부터는 아르바이트를 해야지 ;ㅁ; 모두 환절기 감기 조심하시와요 ^-^ 손끝에서 희미하게 감각이 되돌아 온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요 며칠 케이스워크는 다른 어느 때보다 감정을 드러냈고, 그 감정을 모두 첼시피온에게 쏟아 부 었다. 인간과는 조금 다르다고 해도 오랫동안 마법의 힘도, 보석의 힘도 사용하지 못한 채 갇혀 있던 첼시피온은 그것을 견뎌낼 수 없었다. 손을 움직이자 미미하게 손끝이 움찔거렸다. 이번에는 천천히 눈을 떴다. 무거운 눈꺼풀을 간신히 들어올리자 천개 사이로 엷은 빛이 새어 들 어오는 것이 느껴졌다. 온 몸이 무겁고 목이 바싹 말라 있었다. 시원한 바람이 필요하다고 문득 생각했을 무렵. 희미한 바람이 얼굴을 간지럽혔다. 첼시피온은 한 동안 그 바람에 몸을 맡긴 채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그러던 어느 순간, 첼시피온은 무거운 몸의 무게도 잊은 것처럼 벌떡하고 상체를 일으켰다. 떨리는 손으로 이마에 손을 가져가자 희미한 온기가 느껴졌다. 그것은 체온으로 인한 것이 아니라 몸에 걸려있던 봉인이 풀려가고 있다는 사실을 의미하는 열이었다. 뜻밖의 일에 첼시피온은 어떤 얼굴을 해야 좋을 지 알 수 없어져 잠시 굳어진 자세로 움직이지 않 았다. 마법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모든 힘을 봉인하는 절차는 상당히 고통스러운 것이었다. 육체적으로는 탈진한 듯한 무력감밖에 느끼지 못했지만, 봉인이 진행되는 동안 첼시피온은 머리 속을 휘저어 억 지로 가둬버리는 듯한 감각을 몇 시간이나 맛봐야 했다. 압도적인 어둠이 전신을 감싸 버리고 정신을 심연 속에 가두어 버렸다. 아름답지만 인간도 아니고 그렇다고 요정도 아닌 완전히 다른 존재였던 여인은 순수한 어둠에 가까운 존재였다. 그녀는 너무 나도 간단하게 첼시피온을 제압하고 무표정한 얼굴로 힘을 봉인하기 시작했다. 그녀를 보면서 첼시피온은 난생 처음으로 공포라는 감각을 맛보았다. 절대적인 힘을 가져다주는 신의 보석의 힘도, 요정의 피도 그녀의 앞에서는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 태어나서 단 한번도 다른 사람 때문에 당황한 적도 없고, 공포를 느껴본 적도 없는 첼시피온이었 지만 그 때 만큼은 절대적인 공포 때문에 완전한 구속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대륙을 움직이는 것은 다섯 명의 유력자이고 그 유력자 안에는 첼시피온의 부친인 페르마 대공왕 도 포함되어 있지만, 그녀는 다른 의미로 세상을 지배하는 자였던 것이다. 첼시피온이 케이스워크에게 굴복한 것은 그녀의 압도적인 힘을 경험했기 때문이라는 이유가 지배 적이었다. 그녀를 부른 것은 다름 아닌 케이스워크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제 봉인은 풀려가고 있었다. 힘만 되돌아온다면 첼시피온은 이곳에 조용히 머물러 있을 이유가 없었다. 저절로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지만 첼시피온은 당분간은 봉인이 풀려간다는 사실을 누구도 알아차 리지 못하게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이곳에 묶여 있었던 만큼 그 동안 하지 못했던 것들에 대한 보 상을 받을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케이스워크. 타인의 위에 서는 것만을 알아왔던 첼시피온에게 굴복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깨닫게 해 준 케이스 워크에게 적당한 보상을 해 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첼시피온은 미소 띈 얼굴 그대로 몸을 움직여 침대에서 내려섰다. 침실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힘 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는 허리를 억지로 펴고 침대 기둥에 몸을 지탱한 채 천천히 걸음을 옮겨 옷 장으로 다가갔다. 간편해 보이는 가운 몇 개가 걸려있는 옷장 안에서 흰색 실내복을 꺼낸 후 몸에 걸쳤다. 부드러운 천의 감촉이 느껴졌다. 첼시피온은 계속해서 몸을 움직여 이번에는 욕실로 들어갔다. 비어있는 흰색 욕조에 걸터 앉아 간단한 마법을 썼다. 봉인은 거의 풀렸는지 욕조 안에 물을 채우는 정도의 간단한 마법은 수월하 게 할 수 있었다. 1년 동안 마법을 사용하지 못했기 때문인지 간단한 마법을 하나 성공시킨 것 뿐이었는데, 무척이 나 즐거워졌다. 첼시피온은 점점 차 올라가는 수면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부드럽게 물결치듯 흘러내린 금색 머리카락에 감싸인 흰 얼굴은 창백해 보였다. 입가에 떠오른 엷 은 미소는 얼굴을 온화해 보이게 만들었지만, 첼시피온은 수면에 비친 얼굴이 무척이나 생소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욕조 안에 물이 다 채워지자 첼시피온은 가운을 벗고 나서 욕조 안에 몸을 담궜 다. 차가운 감각이 선명하게 느껴졌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온도에 익숙해지자 오히려 편해졌다. 움직임 때문에 파문을 그리던 물이 잔 떨림만을 남긴 채 고요하게 가라앉았다. 첼시피온은 고요하게 가라앉은 수면처럼 맑아진 정신으로 앞으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지 생각 했다. 더 이상 케이스워크에게 농락 당할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섣불리 지금 상황을 들켜 또 다시 힘을 봉인 당하는 결과를 부를 생각도 없었다. 빠른 시일 내로 아버지에게 연락을 해야 한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숙부를 통해 연락을 취하기는 했지만 첼시피온이 직접 연락을 하지 않는 한 페르마 대공왕은 계속 제국의 동향을 살피기만 할 뿐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고 있을 것이다. 첼시피온은 자신의 존재로 인해 부친의 발목을 잡게 되는 일이 벌어지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욕조에 몸을 담근 채 약간의 마법을 사용해 지친 몸을 치료했다. 완벽하지는 않았지만 삼십분 정 도 지나자 굳어져 있던 몸이 나아졌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었다. 욕조에서 몸을 일으킨 후 바람을 불러 일으켜 젖은 몸과 머리카락을 말리고 침실로 돌아왔을 무렵 에는 몸 상태가 확실히 나아져 있었다. 조용한 방안에서 닫힌 창문 사이로 밖을 응시하던 첼시피온은 점차 해가 저물자 변함없이 자신을 찾을 케이스워크를 떠올리고 어떻게 하면 그를 피할 수 있을 지 고민했다. 힘을 되찾은 이상 그에 게 몸을 내 줄 필요는 없었다. 생각에 잠겨있던 첼시피온은 천천히 침대 쪽으로 걸음을 옮겨 마법의 힘으로 침대를 깨끗하게 정 돈했다. 흐트러져 있던 시트를 깔끔하게 정리하고 나서 첼시피온은 침대에 누웠다. ".... .... ..... ...." 요정의 언어로 마법의 언어를 빠르게 읊조렸다. 투명한 푸른색의 바람이 첼시피온의 몸 위쪽에 떠올라 뭉쳐지며 형태를 만들어 내기 시작했다. 입 체적인 형태로 드러나기 시작한 그것은 마법진의 형태로 변화해 짧은 순간에 완성되었다. "...." 첼시피온이 또 다시 한 마디를 외치자 허공에 떠 있던 마법진이 천천히 첼시피온의 가슴으로 내려 와 그 위에 내려앉았다. 첼시피온은 희미하게 웃으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 아마도 다음 번에 눈을 뜰 때에는 상황이 많이 달라져 있을 것이다. 문득 첼시피온은 케이스워크의 당혹스러운 표정을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 다. 테이드와 함께 업무를 처리하고 나서 달의 궁을 찾았을 때는 이미 늦은 밤이 되어 있었다. 케이스 워크는 겉옷을 벗어 의자 위에 걸쳐두고 나서 와인 한 잔을 따르고 나서 음미하듯 들이켰다. 시선 을 움직여 천개로 뒤덮인 침대를 바라보자 어느 때와 다름없이 침대 안에 잠들어 있을 첼시피온의 실루엣이 보였다. 가늘고 부드러운 몸은 얇은 시트에 가려져 있었지만 눈으로 확인하지 않아도 충분히 상상할 수 있 었다. 와인을 반정도 비우고 나서 케이스워크는 잔을 테이블 위에 내려 놓고 침대로 다가갔다. 천개를 걷어올리고 침대 위를 내려다보자 창백한 얼굴로 눈을 감고 있는 첼시피온이 보였다. 부드 러운 머리카락에 손가락을 걸고 몇 번 쓸어 내리다가 손가락을 뺨으로 옮겼다. 매끄러운 피부를 몇 번 만지다가 시트를 허리까지 내리고 드러난 가슴을 쓰다듬었다. 그렇게 한 동안 부드러움을 손끝으로 느끼고 있던 케이스워크는 문득 위화감을 느꼈다. 아무리 몸이 지쳐 있어도 케이스워크의 존재감을 느끼고 눈을 떴던 첼시피온이 계속 잠들어 있었 다. 케이스워크는 거칠게 어깨를 쥐고 첼시피온의 몸을 흔들었다. 그러나 인형처럼 흔들리는 몸과는 달리 첼시피온은 눈을 뜨지 않았다. 굳어진 표정으로 코끝에 손가락을 가져가자 아주 미약하게 바람이 느껴졌다. "시녀장!" 케이스워크는 빠른 걸음으로 침대에서 벗어나 침실 문을 열고 사람을 불렀다. 긴장된 얼굴의 시녀장이 다가와 고개를 숙이자 케이스워크는 어의와 마법사를 불러올 것을 명령했 다. 저대로 두 번 다시 눈을 뜨지 않게 편안히 내버려 둘 생각은 없었다. 케이스워크는 손끝에 힘이 들어가 손바닥에 자국이 나도록 세게 주먹을 쥐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 하지 못한 채 다시 침대로 다가가 머리맡에 걸터앉았다. "첼시피온." 케이스워크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아름다운 청년의 이름을 불렀다. 처음에는 그저 복잡하고 아름다운 문양이라고만 생각했지만, 이제는 그 원안에 새겨진 모양과 글 자들이 무엇을 상징하는 지 알게 되자, 마법진이 새겨지고 원 안에 떠오르는 것들이 점점 뚜렷한 형태를 띄기 시작하는 것을 흥미있게 관찰할 수 있었다. 도현은 익숙한 동작으로 마법진을 만들어 내는 스위드의 뒷모습에 잠시 시선을 던졌다가 완성된 마법진을 응시했다. 의뢰인 두 명의 이름이 검은색 마법진 안에서 은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이제 스위드가 만들어낸 마법진은 의뢰인들에게서 추격자가 완전히 따라붙지 않게 될 때까지 계속 바닥에 새겨져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 마법진이 소멸하는 순간 스위드가 맡은 의뢰도 완벽하게 이행된다. 의뢰금의 반은 이미 받았고, 나머지 반은 의뢰인들이 만족할 만한 결과를 얻었다고 판단되면 길드 를 통해 전달될 것이다. 도현은 완성된 마법진 안으로 들어가 3미터 정도의 폭을 가진 커다란 마법진 안쪽을 산책 하듯이 거닐었다. 스위드가 만들어내는 마법진의 색은 검은 색이었다. 보통 다른 마법사들이 만들어내는 마법진은 은색이 대부분이었고, 신의 보석을 가진 사람들은 그 보석의 속성에 맞는 색의 마법진을 만들어 낼 수 있다고 했다. 도현은 자신이 만들어내는 선명한 은색 마법진 보다 스위드가 불러내는 검은색 마법진이 훨씬 더 마음에 들었다. 어두운 곳에서는 거의 눈에 띄지 않지만 스위드에게 속한 검은색은 심연의 빛이라 고 부를 수 있을 만큼 어둠에 가까운 색이었다. "이제 그만 나가자." 스위드는 마법진의 바깥쪽에서 도현을 지켜보고 있다가 말을 걸었다. 저택의 지하실에 마련된 넓은 광장은 원래 창고의 용도로 쓰이던 것을 하나로 터서 만들어 놓은 공간이었다. 이곳에서라면 아무런 방해 없이 커다란 마법진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다른 의뢰를 수행하기 위한 준비를 해야지." 도현은 마법진 안쪽에서 돌아다니다가 스위드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알았다고 대답했다. 길드를 통해서 여러 가지 의뢰가 들어오고 있었다. 제국에는 많은 수의 마법사가 있지만 센 왕국 은 다른 나라에 비해 마법사의 숫자가 적었다. 귀족이나 왕족들을 상대로 일하는 마법사는 어느 정도 있었지만 길드에 등록된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마법사는 그리 많지 않았다. 덕분에 도현 과 스위드에게 꽤 많은 의뢰가 들어오고 있었다. 대부분의 의뢰는 스위드가 처리했지만 이번에는 도현과 함께 움직여야 할 일이 하나 들어와 있었 다. 그 의뢰는 귀족 한 명을 호위하는 것이었다. 귀족이라면 당연히 가문에 소속된 마법사 한 명쯤은 데리고 있을 테지만, 길드를 통해 의뢰를 한 것을 보면 이번 일이 그리 쉽지 만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예상할 수 있었다. "오랜만에 여행이라도 하는 기분이야." 지하실에서 저택 지상으로 연결되는 계단을 오르며 도현은 가벼운 어조로 말했다. 탑에서 빠져 나 와 센 왕국에 살만한 저택을 마련하고 옮겨오기까지 어느 정도 시간의 여유는 있었지만, 여행이라 고 말할 만큼 어딘가를 돌아다닌 적은 없었다. 마법은 상당히 편리했지만 덕분에 여행 기분을 느 끼지는 못했던 것이다. 지하실에서 빠져나오자 스위드는 단단한 오크목으로 만들어진 문을 굳게 닫은 후 마법을 걸었다. "의뢰인이 여기로 오기로 했으니, 미리 준비하고 있도록 해." "알았어." 도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2층에 있는 자신의 방으로 올라갔다. 여행에 필요한 편한 옷을 챙겨 입고 겉에 검은색 후드가 달린 망토를 둘렀다. 도현이 방안에서 이리저리 움직일 때마다 휘트린에게 선 물 받은 가느다란 선 형태의 귀걸이가 귓가에서 흔들렸다. ===================================================== 상반대는 두 팀의 이야기를 보내드렸습니다. =ㅂ=;;; 오늘은 아르바이트 마감이 다가온 관계로 심취해 있다가 글을 늦게 썼군요;;; 아르바이트도 글 쓰는 것이라 이중으로 힘이 듭니다. 빨리 넘기고 편해져야지; 손가락이여 힘을 내라 ;ㅁ; "저는 스위드, 이쪽은 딘입니다." "세피디나에요. 그냥 세피라고 불러주세요." 도현과 스위드가 호위해야 할 대상은 10대 후반 정도로 보이는 발랄한 소녀 였다. 세피는 남자 같은 복장을 하고 있었지만 누가 봐도 소년으로는 보이 지 않았다. 밝은 갈색 머리카락을 단순하게 하나로 묶어 늘어트리고, 비싼 장신구 같은 것도 하나도 달지 않았지만 그녀는 밝고 아름다워 보였다. 그 것은 젊음이 내뿜는 눈부신 생기였다. 이곳에 오고 난 후 이렇게나 밝은 사람은 본 적이 없었다. "호위병은 따로 두지 않았습니까?" "저는 마법사만 있으면 돼요. 마법 공격이 아닌 물리적인 것은 제가 막 아낼 수 있거든요." 자신감 있게 말하는 소녀의 몸은 아무리 봐도 가늘어 보여서 그 말이 실감 나지는 않았지만, 비 상식이 상식처럼 일어나는 세상에서 상식적인 것을 일 부러 찾아다닐 필요는 없다는 것 정도는 도현도 잘 알고 있었다. "어디까지 호위를 맡으면 되는 겁니까?" 비슷한 나이대인 탓인지 도현은 세피에게 쉽게 말을 걸었다. "저는 사이드 공국에 있는 친척집을 찾아가는 거에요. 아버지는 공간 이 동 마법으로 가라고 했지만, 그렇게 간단하게 움직이면 여행을 할 수가 없 잖아요. 그래서 길드에 의뢰해 호위를 고용하는 조건으로 육로로 이동할 수 있게 허락을 받은 거죠." 쾌활한 성격의 소녀는 도현이 봐 온 귀족가문의 여자들과는 완전히 달랐다. 곱게 자란 듯 고운 피부를 가지고 있었지만, 말투나 태도만 보면 도저히 고 위 귀족가문의 여식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말을 준비해 올 테니 잠시 이야기 상대를 해 드려." 스위드가 작게 말하고 나서 응접실을 빠져나가자 도현은 세피와 마주 본 자 세로 의자에 앉았다. "딘 이라고 했죠? 나이가 어떻게 돼요?" "열 아홉입니다." "나보다 한 살 많네요? 딘은 무슨 마법을 배웠어요? 어린 나이에 길드에 소속될 정도면 실력이 뛰어나다는 뜻이잖아요." 갑자기 눈을 빛내며 적극적으로 질문 공세를 펼치는 세피가 조금 부담스러 웠지만, 도현은 오랜만에 다른 사람과 이야기를 나눈다는 사실이 생소하면 서도 즐거웠다. 세피는 도현을 라딘으로 겹쳐 보지도 않을뿐더러 도현이 다른 세계에서 왔 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한다. 그 사실이 오히려 도현에게는 커다란 안도감을 주고 있었다. 스위드가 다시 되돌아 올 때까지 도현은 체피와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었 다. 완벽하게 사실을 밝힐 수는 없었지만 도현은 적당히 진실이 섞인 거짓 말로 그녀의 질문에 대답했다. 그녀 역시 자신의 정체를 밝히지 않고 있었 으니 서로 어느 한쪽이 손해를 보는 상황은 아니었다. 스위드가 준비해 온 말 세 마리에 각자 올라타고 나서 셋은 사이드 공국을 향해 출발했다. 센 왕국에서 사이드 공국까지는 육로로 가면 한 달 정도 걸 리는 거리였다. 도현은 의뢰라는 형태로 찾아온 한 달 동안의 여유를 충분히 즐기기로 했 다. 이제는 무언가에 쫓길 필요도 없고, 가고 싶지 않은 곳에 갈 필요도 없 고, 억지로 누군가에게 끌려갈 일도 없었다. 정말로 말 그래도 여행을 하게 된 것이다. 이틀이 지나도록 정신을 잃은 첼시피온은 깨어나지 않았다. 어의도 원인을 알지 못했고, 마법사 역시 여러 번 원인을 찾기 위해 노력했지만 무슨 문제 로 첼시피온이 깨어나지 못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케이스워크는 미약하게 숨을 내쉬는 첼시피온의 얼굴을 내려다보다가 방을 빠져 나왔다.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첼시피온의 몸에는 아무런 이상도 없었다. 일년 동안 갇혀 지냈어도 첼시피온은 보통 사람들처럼 심하게 병을 앓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요정의 피 덕분인지 체력이 떨어져서 움직이지 못할 때는 있 어도 지금처럼 정신을 차리지 못할 정도로 심한 상태가 된 적은 없었던 것 이다. 케이스워크는 집무실로 향하는 동안 끊임없이 생각을 거듭했지만 첼시피온 이 깨어나지 못하는 원인은 알아낼 수 없었다. 혹시 알지 못하는 지병이 있 었을 수도 있고, 요정의 피가 섞여 있기 때문에 이런 일이 생긴 것일 지도 모른다. "황제 폐하." 케이스워크가 집무실로 되돌아갔을 때, 그곳에서는 테이드가 황제의 서명을 받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다. 서류에 서명을 받는 것 정도는 부관을 시키면 될 테지만 테이드는 그렇게 하지 않고 언제나 직접 움직였다. 나이도 어린 테이드가 재상이라는 중책을 맡은 것에 대해 여러 가지로 말이 많았지만 테이드는 큰 실수 없이 나름대 로 잘 해나가고 있었다. "무슨 일이지?" 케이스워크는 테이드가 가져온 서류를 뻔히 바라보면서 물었다. 집무실에 되돌아 왔지만 머리 속은 아직 첼시피온에 대한 일로 가득했다. "상반기 군사비용에 관한 서류입니다." 테이드가 설명하자 그제서야 케이스워크는 서류에 시선을 주었다. "무슨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조심스럽게 표정을 관찰하던 테이드가 묻자 그는 낯선 사람을 보는 듯한 시 선으로 테이드를 올려다보았다. 그러다가 케이스워크의 입술 사이로 새어 나온 말은 테이드를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다. "전쟁에 관해 어떻게 생각하지?" "무슨 말씀이십니까? 전쟁에 관한 일반적인 견해를 물으시는 것이라면 필요악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국의 현 상황에 대해 물으시는 것이라면 전쟁 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충분한 준비는 되어 있으나 대륙은 꽤 오랫동안 전쟁 에 시달리지 않고 풍요로움을 유지해 왔고, 모두들 그것에 만족하고 있다고 대답하고 싶습니다." 그 대답을 듣고 잠시 생각에 잠긴 듯 시선을 바닥으로 향하고 있던 케이스 워크는 테이드의 녹색 눈동자를 응시하며 다시 입을 열었다. "며칠 후 사이드 공국으로 사신을 보낼 예정이니 준비해 주게. 그리고 첼시피온 왕자 역시 고국으로 되돌려 보내겠다." 테이드는 정중하게 대답했지만 표정이 미미하게 달라지는 것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케이스워크의 귀에 들어가지는 않았지만 황궁에서 며칠 동안 지낸 결과 테 이드의 귀에는 여러 가지 소문이 흘러 들어왔다. 그 소문들 중에는 특히 첼시피온 왕자에 대한 것들이 많았다. 테이드도 황 제 즉위식 연회에 나온 첼시피온을 본 적이 있었지만, 그 때의 첼시피온은 예전과 조금도 다르지 않아 보였다. 그러나 첼시피온이 아카데미에서 황궁으로 거처를 옮기고 1년 이상 억류되 어 있다는 사실은 누구나 알고 있는 것이었다. 케이스워크가 첼시피온 왕자 를 잡아둔 구실이 다름 아닌 라딘 라메르의 실종에 관련되었다는 사실 때문 이었으니까. 마법 길드와 용병 길드를 조사한 결과 케이스워크가 그곳에 라딘의 납치를 의뢰했다는 사실이 밝혀졌고, 그 사실 때문에 페르마 대공왕 역시 아무 말 도 못하고 아들을 제국에 맡길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런 기간이 벌써 1 년이다. 아무리 잘못을 했다고 해더라도 약소국의 왕자도 아니고 동등한 입 장에 있는 다른 나라의 왕자를 오랫동안 억류할 수는 없었다. "네, 준비하겠습니다." 테이드가 대답하자 케이스워크는 고개를 끄덕이며 서류에 서명을 해서 넘겨 주었다. "그대가 함께 가서 일을 마무리하는 것도 좋겠지." 왕자와 함께 가는 일행이라면 어느 정도의 지위를 가진 사람이 가는 것이 당연했으니 케이스워크의 말도 예상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테이 드는 지금의 케이스워크가 어딘가 이상하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었다. "오늘 저녁때 내 방으로 찾아오길 바란다. 라메르 백작." "네, 알겠습니다. 폐하." 테이드는 서명을 마친 서류를 받아들고 다시 재상의 집무실로 되돌아왔다. 확실히 2년 전부터 많은 것들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테이드 자신이 지금 이 렇게나 무력한 것도 케이스워크가 달라진 것도 모두 비슷한 시기에 변모한 것이었다. 집무실 책상에 앉아 서류를 살피며 테이드는 미약한 한숨을 내쉬었다. 라딘 이 존재하던 무렵의 테이드는 아무리 힘든 상황에서도 의욕을 잃은 적이 없 었다. 그러나 지금은 어떤가. 제국의 재상이라는 높은 지위를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기쁘다는 느낌을 받기 는커녕 맡은 일은 의무적으로 하고 있지만 살아간다는데 열의 자체를 느끼 고 있지 않았다. 지금까지 테이드의 삶을 지탱해 주었던 것은 가문은 일으켜 세워야 한다는 각오와 라딘에 대한 맹렬한 증오 덕분이었다. 테이드는 피식하고 웃었다. 자신이 얼마나 나약한 인간이었는지 이제서야 깨닫다니, 어린 동생을 증오 하지 않으면 제대로 움직이지 못할 정도로 나약했다니. 테이드의 뇌리에 박혀 있는 것은 바닷가에서 이별을 고하던 낯선 표정의 동 생. 작별을 고하던 동생에게 테이드는 돌아오라는 말 밖에는 아무 말도 하지 못 했다. 몇 번이나 사죄하고 또 사죄해도 부족하지만 결국은 진심을 보여주지 못했다. 라딘은 분명 어딘가에서 잘 지내고 있을 것이다. 예전의 라딘이 아니라 달 라진 라딘이라면 분명 어떤 곳에서도 자신을 잃지 않고 잘 지내고 있을 것 이 분명했다. 그러나 이제 테이드는 예전의 자신을 되찾을 수가 없었다. 사그라든 열의는 되돌아 올 기미를 보이지 않았고 영혼의 일부가 몸에서 떠나버린 것처럼 깊 고 깊은 무력감이 몸을 지배하고 있을 뿐. 저녁 식사를 하기 전까지 높게 쌓여 있던 서류의 산을 해치워 버리고 나서 테이드는 다른 중신들과 함께 저녁식사를 마쳤다. 다른 사람들의 시선이 그 리 곱지 않다는 사실은 잘 알고 있었지만 테이드는 그닥 신경쓰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이 어떤 시선을 던지건 무슨 말을 하건 테이드에게는 상관이 없 었다. 식사를 마치고 나서 케이스워크의 방으로 향했다. 케이스워크의 전언을 듣 기만 하면 이제 저택으로 되돌아가 쉴 수 있을 것이다. 테이드는 그 생각만 을 하며 황제의 방 앞에 섰고, 문 옆에 대기중이던 시종장이 테이드의 방문 을 알렸다. 허락이 떨어지고 나서 방안으로 들어가자 와인을 마시고 있는 케이스워크의 옆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왠지 커다란 무게에 짓눌린 것처럼 어두운 그림자 가 그 옆얼굴에 내려앉아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서 오게." 인기척을 느끼고 케이스워크가 고개를 돌렸다. "한 잔 하겠나?" "괜찮습니다." 반정도 남아 있던 와인을 한 번에 비우고 나서 케이스워크는 빈 잔을 테이 블 위에 내려 놓았다. "이쪽으로." 케이스워크를 따라 가자 그는 자신의 침실 문을 열고 그 안으로 들어가기를 권했다. 약간의 의문을 느끼며 테이드가 침실 안으로 들어섰을 때 침대 위 에 누군가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 차릴 수 있었다. 부드럽게 웨이브 진 아름다운 금발. 깨끗하고 흰 피부. 굳게 감겨 있는 눈은 속눈썹으로 인해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첼...시피온 왕자...?" ===================================================== 케이스워크의 다음 대사가..."자, 이대로 3P를 하자." 는 아니겠지요. =ㅂ=;;; 어제는 머리가 아파서 글을 못썼답니다. 이번 아르바이트는 포기하고 싶군요 ;ㅁ; 에...보기 편할까 어떨까 해서 글 정렬을 약간 바꿔 보았습니다. 그리고 오늘은 쓸데없는 대화문을 첨부해 봅니다. 검푸른 1부를 끝내고 나 서 상현이와 나눈 내화입니다. ;;; [디키]님의 말: 2부는 첫장면 부터 배드씬이라 참 =ㅅ= 꽃의 꿈 님의 말: 허허허 꽃의 꿈 님의 말: 그나 저나 나는 본의 아니게 극강 마이너구먼.ㅠ.ㅠ [디키]님의 말:하하하 꽃의 꿈 님의 말:라딘과 테이드.. 노스가 좋다네. 꽃의 꿈 님의 말:링링~ 꽃의 꿈 님의 말:쿨럭;; [디키]님의 말:상현이를 위해 자주 출연시켜 줘야지 꽃의 꿈 님의 말:하하하 꽃의 꿈 님의 말:당케다 꽃의 꿈 님의 말:그나저나 라딘 불쌍해 꽃의 꿈 님의 말:아니 그토록 미움 받을 이유.. .없다고 생각하는데.ㅠ.ㅠ [디키]님의 말:나도 놀란다니까 매번 ;; [디키]님의 말:나는 어제 2부 앞부분을 쓰면서 움하하 사람들이 이건 몰랐겠지...하면서 웃었지 -ㅅ- 꽃의 꿈 님의 말:뭔데? (희번뜩) [디키]님의 말:왕자님이 깔리는 장면 두둥 꽃의 꿈 님의 말:하하하. 굿이다. 큿큿큿 꽃의 꿈 님의 말:누구한테 깔리는데? [디키]님의 말:누구겠어 [디키]님의 말:한 명 있지 -ㅅ-;; [디키]님의 말:스위드에게 버림받아 맛이 간 황태자가;;; 꽃의 꿈 님의 말:허허;;; 꽃의 꿈 님의 말:버림까지야;; 꽃의 꿈 님의 말:(자기가 멀쩡히 보내놓고 말이지. 큿큿) [디키]님의 말:잠깐 엄마 보로 다녀 올께요...하고서 [디키]님의 말:2년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았다.... 꽃의 꿈 님의 말:하하하 꽃의 꿈 님의 말:결국 왕자님. 좀 늦네? 왜 안 오지? 대체 왜 안 오는 거 지? 어째서 오지 않는 거냐~~!! 이 상태? 꽃의 꿈 님의 말:하하 [디키]님의 말:응 [디키]님의 말:사실 알고보면 스위드는 보모였던 거야 꽃의 꿈 님의 말:그래서 누구한테 깔리는 건데? (반짝 반짝) [디키]님의 말:8살부터 황태자를 돌봐온. [디키]님의 말:아니 왕자 많이 나오잖아 [디키]님의 말:의외의 인물이 깔린다구 [디키]님의 말:그니까 황태자가 스위드가 도망가서 맛이간 나머지 첼시 왕자 를 깔아버리는 이야긴거야 꽃의 꿈 님의 말:아하 꽃의 꿈 님의 말:저, 저런;; 꽃의 꿈 님의 말:멋지군.ㅇ_ㅇ 꽃의 꿈 님의 말:사실 나는 작은 소망이 있어. [디키]님의 말:+ㅁ+? 꽃의 꿈 님의 말:테이드가 노스랑 되면 좋겠어.(극강 마이너.) 꽃의 꿈 님의 말:쿨럭;; 꽃의 꿈 님의 말:도현이야 독야 청청 독수 공방 어쩌든지 강하게 잘 이겨 낼 것 같으니 스위드랑 되든 어쩌든 사실 걱정이 안 되는데 꽃의 꿈 님의 말:우리 의외로 여리디 여리신 테이드님.. 쿨럭;; 꽃의 꿈 님의 말:뭔가 치유계의 따뜻하면서도 야물딱진 '수'가 나타나주지 않으면 안 될듯 꽃의 꿈 님의 말:큿큿 [디키]님의 말:후후훗 꽃의 꿈 님의 말:게다가 막판에 노스랑 분위기 좋았잖아 *_* 꽃의 꿈 님의 말:멋대로 스토리를 쓰고 있다 이 인간;;; [디키]님의 말:응, 노스도 좋은 청년이지 꽃의 꿈 님의 말:황태자 님은 그런데 사실 수가 어울리지 않아? (마이너는 더욱 더 박차를 가하고 있다..; [디키]님의 말:2부는 2년 후니까 꽃의 꿈 님의 말:내 생각에는 첼시님이 2년 후에 건장하게 자라셔서 황태 자님을 까는 것이 더 구미에 맞다는 .. 쿨럭;; [디키]님의 말:사실 겉보기엔 첼시 왕자도 황태자도 공이지만. [디키]님의 말:황태자가 깔리면 좀있으면 황제될텐데 꽃의 꿈 님의 말:하하하 [디키]님의 말:나라일을 어떻게 하라구;; 꽃의 꿈 님의 말:큭큭큭. 그게 맛이지.(대체 뭐가.ㅠ.ㅠ) [디키]님의 말:글고 황태자와 첼시는 8살 차이 두둥 꽃의 꿈 님의 말:큿큿큿 꽃의 꿈 님의 말:8살 차이 쯤이야 사랑으로 극복할 수 있어! 꽃의 꿈 님의 말:게다가 본디 공은 혈기 왕성한 영계일 수록 힘이 좋다는.. 쿨럭;; 꽃의 꿈 님의 말:(이제는 스스로가 두렵다,ㅠ.ㅠ) [디키]님의 말:그런데 아무래도 요정의 피가 섞여서 속세와는 인연이 없던 왕자님을;; [디키]님의 말:황태자가 깔아버리는 게 내 취향이야 푸하하하 꽃의 꿈 님의 말:역시... 극강 마이너는 무리였다...ㅠ.ㅠ 꽃의 꿈 님의 말:왜 나는 악역만 보면 깔고 싶은 걸까... 쿨럭;; [디키]님의 말:나중에 공수전환 해버리면 되지!! 꽃의 꿈 님의 말:하하하 꽃의 꿈 님의 말:멋지다, 친구. 그 자세다! [디키]님의 말:지금은 힘을 못써서 깔리고 있는 거지만 꽃의 꿈 님의 말:커허허허 [디키]님의 말:힘만 되돌아오면 첼시왕자님은 극강 꽃의 꿈 님의 말:끄덕 끄덕 꽃의 꿈 님의 말:나이스~ >_< 꽃의 꿈 님의 말:그나저나 월령은?(반짝) [디키]님의 말:쿨럭 -ㅅ- 꽃의 꿈 님의 말:후후후 꽃의 꿈 님의 말:난데없이 비수를 날리는 상현. 왜 첼시피온 왕자가 황제의 침실에 있는 것인가에 대해 의문을 떠올리기도 전에 테이드는 그의 상태가 이상하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얼핏 보면 잠을 자고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조금만 자세히 살펴보면 첼시피 온 왕자의 피부가 창백하다는 것과 숨소리가 너무 작다는 사실을 알 수 있 을 것이다. "폐하, 이런 상태로 사이드 공국으로 왕자님을 되돌려 보낸다는 것은..." "전쟁의 원인이 될 수도 있겠지." 테이드가 미처 말을 마치기도 전에 케이스워크의 대답이 돌아왔다. 케이스 워크는 상당히 냉정했다. "무엇이 원인인지는 모른다. 하지만 누구도 왕자를 깨어나게 하지 못했 다. 그렇다면 결론은 하나, 그를 고국으로 되돌려 보내는 것뿐이다." 이런 상태의 왕자를 데리고 사이드 공국을 방문한다는 것은 확실히 위험한 일이었다. 그러나 테이드는 자신이 이번 일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본능 적으로 깨닫고 있었다. 마치 케이스워크는 이런 일이 생길 것을 미리 알고 테이드에게 재상을 맡으 라고 말한 것 같았다. "생각 보다 쉽게 돌려 보내시는군요." 테이드가 말하자 케이스워크는 표정 없는 얼굴로 테이드를 응시했다. 그러다가 그의 입술 사이로 피식하는 웃음이 새어나왔다. "친동생에게 17년간이나 집착해온 주제에 말은 많군." 잠시 말문이 막혀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테이드에게 경멸 섞인 눈빛을 보 이며 케이스워크는 계속 말을 이어갔다. "아무도 모를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겠지? 그대가 동생에게 집착하고 있다는 사실쯤은 이미 예전부터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일부러 내 생일 파티 에 초대장을 보내기도 했었지." "지금....그 이야기를 할 때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걷잡을 수 없이 떨려오는 몸을 애써 진정시키며 테이드는 대답했다. 역시 방심하고 있었다. 그리고 어쩌면 케이스워크 역시 자신과 비슷한 감정 을 가지고 있을 지도 모른다고 말도 안 되는 동류 의식을 느끼고 있었던 것 이다. 케이스워크는 케이스워크였다. 이미 10살도 되지 않은 어린 아이였을 때부 터 누구보다도 영악한 머리로 자신에게 유리한 상황을 만들어 냈고, 어린 시절을 함께 보냈던 친구도 아무렇지 않게 이용할 수 있는 황가의 피를 진 하게 이은 존재. 라메르 가문이 몰락해서 제도에서 쫓겨가듯 떠날 때에도, 케이스워크는 순 진한 얼굴로 아무렇지 않게 미소짓고 있었다. 시간이 지나서 케이스워크가 달라진 것은 사실이지만 본성 만큼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단지 그 동안은 스위드라는 존재가 있었기 때문에 많은 부 분이 드러나지 않았을 뿐이었다. 테이드는 낮게 탄식했다. 결국 자신이 스스로를 얽어맨 것이었다. 스위드의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더 라면, 라딘과 함께 있던 것을 봤다고 말하지 않았더라면 결코 케이스워크가 이런 식으로 본성을 드러내는 일도 없었을 텐데. 무너져 버린 자신이 너무나 한심해서 테이드는 허탈하게 웃었다. "그대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가문의 이름이었지...?" 테이드가 시선을 마주치자 케이스워크는 엷게 웃으며 정신을 잃은 첼시피온 의 옆에 앉았다. 손을 뻗어 부드러워 보이는 머리카락을 매만지며 스쳐 지나가는 말처럼 덧 붙였다. "제대로 마무리를 지을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겠다. 그리고 하루 빨리 동생의 행방을 찾아내는 것이 좋을 거야." 테이드는 자신도 라딘의 행방을 알아낼 수 없다고, 2년 전에 만난 것이 마 지막이었고, 그 순간은 이별의 순간이었다고 말하려 하다가 입을 다물어 버 렸다. 지금은 어떤 말을 한다해도 케이스워크에게 진실로 들릴 리가 없었다. 케이 스워크의 보라색 눈동자는 지극히 차가웠지만 그 속에는 광기가 맴돌고 있 었다. "알겠습니다, 폐하." 테이드는 고개를 숙였다. 오래 전부터 바래왔던 대로 가문은 옛 영광을 되찾았지만, 테이드가 되찾은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사이드 공국으로 출발하는 사신단의 행렬에서 테이드는 정신을 잃고 있는 첼시피온 왕자와 같은 마차에 탄 채 사이드 공국을 향해 출발했다. 첼시피온 왕자와는 라딘 덕분에 인연을 맺었고, 라딘이 실종된 이후에는 자 연스럽게 멀어졌다. 특별히 깊은 친분을 유지한 것도 아니고 필요에 의해 서로를 이용했을 뿐인 관계였다. 그러나 지금 이렇게 정신을 잃은 창백한 모습을 보니 아무리 요정의 피를 이었어도 첼시피온 왕자 역시 라딘과 마찬 가지로 아직 열 아홉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느껴졌다. 테이드는 한동안 첼시피온의 얼굴을 내려다보다가 마차의 창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마차로 장거리를 이동하는 것은 정말 오랜만의 일이었다. 라딘과 함께 황태 자였던 케이스워크의 생일 파티에 초대를 받았을 때는 초라한 마차로 이동 했고, 시내의 여관에 묵었었다. 지금은 그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고급스러운 마차에 테이드의 신분 역시 제국의 재상이라는 엄청난 지위로 바뀌어 있었지만 테이드의 마음은 조금도 가벼워지지 않았다.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늦는 법이다. 과거로 되돌아갈 수 있다면 지금 후회 하지 않도록 다른 행동을 할 것이다. 그러나 시간을 되돌릴 수 있는 힘을 가진 사람은 없었다. ' 라딘....' 창백한 피부에 검은 머리카락을 가진 소년. 늘 방안에 웅크리고 앉아 겁에 질린 채 떨고 있던 소년. 테이드의 눈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신의 손목을 그어 내렸던 소년. 모든 이들에게 멸시와 경멸의 시선을 받으며 안으로만 파고들었던 소년. 그리고. 폭력에도 주눅들지 않고 소리지르던 소년. 나는 라딘이 아니야 라고 진지하게 외치던 소년. 당신은 나의 형이 아니라고 말하며 이별을 고하던 소년. 여러 개의 표정과 얼굴이 뇌리를 맴돌며 테이드에게 과거의 추억을 일깨웠 다. 라딘은 테이드에게 있어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단순한 동생은 아니었다. 가문의 몰락과 연관되지 않았다면 과연 이 정도로 라딘에게 집착하게 되었 을 지 자문해 보았다. 케이스워크까지 알아차리고 있을 정도로 테이드는 라딘에게 집착하고 있었 고, 지금도 그 마음은 사라지지 않았다. 라딘을 찾을 수 있다면 다시 만나게 된다면 이번에는 결코 놓치지 않을 것 이라고. 반드시 그 손을 잡겠다고. 라딘을 떠올리다보면 언제나 2년전 바닷가의 기억이 떠오른다. 그리고 라딘 과 함께 묵묵히 사라졌던 스위드의 모습도. 어째서 스위드가 케이스워크를 떠나 라딘을 선택했는지 알 것 같은 기분도 들었다. 마차 바퀴 소리와 말발굽 소리만이 침묵을 깨는 가운데 얼마나 시간이 흘렀 을까. 창 밖으로 고개를 돌리고 있던 테이드가 문득 다시 마차 안으로 시선 을 돌렸을 때, 테이드는 고요하게 가라앉은 첼시피온의 눈동자와 정면으로 마주쳤다. 둘은 약속이라도 한 듯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첼시피온이 몸을 일으켜 긴 의자에 기대어 앉자 테이드는 몸을 정면으로 돌려 앉았다. "...다행이군요." 테이드가 먼저 입을 열었다. 첼시피온은 방금 깨어난 사람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편안한 표정으로 미소지었다. "몇 년만에 고국으로 돌아가는 건지 모르겠군요. 아버님도 많이 걱정하 고 계셨을 텐데..." 첼시피온은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말했다. 목소리는 예전과 다 름없이 무척 맑았고, 안색이 조금 창백한 것만 빼면 첼시피온은 정말 아무 렇지 않아 보였다. 지금 상황이 어떤 것인지 말도 하지 않았는데도 첼시피온은 처음부터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는 것처럼 침착하기 그지없었다. 테이드는 일부러 설명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 채 입을 다물고 있었다. "제국도 아름다운 곳이지만 사이드 공국도 살기 좋은 곳입니다. 무엇보 다 요정의 숲과 가까운 곳에 있으니까요." "무슨 생각으로 제국에 남아 있었습니까." 테이드의 질문에 첼시피온은 잠시 시선을 돌렸다가 싱긋하고 미소지었다. "알려진 그대로입니다. 저는 라딘 라메르를 납치하려고 했지만, 실패했습 니다." 테이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첼시피온은 그의 마음을 읽고 피식하고 웃었다. "물론 그것은 대외적인 이유입니다. 황태자는...아니, 황제는 강력한 아군 을 가지고 있더군요. 마법사를 능가하는 절대적인 능력을 지닌 사람을 알고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첼시피온이 순순히 대답하자 테이드는 주의 깊게 그의 말을 들었다. "1년 동안 제국의 신세를 진만큼 충분히 그 빛을 갚아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전쟁을....하실 생각이십니까...?" "전쟁이라니요. 전쟁을 할 생각은 없습니다. 하지만....." 첼시피온은 말끝을 흐리며 미소지었다. 더 이상 말을 할 생각은 없는 것 같 았다. "라딘에게서 연락은 없었습니까?" 테이드가 고개를 젓자 첼시피온은 이상하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분명 샤르코 가문의 쌍둥이라면 라딘의 행방을 알고 있을 텐데요. 그들 과는 연락을 하지 않았습니까?" "쌍둥이를 만나 라딘을 감춰 주기로 했다는 말은 들었지만 그 후의 행방 까지는 알지 못합니다." "대단한 우정이군요." 테이드는 머리가 복잡해지는 것을 느꼈다. 공허했지만 그나마 평온했던 시간들이 한 순간에 복잡하게 얽히고 있었다. "백작님의 도움을 구하고 싶습니다." 미소 띈 첼시피온의 얼굴을 바라보며 테이드는 대답했다. 빠른 속도로 주문을 외치자 바닥에 선명한 은색 마법진이 나타났다. 한 사람이 들어가 설 수 있을 정도의 크기를 가진 마법진은 한쪽 어깨에서 피를 흘리고 있는 소녀의 주위를 감싸듯이 빛을 뿜어내며 완성되었다. "조금만 참아." 피가 상당히 많이 흘러서 소녀의 얼굴은 창백해져 있었지만 그녀는 용케 미 소를 잃지 않고 서 있었다. 마법진이 완성되고 나자 그 안에서 온기와 함께 온화한 흰색의 빛이 피어올 랐다. 그 빛은 발목을 감싸고 위로 점점 올라가 그녀의 전신을 안개처럼 감 싸안았다. 그리고 그 빛이 사라지자 소녀의 어깨에 생겨났던 길다란 자상은 완전히 사라져 있었다. "굉장해, 딘!" 피를 흘린 탓에 조금 비틀거리면서도 세피는 환하게 웃었다. "세피야 말로 굉장한 검술 실력이었어." 자객처럼 상당한 훈련을 받은 듯한 습격자가 나타났을 때 세피는 도현과 스 위드를 막아서며 검을 꺼내들었다. 그녀가 자신의 실력을 믿으라고 말을 하 긴 했지만 도현은 뒤에서 마법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도현의 기우에 불과했다. 세피는 날렵한 몸놀림으로 순식간에 자기보다 몸집이 큰 습격자들을 해치워 버렸다. 그녀가 부상을 당한 것은 습격자들의 동료가 마법사를 해치우기 위 해 날린 단검을 몸으로 막아낸 탓이었다. 그 정도라면 마법으로 충분히 막아낼 수 있었다고 말했지만 세피는 웃으며 대답했다. 마법에 의한 공격이라면 마법사들에게 맡기겠지만 검에 의한 것 이라면 자신이 막는 것이 당연하다고. 도현은 어쩔 수 없이 웃으며 치유 마법을 펼쳤다. 만난 지 며칠 되지도 않았지만 세피는 특유의 활발함으로 도현과 금새 친해 졌다. 귀족가의 여식이라는 느낌은 시간이 갈수록 없어지고, 마치 함께 수학 여행을 온 급우 같은 느낌이 들었다. "모닥불을 피우겠습니다." 싸움을 했던 장소에서 벗어나 한적한 숲 근처에 이르자 스위드는 노숙을 준 비하기 시작했다. 주변에 널려있는 나뭇가지 몇 개를 모아 쌓아둔 후 마법 으로 불을 피우고 주변에 둘러 앉았다. 말린 햄과 빵으로 간단하게 식사를 마치고 나서 코코아와 비슷한 맛을 내는 음료수를 마시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정말로 밖에 나와 캠프를 하는 기분이 들어서 도현은 얼굴 가득 환한 미소 를 떠올리고 있었다. 이번 의뢰는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예전 같았으면 이런 영화 같은 상황에 적응하는 것도 힘들었을 텐데, 지금 은 상황을 즐기고 있었다. "마법사도 나쁘지 않은 것 같아...." 도현은 넓게 펼쳐진 하늘에 수놓인 무수한 별무리를 보며 중얼거렸다. ================================================= 글 올렸으니 이제 저는 자야겠사와요 ^^;; 이번 파트는 여기서 끝이구요, 이제 세 번째 파트 시작합니다. 저는 즐겨보던 건담 Seed가 끝나서 조금 슬픕니다. ;ㅁ; 성우 패치인 저에게는 아주 황홀한 애니였는데 말이에요. 그래도 10월이면 새롭게 애니가 방영되니 괜찮은 애니를 건져서 봐야겠어요. 모두 즐거운 일요일 보내세요, 저는 오랜만에 개들과 함께 산책을 나갈 예 정입니다. ^^ Part 3. 꿈의 파편 "....형..?" 양복차림의 기현이 등을 돌린 채 걸어가고 있었다. 곧게 뻗은 등과 유연한 장신의 몸은 익숙했지만 한편으로는 낯설었다. "형! 어딜 가는 거야?" 도현은 빠른 걸음으로 앞으로 나가는 형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나 기현은 도현의 목소리를 듣지 못한 듯 멈추지 않고 걸어나갔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걸어가는 형이 야속해서 도현은 울고 싶어질 정도였다. "형, 멈추고 날 봐!" 다시 한번 소리쳤다. 그러나 여전히 기현은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도현은 이를 악물고 달리기 시작했다. 달려도 달려도 좁혀지지 않는 거리를 끊임없이 달려나가다가 겨우 기현에게서 몇 걸음 떨어지지 않은 곳에 다다랐다. 손을 뻗어 양복 끝자락을 잡아당기자 그제서야 기현이 고개를 돌렸다. 무심한 표정으로 뒤돌아보는 기현의 얼굴을 보고 도현은 웃으려 했다. 그러나 돌 아본 얼굴을 확인한 순간 도현은 표정을 일그러트렸다. 냉랭한 녹색 눈동자가 도현을 정면으로 응시하고 있었다. "....테...이드..?" "라딘. 돌아와." 기현과 똑같은 목소리로 테이드는 손을 내밀며 말했다. 도현은 고개를 저었다. "당신은....내 형이 아니야..." "라딘...." "날..... 그 이름으로 부르지 마!" 목이 아플 정도로 크게 소리쳤다. 그리고 도망치듯이 등을 돌린 채 달려나갔다. 주변은 어느새 낯선 숲 속으로 뒤바뀌어 있었다. 한참을 달려나가자 숲이 끝나고 넓은 해변이 나타났다. 인적 없는 해변에서 도현은 넓고 깊은 바다와 만났다. 예전에 본 적이 있던 광경이었다. 저 건너편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지 모르지만 이 바다를 건너면 원하던 장소에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도현은 바다 속으로 뛰어들었다. 차가운 물의 감각이 피부를 통해 전달되었다. 발목이 잠기고 허리가 잠기고 가슴까지 잠겨들었다. 도현은 계속해서 바다 속으로 깊이 깊이 들어갔다. 이윽고 전신이 다 잠기고 나 자 숨을 쉴 수 없을 만큼 무거운 어둠이 도현을 잡아 당겼다. 앞으로 나아가려고 했지만 무언가에 묶인 것처럼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도현은 낮게 신음성을 내며 팔을 휘둘렀다. "딘?" 식은땀을 흘리며 뒤척이는 도현의 몸을 세피가 흔들며 이름을 불렀다. "딘? 정신 차려!" 계속 깨어나지 못하고 괴로워하는 도현의 이름을 부르기를 몇 분, 도현은 겨우 눈을 떴다. 멍한 표정으로 눈을 깜빡거리던 도현은 겨우 정신을 차렸다. "세피...." "안색이 안 좋아. 악몽이라도 꾼 거야?" 악몽... 도현은 작게 중얼거렸다. "스위드는?" "불러올까?" 도현이 고개를 끄덕이자, 세피는 자리에서 일어나 숲을 향해 걸어 들어갔다. 도현은 상체를 일으켜 바닥에 앉았다. 잠자리를 대신해 마른 나뭇잎을 바닥에 깔 고 그 위에 망토를 깔았던 탓에 바닥에서부터 한기는 올라오지 않았다. 바람이 나뭇잎을 스치고 지나는 소리밖에 들려오지 않는 한 밤의 숲에 둘러싸인 채 도현은 방금 전에 꾸었던 꿈을 떠올렸다. 역시 2년이 지난 것 정도로는 그리움을 떨쳐버리는 것이 불가능했다. 탑에서 지 내는 동안에는 마법을 배우느라 다른 생각에 빠질 틈이 없었지만 탑을 나오고 나 서 이런 형식으로 여행을 떠나게 되자 바로 마음의 빗장이 풀려버린 것이다. 게다가 형의 얼굴에 겹쳐서 떠오른 테이드는 도현에게 더욱 괴로움을 느끼게 만 들었다. 기현은 현실에 존재하지 않지만 테이드는 현실에, 같은 세상에 존재하고 있다. "딘..." 세피와 함께 돌아온 스위드는 창백하게 질린 안색으로 앉아 있는 도현을 보고 걱 정스러운 표정으로 다가왔다. "잊는 건...불가능해..." 도현은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스위드는 금새 도현이 무엇에 대해 말하고 있는지 알아차렸다. 지난 2년 동안 아 니, 이곳에 온 이후로 도현은 계속해서 하나만을 목표로 해 왔고 지금도 그것을 잊지 않고 있었다. "잊을 필요 없어." 스위드는 도현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대답했다. 그제서야 멍하던 도현의 표정이 달라졌다. 먼 곳을 바라보던 시선을 스위드에게 옮긴 도현은 조용히 그를 응시했 다. "스위드..." 도현은 스위드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자 스위드는 비어있던 한 팔로 도현의 등을 감싸며 포옹했다. 무슨 이유로 딘이 괴로워하는 지 알지 못하는 세피는 몇 걸음 떨어진 곳에 선 채 가만히 그들을 지켜 보고 있었다. 계속 어두운 표정이던 도현을 스위드가 수면 마법으로 재워두고 나서 스위드와 세피는 모닥불 주변에 둘러 앉았다. "받으세요." 세피는 휴대용 양철 컵에 차를 따라서 스위드에게 건넸다. "감사합니다." 스위드가 컵을 건네 받으며 대답하자 세피는 작게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자신의 몫의 차를 준비했다. 체피는 귀족가의 여식이라기에는 행동이나 태도가 너무나 자연스럽고 자유분방했다. 그렇다고 해서 평민처럼 보이지도 않았지만 보통 귀족 가의 여식처럼 다소곳하고 차분한 모습을 보여주지도 않았다. 도현은 그런 세피를 마음에 들어했고, 금세 친해졌지만 스위드는 그녀에게 그가 가진 것의 아주 일부만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것은 스위드가 지금까지 살아오면 서 취해왔던 방식이었다. 휘트린을 제외하고 가장 오래 함께 시간을 보냈던 케이 스워크에게는 많은 부분을 보여주었지만 스위드는 그에게도 자신의 전부를 보여 준 적은 없었다. 한동안 모닥불이 타들어 가는 것만을 바라보며 차를 마시던 스위드가 입을 열었 다. "이런 식으로 다른 나라로 움직이는 것은 위험할 텐데요. 분명 추격자는 계속 해서 끊이지 않을 겁니다." "그래서 당신들을 고용한 거에요." 스위드의 질문에도 세피는 전혀 당황하지 않고 웃는 얼굴로 대답했다. 도현은 스위드의 간단한 설명만을 듣고, 그리고 세피의 성격 때문에 아무런 의심 을 하지 않고 있었지만 애초에 세피가 혼자서 다른 나라로 가는 것 자체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게다가 귀족 가문의 여식 한 명이 길을 떠나는데 암살자나 추격자가 따라붙는 다 는 것은 더더욱 말이 되지 않는 일이었다. "딘에게는 말하지 말아주세요. 오랜만에 생긴 좋은 친구를 잃고 싶지는 않아 요." 스위드는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불의 보석....맞습니까?" 이어진 스위드의 말에 세피는 놀란 얼굴이 되었다. "어떻게 알았죠?" "암살자들을 처리하는 모습을 보고 알았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신의 보석이 마법의 힘만 가져다 준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이 아니라 신의 보석을 얻은 사람이 어떤 기질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맞아요." "게다가 당신은 막을 수 있는 공격을 일부러 몸에 맞았습니다." 세피는 쓴웃음을 지었다. 스위드가 설마 그것까지 간파할 줄은 몰랐던 것이다. "저야말로 제대로 된 사람을 고용한 것 같군요. 당신들의 소문은 들었어요. 길 드에 등록 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능력이 확실하다면서 길드 쪽에서 강력하게 당신들을 추천해 주더군요." 스위드는 그 말에는 대답하지 않았다. "딘은 뭔가 힘든 과거를 가진 모양이에요. 저 역시 보통 귀족 소녀가 겪을 법 한 평범한 일상을 보내지는 못했지만 딘의 표정은 뭔가 소중한 걸 잃어버린 사람 이 보여주는 표정이었 어요." "딘은 원하지 않았는데 소중한 것을 잃어버리고 이곳에 와 있습니다. 지금도 모든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닙니다." 세피는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은 참 신기한 사람이에요, 스위드. 신의 보석을 가진 사람을 보는 보통 사람의 시선은 경악 혹은 경외 두 가지로 나뉘거든요. 끊임없이 누군가가 날 노 리고 무언가를 요구하죠. 부모님 역시 날 평범한 딸로 봐 주지 않아요. 사실을 알 고도 아무렇지 않게 봐준 사람은 스위드 뿐이에요." "아마 딘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딘도 분명 아무렇지 않게 웃어줄 겁니다." "하지만 딘에게는 밝히고 싶지 않아요. 신의 보석을 가진 여자를 보통 남자들 은 꺼림칙하게 생각하거든요." 그렇게 말하고 나서 세피는 아무렇지 않게 웃어 보였다. "평범하게 봐 준다고 해도 역시 밝히고 싶지 않아요. 딘의 앞에서만은 저 역 시 약간 특이한 소녀가 되고 싶어요. 딘은 제가 좋아하는 타입이거든요." 그렇게 말하며 웃는 세피의 얼굴은 그 나이대의 소녀가 지을법한 약간의 수줍음 이 섞인 표정이 되어 있었다. 스위드는 고개를 끄덕이며 희미하게 미소지었다. 도현과 만난 이후로 마치 도현에게 이끌리듯이 신의 보석의 주인들이 하나 둘씩 나타나고 있었다. 지금은 힘을 봉인당한 채 제국 황성에 갇혀 있는 첼시피온은 바람의 보석의 주인 이었고, 스위드와 도현은 각각 어둠의 보석과 빛의 보석의 주인이었다. 그리고 이 번 의뢰자인 소녀 세피디나는 불의 보석의 주인이었다. 신이 지상에 남겨둔 여섯 개의 보석. 그 주인들이 모두 모이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어쩌면 도현이 바라는 것이 이루어 질 수도 있었다. 개별적으로 존재할 때는 강 력한 힘의 증거에 지나지 않지만 그것들이 한 곳에 모였을 때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거대한 힘을 보일 수도 있는 것이다. 신의 보석을 가진 자들은 상대방이 신의 보석을 가졌다는 사실을 한 눈에 보고 알지는 못하지만 자연스럽게 상대방에게 끌리게 되어 있었다. 세피 역시 그런 보 석의 작용임을 알지 못하고 도현에게 끌리는 것을 자신의 자연스러운 감정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스위드는 일부러 그녀에게 사실을 일깨워줄 필요성은 느끼지 못했다. 도현에게 있어서도 세피는 좋은 말상대가 되어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지난 2년 동안 도현과 함께 지내면서 스위드는 도현이 원래 세상으로 돌아가지 못한다는 데서 느끼는 괴로움 때문에 고통스러워하는 것을 충분히 봐 왔다. 밖에 나와서 다른 사람을 만나고 여러 가지 경험을 하는 것으로 그 고통에서 조금이나마 벗어 날 수 있다면 스위드는 그것이 어떤 일이 되었던 간에 상관하지 않을 생각이었 다. =================================================== 본의 아니게 며칠 쉬고 말았습니다. =ㅂ=;; 이틀 연속으로 친구와 동생 생일 놀아주기를 한 바람에 피곤하고 바빴답니다.; 이번 달에는 약속도 많고, 이사도 갈 예정이라 바빠질 것 같아요. 연재가 불규칙해 지더라도 약간의 이해를 부탁드립니다. ^^; 세 번째 파트 시작합니다. 도현이가 많이 나올 것 같은 세 번째 파트입니다. 제국에서 사이드 공국으로 향하는 사신단 일행은 밤을 보내기 위해 황궁에서 다 른 나라로 움직이는 사람들이 이용할 수 있도록 지역마다 마련해둔 저택 중 한 곳으로 들어갔다. 마차 안에서는 일어나 앉아 테이드와 말을 주고 받았지만 밤을 보내기 위해 저택 에 들를 때마다 그는 아직 깨어나지 못한 것처럼 행동했다. 모든 사람들이 잠든 깊은 밤. 첼시피온은 조용히 침대에서 일어나 창가로 걸어갔다. 사람의 키 정도 되는 높이의 긴 창문을 열자 달빛이 방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그 빛을 몸에 받아들이기라도 하는 것처럼 첼시피온은 두 팔을 살짝 벌리고 창가 에 섰다. 본래 요정은 인간과 어울려 살지 않는다. 그들은 대륙에 터전을 잡고 살아가고 있었지만 실제로 요정들의 땅은 지상에 있는 것이 아니었다. 자신들의 터전 안에서만 살아가는 요정들이 밖에 나오는 일은 아주 드물었다. 더 군다나 인간과 결혼을 하거나 인간의 아이를 낳는 일은 더더욱. 첼시피온은 지상에 존재하는 유일한 요정과 인간의 혼혈이었고 신의 보석의 주인 이었다. 고개를 살짝 들어올린 채 눈을 감고서 첼시피온은 은은한 달빛을 만끽했다. 그것 은 온화한 빛이 몸을 쓰다듬는 것과 같은 부드럽고 따뜻한 감각이었다. 망가졌던 몸은 이제 정상으로 되돌아왔다. 봉인되었던 능력도 모두 되돌아왔다. 첼시피온에게 절대적인 공포라는 감각을 느끼게 만들었던 휘트린은 이제 어디에 도 없었다. 몸에 새겨졌던 굴욕의 흔적을 잊지 않겠다고 첼시피온은 마음 깊은 곳에서 다짐 하고 있었다. 그 전까지만 해도 첼시피온은 이 세상을 보통 사람들과는 다른 시 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이 땅은 자신이 속한 곳이지만 결코 이곳에 완전히 받 아들여지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그렇게 생각했다. 신의 보석을 얻었던 그 때, 첼시피온은 요정의 숲에 들어갈 수 없는 몸이 되었다. 비록 반쪽이었지만 요정의 피를 이었기 때문에 가끔은 모친을 만나러 요정의 숲 에 가곤 했지만 신의 보석을 얻고 그 힘을 받아들인 후로는 보통 인간들처럼 요 정의 숲에서 거부당했다. 신의 힘과 요정의 힘이 서로를 배제하기 때문에 벌어진 결과였지만 첼시피온은 마치 이제 너는 요정의 아이가 아니다라고 선고를 받은 듯한 기분을 느꼈다. 반정도 자신은 요정이라고 생각하고 살던 첼시피온에게 그 거부는 충격적인 일이 었다. 그렇게 첼시피온이 충격에 빠져 있을 때, 부친인 페르마 대공왕은 잠시 여 행을 다녀오라며 권했었다. 수행원 몇 명을 데리고 사이드 공국을 돌아다니며 첼 시피온은 때로는 마법을 이용해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주기도 했고, 어떤 때는 싸움을 하기도 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자 마음은 다시 평온해졌다. 그렇게 여행을 마치고 차분한 얼굴로 되돌아온 아들에게 페르마 대공왕은 어린 시절부터 계속 첼시피온에게 들려주던 말을 건넸다. "첼시피온, 너는 사이드 공국을 지켜보고 동생들을 지킬 책임이 있다. 너는 왕 가를 지키는 자가 되어야 한다." 그것은 주변을 인식하게 된 후부터 계속해서 들어온 말이었다. 요정의 피를 이은 이상 첼시피온의 수명은 보통 사람의 몇 배는 된다. 페르마 대 공왕은 첼시피온에게 늘 왕과 가장 가까운 곳에서 공국을 지켜야 한다고 다짐시 키듯 말하곤 했다. 처음에는 그 의미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들었던 말이었지만 지금에 와서는 그것이 첼시피온의 삶을 지탱하는 커다란 한 축이 되어 있었다. 이제 며칠 후면 다시 고국으로 돌아가게 된다. 첼시피온은 제국에서 멀어져 점점 사이드 공국의 영토에 가까워짐에 따라 마음속에서 그리움이 피어나는 것을 느끼 고 있었다. 제국에 신의 보석의 주인이 나타났다는 말을 듣고 페르마 대공왕의 명령으로 아 카데미에 들어가 라딘에게 접근했다. 언제나 그랬듯이 첼시피온이 친해지기를 원 했던 사람들은 쉽게 마음을 열고 그를 받아들였다. 라딘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결국 그것이 모든 일의 발단이었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진지하게 해서 그 말을 믿는다고, 누가 부정한다고 해도 나만은 그 말을 믿는다고 이야기하자 라딘의 마음속에 강한 신뢰가 자리잡은 것 을 알 수 있었다. 황족과 얽힌 스캔들로 인해 어두운 유년기와 소년 시절을 보냈을 소년은 예상했 던 것과는 전혀 다른 성격의 소유자였다. 게다가 믿을 수 없는 내용으로 가득한 말을 했지만 라딘의 말은 모두 진심이었다. 그러나 첼시피온은 진심으로 라딘의 말을 믿을 수 없었다. 이 세계가 아닌 다른 세계가 존재한다는 이야기는 요정의 숲에 사는 요정들에게서도 들은 적이 없었 다. 인간 보다 훨씬 오랜 시간을 살아왔고, 앞으로도 살아갈 요정들도 이 세계만 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아마 라딘은 저택에 갇힌 채 살아온 탓에 사실이 아닌 것을 자신의 기억이라고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고 첼시피온은 판단했다. 그 후 생각보다 빠르게 첼시피온이 거짓말을 했다는 사실이 라딘에게 알려졌지만 첼시피온은 크게 상관없다는 태도로 일관했다. 사실 첼시피온이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버지의 말대로 공국을 지키는 일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너무나 쉽게 첼시피온에게 신뢰하는 태도를 보이고 미소를 지어주 는 것만으로도 만족해했다. 그러나 겉으로 보이는 인간의 태도와 마음은 전혀 다 른 것이라는 사실쯤은 이미 어린 시절에 깨달았다. 라딘이 진심으로 자신에게 화를 냈고 덕분에 라딘을 사이드 공국으로 데려가려던 계획이 앞당겨졌다. 용병 길드에 의뢰해 라딘을 사이드 공국 쪽 사람들이 기다릴 중간 지점으로 데려가도록 계획했고 그것은 순조롭게 이루어지는 것 같았다. 중간에 갑자기 라딘의 모습이 사라지지 않았더라면 첼시피온은 라딘이 사이드 공 국에 도착한 직후에 다시 고국으로 되돌아갔을 것이다. 그러나 계획이 뒤틀리고 나자 의외의 요소들이 나타나 첼시피온의 앞을 가로막았 다. 나중에는 케이스워크가 의뢰인의 신변 보장을 철저히 하는 것이 원칙인 길드 에 압력을 넣어 증거를 들이대며 첼시피온의 신병을 억류했다. 그리고 그는 마녀 휘트린을 불렀다. 첼시피온은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잊을 정도로 아득한 감각을 느꼈던 과거를 되 돌아 보았다. 그 기억은 마치 멀고 오래된 과거처럼 아득하게 느껴지기도 했고, 어느 순간에는 바로 조금전까지 피부에 강한 손길이 닿았던 것처럼 생생하게 다가오기도 했다. 첼시피온의 표정이 희미하게 일그러졌다. 어떻게 되었던 간에 케이스워크는 첼시피온의 몸에, 그리고 기억에 지워지지 않 을 뚜렷한 흔적을 남긴 것이다. "...... .... ....." 첼시피온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제는 그 말을 들어줄 다른 요정들도 없지만 첼시피온은 요정의 언어로 몇 번이 고 같은 말을 중얼거렸다. 당분간 케이스워크의 얼굴을 볼 일은 없을 테지만, 이제 더 이상은 케이스워크의 손길에 속수무책으로 시달리지 않을 테지만 이미 지나버린 시간은, 몸에 새겨진 흔적들은 여전히 첼시피온을 괴롭혔다. 다른 사람들의 눈앞에서는 아무렇지 않게 예전처럼 부드러운 표정을 보일 수 있 었지만, 깊은 밤이 되고 혼자 있는 시간이 길어지면 귓가에서 케이스워크의 목소 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깊고 음울하게 울리는 목소리. 케이스워크의 손가락이 강한 힘으로 허리를 붙잡고 도망치지 못하도록 단단히 고 정한다. 그리고 뜨거운 것이 내부로 들어와 정신없이 몸 속을 휘젓는 것이다. 고개를 저어도 벗어나려고 해도 그 뜨거움에서는 벗어날 수 없었다. 귓가에 낮은 목소리가 속삭이며 해방시켜 달라고 말하라고 유혹해도 첼시피온은 그 말에는 따르지 않았다. 반복되는 행위에 몸은 익숙하게 그것을 받아들여도, 절대로 마음으로부터 그것을 즐기거나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1년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길었고, 또한 짧은 시간이었다. 첼시피온은 케이스워크의 이름을 마음 깊숙한 곳에 새겼다. 다음에 다시 케이스워크와 마주할 때에는 절대로 두 번 다시 같은 실수는 반복하 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에게 최고의 미소를 보여 줄 것이다. 사이드 공국의 국경을 넘어 사이드 공국 내로 들어서자 넓게 펼쳐진 들판이 도현 일행을 맞이했다. 엷은 녹색으로 빛나는 들판은 마치 녹색의 바다처럼 바람에 따라 흔들리며 장관 을 만들어냈다. 도현이 그 광경에 시선을 빼앗기고 있자 세피는 밝은 얼굴로 말 을 걸었다. "아름답지? 잘 꾸며진 정원도 아니고 엄청난 절경도 아니지만 어떤 때는 이런 풍경이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거야." 세피의 말에 도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도현이 태어나고 자라온 도시에서는 결코 볼 수 없는 풍경이었다. 이제는 컴퓨터가 없어도, TV나 전화가 없어도 살아갈 수 있게 되었다. 문명의 이기는 결국 이기였을 뿐, 꼭 필요한 것은 아니었다. 가끔 아쉬울 때도 있었지만 도현은 지금 눈앞에 펼쳐진 풍경에 감탄하는 것만을 생각하기로 했다. 꽤 오랫동안 길을 따라 펼쳐진 들판을 바라보며 이동하는 동안 도현은 내내 즐거운 기분이었다. 들판이 끝난 것은 해가 점점 기울고 머물만한 숙소를 찾기 위해 마을에 들어섰을 때였다. 센 왕국에서는 주로 노숙을 했지만 사이드 공국에서는 여관을 이용하기로 했다. 그것은 센왕국 국경을 넘자 추격자들이 딱 끊겼기 때문에 결정한 일이기도 했다. 마을로 들어선 후 눈에 띄는 여관에 들어가 방을 정하고 식당에 앉았다. 식당 안은 시끌벅적했지만 활기에 가득 찬 느낌이었다. 몇몇 사람들이 평민과는 다른 분위기를 가진 그들을 흘긋 하고 쳐다보긴 했지만, 곧 자신들의 관심사로 눈을 돌렸다. 음식을 주문하고 나서 음식이 나오는 것을 기다리며 도현은 식당 안을 둘러보고 있었다. 이런 류의 일반적인 식당에 오는 것은 처음이었다. "이제 정확한 목적지를 밝힐 때가 되지 않았습니까?" 물컵을 만지작거리고 있던 세피에게 스위드가 말을 걸었다. 도현은 그들의 대화 를 흘려 들으며 여전히 주변을 관찰했다. "이제 3일 정도만 더 가면 도착이에요." "친척을 만나러 간다는 건 사실이었군요." 스위드의 말에 세피는 조금 억울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 "친척이라기 보다는 친언니를 만나러 가는 거죠. 제 언니가 페르마 대공왕의 세 번째 부인이거든요." "뭐?" 도현은 먼 경치에만 시선을 주고 있다가 그 말을 듣고 자기도 모르게 소리쳤다. 세피가 목적지라고 밝힌 곳이 사이드 공국이라는 말은 들었지만 설마 왕성일 줄 은 몰랐다. 첼시피온은 지금 제국에 가 있지만 사이드 공국은 첼시피온의 나라였 다. 이런 우연이라니. 절대로 달갑지 않았다. 첼시피온이 케이스워크에게 붙잡혀서 움직이지 못하고 있다는 말을 쌍둥이들로부 터 들었고, 조금 안됐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방관자의 입 장에서 말한 것이다. 하지만 첼시피온이 없다고 해도 첼시피온이 태어나고 자라왔고, 첼시피온을 아는 사람들이 가득한 곳은 왠지 거부감이 느껴졌다. 첼시피온처럼 신뢰를 배반해 버린 사람을 쉽게 용서할 수는 없었다. "뭐야? 내가 그렇게 귀족같지 않았어?" 세피가 불만스럽게 묻자 도현은 고개를 저었다. "그것 때문에 놀란 게 아니야. 단지 장소가 의외여서...." "사실은 예전에 첼시피온 왕자와 약혼도 했었어. 내가 열 두 살 정도 되었을 때의 일이지만..." "뭐...?" 도현은 놀란 표정을 얼굴에서 지우지 못했다. "그런 얼굴 하지 마. 첼시피온 왕자가 나보다 훨씬 아름다운 얼굴이라는 건 말하지 않아도 잘 아니까. 그리고 이미 약혼은 취소했어. 그냥 어린 시절의 추억 이지." 세피는 자신이 신의 보석을 얻은 후 약혼을 취소했다는 것은 살짝 빼 버렸다. 딘 에게는 그냥 활발한 보통 소녀로 남아있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 비범한 소녀 세피와 도현의 이야기는 다음 회에도 이어질 듯 합니다. 이달 중순경에 이사를 갈 예정이어서 요즘 짐 정리도 하고 어쩌고 하느라고 괜시 리 바쁩니다. 책 정리를 벌써 몇 박스나 했는데 아직도 책장으로 5개나 남았어요 ㅠ-ㅠ 이달에는 연재가 불규칙적이 될 가능성이 매우 높고, 벌써 그렇게 하고 있으니 계속해서 양해를 구합니다. ^^;;; 즐거운 주말 되세요~~ 한동안 놀란 얼굴로 앉아 있던 도현은 음식이 나오고 나서야 정신을 차렸다. "첼시피온 왕자와 약혼을 했었다는 것은 당신의 신분이 그와 비슷하거나 그에 버금간다는 말이겠군요." 스위드가 말하자 도현은 그제서야 세피의 얼굴을 다시 쳐다 보았다. 세피 역시 스위드의 말을 듣고서야 자신의 실수를 알아차린 것 같았다. "너.....설마 왕족이라거나....?" 세피는 곤란한 표정으로 앞에 놓인 접시 위의 음식에 시선을 돌렸다. "하아...." 도현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왜 내 주변에는....귀족 아니면 왕족들 밖에 다가오지 않는 거지....?" 물론 예외도 있었지만 유일한 예외인 리올과 카드리 역시 귀족들도 함부로 하지 못하는 대 상단의 아들이었다. 푸념 섞인 도현의 목소리를 듣고 스위드는 작게 웃었다. "미안." "네가 미안해할 필요는 없지. 왕족으로 태어난 건 네 잘못이 아니잖아?" 아무렇지 않게 대답하는 도현을 보고 세피는 안도의 미소를 지었다. 왕족이라는 사실에 놀라거나 하지 않는 점이 정말 기뻤다. "친구가 되는 데 신분이 제한이 된다는 건 우습잖아, 그렇게 생각 안 해?" "맞아." 세피는 활짝 웃었다. 식사를 마치고 나서 도현은 방으로 들어가 거울 앞에 앉았다. 쌍둥이와 연락을 취하려고 마음을 먹자 기분이 즐거워졌다. 리올과 카드리와의 첫 만남은 별로 좋은 인상은 아니었지만 지금 생각하면 그런 식으로라도 쌍둥이 가 접근해 준 것이 다행이라고 여겨졌다. 비록 2년 동안은 직접 만나지는 못했어 도 도현쪽에서 거울을 통해 연락을 취하는 식으로 셋의 우정은 계속 이어졌다. 만나지 못하기 때문에 더욱 소중하게 여겨지는 것인지도 모른다고 도현은 문득 생각했다. 리올은 차분한 경향이 있지만 카드리는 걸핏하면 발끈하며 성질을 드 러냈기 때문에 도현은 카드리와 대화를 하는 것이 훨씬 재미있었다. 입 속으로 빠르게 연결 주문을 중얼거리자 거울 속에 낯익은 얼굴이 나타났다. "제발....아무 때나 그렇게 얼굴 내밀지 말아 줘. 이건 정말 적응이 안 된다고." 카드리는 도현의 얼굴이 창문에 비치자 깜짝 놀랐는지 표정이 조금 경직되어 있 었다. 카드리는 거울 앞에 앉아 있던 것이 아니라 어둑어둑해지는 하늘을 창 너 머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창유리에 사람의 얼굴이 선명하게 나타나자 깜짝 놀란 것이다. "그래서 무슨 일인데? 지금은 어디야? 주변을 보니까 네 집은 아닌 것 같고." 카드리는 도현의 얼굴 주변에 함께 비친 사물을 보고 도현이 지금 자신의 집에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의뢰 받은 일이 있어서 지금 사이드 공국에 와 있어." "사이드 공국?" 카드리의 표정이 기묘하게 변했다. "거긴 무슨 일로...?" "귀족 아가씨 한 명을 수행해서 친척집까지 데려다 주는 일이야." 그렇게 간단한 일은 아니었지만 도현은 간략하게 줄여서 대답해 주었다. "라....아니, 도현. 너 알고 있어?" "뭘?" 카드리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첼시피온 왕자 말이야. 갑자기 깨어나지 못하는 상태가 되어서 라메르 백작 이 호송의 책임을 지고 사이드 공국으로 떠났어." 도현은 얼굴 근육이 경직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사이드 공국이라는 이름 자체가 꺼려지기는 했지만 설마 갑자기 별로 만나고 싶 지 않은 둘의 이름이 튀어나올 줄이야. "알려줘서 고마워." 도현이 그렇게 대답하자 카드리는 고개를 저으며 뭐라고 중얼거렸다. "아, 그리고 놀랄 만한 소식도 있는데." "또 뭔데?" 도현이 묻자 카드리는 뜸을 들이며 싱글거리고 웃기만 했다. 도현이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젓자 그제서야 카드리가 입을 열었다. "라메르 백작님 말이야." 도현은 그 이름을 듣고 가슴 속에서 철렁하는 느낌이 들었지만 겉으로는 내색하 지 않았다. "얼마 전에 재상이 됐어." "뭐?" 도현은 귀를 의심했다. "재상이라니.... 왜....?" "그거야 황제 폐하의 뜻이지. 너무 젊다고 반발이 심하지만 맡은 일은 잘 하 고 있다는 평판이야. 하지만 이번에 사이드 공국에 사신으로 가서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가가 앞으로 재상이라는 위치를 굳건히 할 지 어떨지 말해주는 계기가 되겠지." 도현은 조금 멍한 눈으로 카드리를 바라보았다. 카드리는 신이 나서 계속 이런 저런 이야기를 꺼내고 있었다. "매번 네가 원하는 때에 이렇게 연락하지 말고 정기적으로 연락을 하던가, 만 날 수 있는 곳으로 오는 게 어때?" "지금은 아니지만, 빠른 시일 내에 그렇게 할게." 그 후로 한동안 카드리와 일상적인 이야기를 몇 마디 주고 받고 나서 도현은 마 법을 해제했다. 거울은 다시 평범한 거울로 되돌아와 조금 굳어져 있는 도현의 얼굴을 비추고 있었다. 정말 의외의 소식이었다. 첼시피온이 깨어나지 못하는 상태가 되었다는 말을 듣고 놀라지 않았다면 거짓말 이겠지만 별 감흥은 없었다. 그냥 그런 일이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을 뿐이 었다. 하지만 테이드가 함께 사이드 공국으로 향하고 있다는 소식과 재상이 되었 다는 소식은 정말로 도현을 놀라게 만들었다. 친형도 아니고 단지 얼굴이 같을 뿐이지만 테이드가 확실히 이곳에서 도현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사람인 것은 분명했다. 게다가 얼마 전에는 꿈에 기현과 테이드가 등장했었다. 냉정하게 말하면 언제 만 날 수 있을 지 없을 지도 확신할 수 없는 기현을 그리워하는 것보다는 테이드를 보고 얼굴이 같은 것을 위안 삼아 형을 그리워하는 게 나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사람의 마음이란 그렇게 쉽게 잘라 내듯이 달라지는 것이 아니었다. 탑을 나오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모든 일들이 도현에게 다가오는 것 같았다. 탑은 정체되어 있던 공간이었고, 그 곳에서 보낸 시간은 엄밀히 따지면 정체되어 있었으니 그곳을 벗어나자 모든 것이 다시 움직이는 것은 당연한 일일 지도 모른 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예고도 없이 갑자기 다가오는 것은 당혹스럽기만 했다. 늦게까지 잠들지 못하고 이런 저런 생각에 잠겨 있던 도현은 새벽녘이 되어서야 겨우 잠을 잘 수 있었다. 사이드 공국의 수도에 들어서자 확실히 수도라는 사실이 실감나게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여관에도 사람들이 많아서 어떤 곳에는 빈방이 없을 정도였다. 그래 도 운이 좋게 꽤 크고 깨끗한 여관에서 방을 잡은 후 셋은 평소보다 훨씬 호화로 운 식사를 했다. 내일이면 목적지에 도착한다며 헤어질 것을 아쉬워하던 세피는 여관 식당에서 신나게 술을 마시다가 완전히 뻗어버렸다. 잠이든 세피를 스위드가 방에 데려다 주고 돌아왔을 때, 도현은 지난 이틀 동안 고민하다가 내린 결론을 입 밖으로 꺼냈다. "스위드. 난 여기에서 기다릴 테니까 스위드가 세피를 데려다 주고 와." 도현의 확고한 표정을 보고 스위드는 이유도 묻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그곳에 가면 분명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들을 만나게 될 거야. 지금은 예전처럼 아무 힘도 없이 끌려 다니지 않을 자신이 있지만, 그래도 얼굴을 마주 보고 싶지 않아. 난 아직 어리고, 내가 어떤 식으로 반응을 보일지 예상을 못 하 겠어." "네가 그렇게 하길 원한다면 그렇게 해." 스위드의 목소리는 온화했다. 이틀 동안 도현은 계속해서 불안감에 시달렸다. 이제와서 두려워할 필요도 없는 데, 괜히 가슴이 떨려왔다. 아마도 그 꿈의 영향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보통 꿈은 희미한 영상만을 남긴 채 기억 속에 묻혀버리기 마련인데 그 꿈만은 너무나도 선명했다. 손만 뻗으면 바로 형이 잡힐 것처럼. "하지만 도현. 피한다고 해서 모든 것이 해결되지는 않아. 나 역시 항상 피하 고 벗어나려고 했지만 결국 휘트린에게서 벗어나지 못했어. 세상에는 어쩔 수 없 는 것도 있다는 건 잊지 마." 다정한 형처럼 스위드는 도현의 머리를 살짝 쓰다듬었다. "응..." 도현은 작게 대답했다. 이틀 동안 고민하던 것은 잠시 마음 한 구석에 접어두고 도현은 스위드의 손이 전해주는 온기를 느끼며 잠에 빠져들었다. 술에 취해 다음 날 오후까지 자고 있던 세피는 일어나자마자 대충 세수만 하고 옷을 걸친 후에 도현과 스위드가 머물고 있는 방으로 찾아갔다. "딘." 문을 열자 마자 도현의 이름을 부른 세피는 옷을 다 갖춰 입고 준비를 마치고 있 는 스위드와 달리 간편한 평상복 차림인 도현을 보고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딘은 왜 아직 준비를 다 안 했어?" "미안해, 세피. 나는 여기서 기다리기로 했어." "왜? 함께 가기로 했잖아." "나는 왕성에는 가기 곤란한 사정이 있어서, 정말 미안해, 세피." 세피의 표정이 금새 어두워졌다. 그녀는 문손잡이를 잡고 선 채로 움직이지 않았 다. "무슨 일이 생겨도 나는 널 충분히 지켜줄 수 있을 만한 힘도, 권력도 가지고 있어. 그걸로도 피할 수 없는 문제야?" 어둡게 가라앉은 표정이던 세피의 얼굴이 금새 다른 가면을 바꿔 쓴 것처럼 달라 졌다. 제 나이에 맞는 활발한 소녀의 얼굴은 사라지고 그 자리에는 왕족인 세피 가 있었다. 도현은 그녀의 변화를 지켜보며 조금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아무리 편안하게 친 구가 되고 그렇게 대했어도 이 세계에는 신분이라는 것이 존재하고 사람들은 각 자 그 신분에 맞는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네게는 끝까지 비밀로 하려고 했지만 말할 게." 세피는 굳게 결심한 듯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녀가 무슨 말을 꺼낼 지 예상 한 듯 스위드의 눈빛은 상당히 여유롭게 보였다. "나는 불의 보석의 주인이야. 내가 왕족이 아니더라도 누구도 날 함부로 대하 지 못해. 그건 페르마 대공왕 역시 마찬가지야." 도현은 피식하고 웃었다. "나도 내 몸 하나 정도는 충분히 지킬 수 있어. 게다가 내가 가고 싶지 않은 건 마음의 문제야, 세피." 세피는 자신이 끝까지 말하지 않으리라 결심했던 사실을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도 현이 조금도 놀란 것 같지 않자 오히려 당황했다. 사람들은 항상 신의 보석의 주인이라는 사실을 알게되면 그녀를 제대로 사람처럼 취급하지 않았었다. 도현의 반응은 그녀에게 있어 하나에서 열까지 모두 신선한 것이었다. "놀라지....않아...?" "내가 놀래야 할 필요가 있는 건가? 네가 비밀을 말했으니까 나도 말해 줄 게." 도현은 싱긋 웃으며 덧붙였다. "나는 빛의 보석의 주인이야." "....아...정말....?!" 세피는 눈을 크게 떴다. "설마.....네가 그...라딘...?" 도현은 정확한 설명을 하기가 힘들 거라는 사실 때문에 그냥 고개를 끄덕여 보였 다. 그리고 속으로 투덜거렸다. 얼마나 소문이 자자하게 났으면 다른 나라에서도 모 르는 사람이 없는 이름인가 하면서. "하지만....실종 됐다고 들었는데.... 공공연한 비밀이지만 널 납치하려고 계획을 세운 것이 첼시피온 왕자여서 제국에 억류되어 있다고...." 그렇게 중얼거리던 세피는 곧 알아차렸다는 표정이 되었다. 그러다가 곧 고개를 갸웃했다. 말 그대로 첼시피온 왕자는 지금 제국에 억류되어 있는데 어째서 가기 싫어하는 지 이해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믿을만한 소식통에 의하면 첼시피온 왕자가 사이드 공국으로 돌아갔다고 했 어." 가장 만나고 싶지 않은 것은 테이드였지만 세피에게 설명하는 것은 첼시피온 왕 자쪽을 만나기 싫다고 설명하는 게 편했기 때문에 도현은 테이드에 대한 말은 꺼 내지 않았다. "그렇구나...." 뭔가 정신없이 갑자기 많은 사실을 알게 됐지만 세피는 도현이 왕성에 가기 싫어 하는 이유를 이해한 듯 했다. "그럼, 이렇게 하자." 갑자기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는 듯이 세피는 미소지으며 입을 열었다. "왕성에 그리 오래 머물 생각은 아니니까 딘은 여기에서 기다리고 있어. 내가 다시 의뢰를 해서 돌아가는 길도 함께 가는 걸로 하는 건 어때? 사실 돌아가는 건 이동 마법을 이용할 생각이었지만, 조금 기간이 늘어나도 난 상관없어." 처음엔 거절할 생각이었지만 기대에 가득찬 세피의 얼굴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매 몰차게 거절을 할 수가 없었다. 도현은 도움을 청하듯이 스위드를 쳐다보았지만 그는 미소만 짓고 있을 뿐, 대답은 도현에게 하라는 듯한 눈짓을 했다. 한참 생각하던 도현은 결국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좋아, 그렇게 할게. 대신 보수는 두둑하게 줘." "물론이지!" 명랑한 얼굴로 되돌아온 세피는 스위드를 재촉해 서둘러 길을 떠났다. 여관에 홀로 남겨진 도현은 창가에 걸터앉아 창문 밖으로 보이는 성도의 풍경을 계속 응시했다. ================================================================= 오늘은 약간 더 길게 썼습니다. ^^;;; 아르바이트가 산처럼 쌓여 있는데 안 하면서 현실도피 중이에요. 이제 글 올리고 나서 열심히 죽도록 아르바이트에 전념을 ;ㅁ; 어둠이 찾아왔다. 오랜만에 돌아온 고국, 그리고 익숙한 왕성은 조금도 달라진 것이 없어 보였다. 그러나 첼시피온의 눈에는 그 광경이 조금 낯설게 보였다. 몸이 아직 회복되지 않았다는 것을 핑계로 첼시피온은 부친과 형제들과 인사만 나누고 방으로 돌아왔다. 깔끔하게 정리된 방은 제도의 그로트 아카데미로 떠나 기 전과 조금도 다름이 없었다. 그러나 사람이 머물지 않았기 때문에 방은 상당 히 차가웠다. 그것은 온도가 아니라 장소가 주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차가워도 낯설어도 이곳이야말로 첼시피온에게는 고향이었고 가장 자연스 러운 모습으로 있을 수 있는 곳이었다. 첼시피온에게 있어 사이드 공국이라는 이 름은 전부였다. 테이드는 내일 있을 페르마 대공왕과의 접견을 천천히 준비하고 있을 것이다. 마 차로 이동하는 동안 첼시피온은 테이드에게 한가지 제안을 했고, 테이드는 그것 을 받아들였다. 사이드 공국에서 어떤 불이익도 당하지 않으며 제국으로 돌아갔을 때, 그의 위치 를 굳건히 할 수 있도록 돕겠다. 그 대신 테이드 역시 첼시피온에게 한 가지 도 움을 약속해야 한다. 그것이 조건이었고 테이드는 그 조건을 받아들였다. 푹신한 의자 위에 앉아서 첼시피온은 엷은 향을 풍기는 차를 따라 마셨다. 따뜻 한 액체가 목구멍을 타고 속으로 들어가자 온 몸의 긴장이 풀리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처음부터 긴장 같은 것은 하고 있지도 않았지만 오랜만에 돌아온 고국에 서 느낀 낯선 기분이 조금씩 사라져가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첼시피온의 귀환 소식 때문에 묻혀 버렸지만 분명 페르마 대공왕의 세 번째 부인 나르핀 왕비의 동생이 찾아왔다는 말을 들었다. 그녀는 몇 년 전 첼시피온과 약혼을 한 관계였으나 신의 보석의 주인이 되고 나서 약혼은 깨졌다. 어느 누구도 신의 보석을 가진 자를 다른 나라로 보낼 생각은 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당연한 일이었고 페르마 대공왕 역시 그것을 받아들였다. 신의 보석은 그 주인이 되는 한 사람만으로는 세계를 바꾸거나 대륙의 지배자가 되게 해 줄 수는 없는 힘이었지만 현재 대륙을 움직이는 다섯 나라에는 모두 신 의 보석의 주인이 존재했다. 암묵적으로 신의 보석을 가진 자를 소유한 나라가 힘을 갖게 되는 것. 그것이 신의 보석이라는 이름이 가진 힘이었다. 그녀, 세피디나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는 센 왕국의 왕녀에게 특별한 감정을 가지 고 있지는 않지만 그래도 그녀와 만나보기는 해야 한다. 첼시피온은 부친과 테이 드와 함께 만남을 가진 후 저녁 식사에 세피디나를 초대하기로 마음먹었다. "딘도 왔으면 좋았을 텐데...." 연한 송아지 고기로 만든 훈제 요리를 삼키고 나서 세피는 아쉽다는 듯이 말했 다. "이곳의 음식은 정말 맛있거든요." "음식이라면 언제든지 먹을 수 있습니다." 스위드는 차분한 태도로 식사했다. 세피는 평소처럼 예의도 차리지 않고 아무렇 게나 먹지는 않았지만 식사 도중에 계속 이야기를 하는 것만은 멈추지 않았다. "그런데 말이에요, 스위드."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지 세피는 주위를 둘러보고 아무도 자신들에게 관심을 가지 고 있지 않다는 것을 확인하자 소근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딘은 어째서 당신과 함께 있는 건가요...? 분명 딘은 라메르 백작가문의 막내 아들이고 그로트 아카데미에 들어갔다는 소문도 들었었는데..." "여러 가지 사정이 있습니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딘의 동의 없이는 말씀 드 릴 수 없습니다." "알겠어요...." 아쉬워하기는 했지만 세피는 억지로 묻지 않았다. "참, 첼시피온 왕자가 오늘 저녁 식사에 초대한다고 연락을 했어요. 무성했던 소문과 달리 제국에서 아무 일도 없었던 모양이에요." 세피는 여자라면 반하지 않을 수 없는 외모를 가진 첼시피온 왕자에게 아무런 감 흥이 없는 것 같았다. 첼시피온이라는 이름을 듣는 순간 스위드는 문득 휘트린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신의 보석의 힘을 봉인할 수 있는 기간은 일년이다. 내 힘으로도 정기적으로 봉인을 계속 하지 않으면 신의 힘을 완전히 억누를 수는 없다. 나는 두 번째 봉 인은 하지 않을 생각이다." "왜 제게 그 이야기를 하는 겁니까?" 스위드는 차갑게 가라앉은 눈으로 어머니를 바라보며 물었다. "신의 보석을 가진 자들은 자연스럽게 모이게 되어있다. 아니, 누가 신의 보석 을 가지고 있는지 모르는 상태라고 해도 자연스럽게 서로에게 끌리지. 신의 보석 이라는 이름으로 그들은 이미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저는 도현이 더 이상 불안해하지 않고 웃을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 외 에 다른 것에 관여할 생각은 없습니다." "하지만 너는 이미 관여하고 있다, 스위드. 넌 황태자의 곁을 떠났고 네가 없 어지면 그가 어떻게 달라질지도 예상하고 있었겠지. 하지만 그래도 넌 망설이지 않았어. 그것이야 말로 네가 나의 피를 이었다는 증거가 된다." 스위드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몸 속에 흐르는 마녀의 피는 오랜 삶을 선사했고, 강력한 힘을 주었지만 그 피가 몸을 흐르고 있는 한 스위드는 휘트린의 구속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리고 신의 보석을 품고 있는 이상 목숨을 끊을 수도 없었다. 언제까지 이어질 지 알 수 없는 시간 속에서 스위드가 택한 것은 마음을 움직이는 사람과 함께 하 겠다는 것. 케이스워크를 선택했을 때 휘트린은 달가워하지는 않았지만 힘으로 스위드를 구 속하려 하지는 않았었다. 어쩌면 아들에게 유예 기간을 준 것인지도 모른다. 휘트 린이 원했다면 그녀는 스위드를 언제까지고 탑 속에 가둬 두었을 것이다. 그리고 두 번째로 선택한 것은 도현이었다. 케이스워크와 다른 종류의 강함을 가 지고 있던 소년은 금방이라도 발끝이 무너져 내릴 듯한 절벽 위에 선 상황에서도 절대로 포기하려 하지 않았다. 그것은 스위드의 마음을 잡아당기는 인력이 되었 다. 어떻게 봐도 불가능한 상황 속에서도 결코 굽히지 않는 마음의 강인함. 케이스워 크가 마음에 걸리지 않는 것은 아니었지만 스위드는 도현의 곁이야 말로 자신이 있어야 할 자리라고 판단했다. 강하지만 또 한없이 약한 소년에게 언제나 미소를 짓게 만들겠다고 결심했고, 그 결심은 2년이 지난 지금에도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그래도 딘이 제가 한 제안을 받아들여서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딘과는 처음 만났을 때부터 좋은 친구가 될 것 같았거든요. 어쩌면 같은 부류라서 끌린 걸지 도 모르지만...그래도 역시 딘은 좋은 녀석이에요." 세피는 정말로 기분 좋은 듯이 미소지었다. 이렇게 순수한 미소를 본 것은 정말 오랜만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스위드 역시 부 드럽게 미소 지었다. "이상하게 딘은 스위드의 곁에 있을 때 정말 편안해 보여요. 마치 가족처럼 모든 것을 맡길 수 있는 상대라는 느낌이랄까..." 여행을 하는 동안만 함께 있었을 뿐인데도 세피는 이미 도현과 스위드가 어떤 관 계인지 파악한 것 같았다. 그것은 신의 보석이 주는 힘 같은 것이 아니라 여자가 가지는 특유의 예감인지도 모른다. "둘이 함께 있게 된 것에도 여러 가지 사정이 있겠지만, 결국 서로 만족한다 면 그걸로 좋은 거겠죠. 나도 누군가 마음을 터놓고 모든 걸 말할 수 있는 상대 가 생겼으면 좋겠어요." 그렇게 말하는 세피의 얼굴은 쓸쓸해 보였다. 신의 보석은 그 주인이 되는 사람 을 인간이 아니게 만든다. 어쩌면 그것은 신이 지상에 남기고 간 축복이 아니라 그림자일지도 몰랐다. 페르마 대공왕은 밝은 갈색 머리카락을 가진 강인한 인상의 소유자였다. 첼시피 온의 부친이니 만큼 어느 정도는 닮았으리라 생각했는데 첼시피온과 그의 외모는 전혀 상반되는 느낌이었다. 40대라는 나이에도 불구하고 10년은 젊어 보이는 힘과 패기가 있어서 그가 항상 몸의 단련을 게을리 하지 않고 움직이기를 좋아하는 왕이라는 소문은 전혀 틀린 것이 없어 보였다. 대륙을 움직이는 다섯 명중에서도 리카도 제국의 황제와 사이 드 공국의 왕이 가장 먼저 손꼽히는 까닭은 그들이 가진 행동력에 있었다. 예의를 차린 인사가 오가고 의례적인 내용으로 말을 주고 받았다. 페르마 대공왕 은 외교에 있어서도 상당히 능숙했다. 케이스워크 역시 부친에게 지지 않을 정도 로 뛰어난 수완가였지만 페르마 대공왕 역시 상당히 까다로운 상대라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테이드는 만약 첼시피온과 미리 거래를 하지 않았다면 지금 이 자리가 상당히 부 담스러웠을 것이라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었다. "대륙이 혼란에 빠지는 것을 바라지 않기 때문에 그 동안 아들이 돌아오지 못 하는 상황이 되었음에도 가만히 있었소. 하지만 시일이 조금만 더 길었다면 나도 계속 앉아 있을 수는 없었겠지." "저는 오히려 여러 가지를 배울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첼시피온은 여유로운 표정으로 답했다. "황제에게 직접 여성의 역할을 배울 수 있었으니까요." 그러나 첼시피온이 덧붙인 말을 듣고 테이드는 장소도 잊고 경악한 얼굴이 될 수 밖에 없었다. 그것은 페르마 대공왕 역시 마찬가지였다. 어떤 상황에서도 여유를 잃지 않을 것 같았던 그의 얼굴은 충격으로 물들어 있었 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얼굴에서 표정을 지우고 첼시피온에게 되물었 다. "그 말이 사실이냐, 첼시피온?" 첼시피온은 흔들림 없는 표정으로 네라고 대답했다. 굴욕적인 상황을 겪었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첼시피온의 표정 은 마치 타인의 소식을 전하는 것처럼 담담하기만 했다. 테이드는 그제서야 처음 으로 첼시피온의 몸 속에 요정의 피가 섞여 있다는 사실을, 그가 완전한 인간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차피 지난 일입니다." 페르마 대공왕은 무거운 표정으로 아들을 응시했다. "하지만 잊을 수는 없습니다." 첼시피온의 표정은 무척이나 온화했지만 눈동자는 반대로 차갑게 굳어져 있었다. "어리거나 모든 것을 계산하고서 한 행동이거나 둘 중의 하나로군." 페르마 대공왕은 턱에 손을 괸 채 중얼거렸다. 평소에도 호리호리한 몸이긴 했지 만 첼시피온이 눈에 띄게 야윈 까닭을 알게 되자 속이 쓰려왔다. 이런 일은 대놓고 밝힐 수도 없고, 이것을 빌미로 전쟁을 일으킬 수도 없다. 케이 스워크는 상당히 교묘한 방법을 선택한 것이다. "테이드 백작님. 백작님은 제국으로 돌아가셔서 이 일을 사실대로 전하시면 됩니다. 더 첨가할 것도 뺄 것도 없습니다." 테이드는 곤혹스러움을 떨치지 못한 채 대답했다. 경멸하는 듯한 표정으로 테이드에게 말을 건넸던 케이스워크의 얼굴이 떠올랐다. 스위드가 사라진 이후 그에게 나타났던 변화. 그리고 테이드가 그에게서 동질감 을 느꼈던 까닭을 이제서야 깨달은 기분이었다. 몸 속에서 어떤 감정이 꿈틀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처음부터 그렇게 했으면 좋았을 거라고. 쓸데없이 위협을 하거나 경멸할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그 몸을 가졌으면 좋았을 거라고. 어차피 그 몸은 테이드의 것이었다. 테이드가 원하지 않으면 죽음조차도 마음대로 선택 할 수 없는 그런 존재였다. 그러다가 기억을 잃고 타인처럼 변해버리지만 않았더라면 테이드는 언젠가 분명 그 몸을 가졌을 것이다. 흐릿하게 가라앉은 눈동자가 아니라 곧게 직시하는 시선으로 응시하며 이별을 선 언했다고 해서 모든 것이 끝난 것은 아니다. 여전히 라딘과 테이드는 형제라는 이름으로 이어져 있었다. "그리고... 백작님. 당신이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도록 돕겠습니다." 첼시피온은 테이드의 마음속에서 일어난 변화를 들여다보기라도 한 것처럼 희미 하게 눈으로 웃었다. 테이드는 그 동안 마음을 덧씌우고 있던 그림자가 완전히 사라졌다는 사실을 깨 달았다. 세상이 조금 다르게 보였다. ======================================================== 첼시피온 커밍아웃 하다 -0-;;; 테이드 자각하다...이런 내용이 되겠습니다. 아르바이트와 글쓰기를 멀티로 진행하면서 해도해도 왜 개수가 안 줄어드는 것 같은지 고민하고 있습니다. 다음편도 빨리 쓸 수 있었으면 좋겠군요;;; 왕족 전용 식당에 앉아 세피와 스위드는 첼시피온을 기다렸다. 그들이 의자에 앉 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첼시피온이 들어섰다. 그는 세피의 옆에 앉아 있는 스위드를 보고 조금 놀란 것 같았지만 금새 그 기색 을 지우고 웃는 얼굴로 세피에게 인사했다. "오랜만입니다. 세피디나 공주." "역시 대륙 제일의 미모로 소문이 자자한 것이 거짓이 아니었네요, 첼시피온 왕자님. 여자로서 조금 질투가 나는데요?" 세피는 여행도중 입고 있던 바지로 된 가벼운 여행복 대신에 몸의 실루엣이 잘 살아나는 엷은 하늘색 드레스를 입고 있었는데, 옷이 바뀐 탓인지 확실히 그녀는 우아한 왕족처럼 보였다. "그쪽 분은 호위입니까?" 첼시피온의 질문에 세피는 엷게 미소지으며 그래요 라고 대답했다. 스위드는 무표정한 얼굴로 살짝 목례만 한 채 자리에 앉아 있었다. "세피디나 공주는 운이 좋았습니다. 마침 제가 귀국했을 때 방문을 하셨으니 까요." 첼시피온의 얼굴은 시선을 뗄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웠고 미소를 떠올린 표정은 환하게 마음을 잡아 끌었지만 세피는 첼시피온의 외모에 전혀 관심이 없는 사람 같았다. "첼시피온 왕자에 대한 여러 가지 불온한 소문이 돌았는데 이렇게 직접 얼굴 을 뵈니 그 말은 거짓이었음을 알겠군요." 첼시피온은 그저 희미하게 웃었다. "심심하다." 도현은 창가에 머리를 기댄 채 비스듬한 자세로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나무나 돌로 지어진 낮은 건물들이 죽 늘어서 있고 그 사이로 여행자 복장을 한 사람들 이나 평상복 차림인 사람들이 쉴 새 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어딜 가도 비슷한 건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록 복장도 다르고 마을 분위 기 자체도 완전히 달랐지만 사람이 살아가는 모습만은 비슷했다. 이제는 외국에 나와서 몇 년을 보낸 것처럼 이 광경에도 조금은 익숙해졌다. 어 떤 때는 아무런 위화감 없이 이 공기를 받아들이지만 또 어떤 때는 지나칠 정도 로 낯선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스위드라는 마음을 열고 기댈 수 있는 존재와 만났고, 절대적인 힘을 가진 휘트 린도 도현에게 많은 것을 해 주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혼자가 되었을 때 느 껴지는 막막함과 가슴이 텅 빈 듯한 감각은 사라지지 않았다. 설마 영원히 돌아갈 수 없는 것은 아닐까. 이곳에서 신의 보석을 가진 자로서 살아가는 것이 남은 인생일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이 머리를 지배했다. 이곳은 금방 돌아갈 수 있는 외국이 아니다. 어디에 어떻게 존재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낯선 세계. 도현을 불러들이고 힘을 주었지만 그래도 이곳은 도현에게 있어서는 낯선 세계 이상은 되지 못했다. 도현은 피식하고 웃었다. 이런 감상에 빠지는 건 나답지 않다고 생각하며. 그러나 도현은 아직 19살이었다. 아직은 부모의 곁에서 보호받아도 좋을 나이. 10대의 마지막이었다. 이런 곳에 오지 않았다면 지금쯤은 대학에 들어갈 준비를 하며 고등학교 마지막 학년을 보내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학교라는 울타리도 그리 나쁘지는 않 은 추억이었다는 사실을 새삼 느낄 수 있었다. 그렇다면 지금 나의 자리에는 누가 있을까. 도현은 지금까지 의식적으로 피해왔던 질문을 떠올렸다. 도현이 이곳에서 살아가 고 있듯이 라딘 라메르라는 이름을 가진 모두에게 저주받은 아이 취급을 당했던 소년이 도현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지도 모른다. 어떻게 생각하면 무척 억울한 일이었다. 아니, 억울하지 않다면 그것은 거짓말일 것이다. 그러나 도현은 라딘을 원망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라딘 역시 어디까지나 알 수 없는 일에 휘말린 피 해자일 테니까. 하지만 단 한가지. 얼굴이 같다고 해서 결코 그 사람이 다른 사람의 인생을 대신 살아줄 수 있는 것은 아니며, 다른 사람이 될 수도 없다는 사실만은 분명했다. 똑똑. 그때 도현의 상념을 깨우기라도 하듯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의자에서 일어나 문을 열자 10대 중반 정도로 보이는 메이드 복장의 소녀가 미소 띈 얼굴로 인사하며 말했다. "손님, 청소를 위해 잠시 방을 비워주시겠습니까?" "아, 그렇게 해요." 도현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문을 나섰다. 그러고 보니 아직 식사도 제대로 하지 않았다. "이 근처에 괜찮은 음식점이 있으면 좀 소개해 주겠어요?" 막 도현을 지나쳐 방으로 들어서던 소녀는 잠시 고개를 갸웃하더니 대답했다. "큰 길로 나가시면 음식점들이 죽 늘어서 있어요. 직접 보시고 고르시는 게 좋지 않을까요?" "고마워요." 도현이 살짝 미소짓고 계단을 내려가자 소녀는 희미하게 얼굴을 붉혔다. 여관을 나서 땅에 발을 디디고 걷기 시작하자 조금 전까지 마음을 복잡하게 만들 었던 고민은 금새 지워져 버렸다. 도현은 느긋하게 주변을 둘러보며 걸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후각을 자극하는 여 러 가지 음식 냄새가 떠돌기 시작했다. 길을 따라 걸어가던 도현은 닭고기를 작게 잘라 야채와 함께 볶은 요리를 파는 음식점으로 들어갔다. 들어가자 마자 도현은 음식을 주문하고는 여유롭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식사시간 을 조금 벗어난 때여서 그런지 식당은 그리 복잡하지는 않았다. 두 세명씩 짝을 지어 들어온 여행자로 보이는 무리와 그냥 마을 주민으로 보이는 무리가 한가롭게 잡담을 나누며 식사를 하는 모습을 도현은 흘긋하고 쳐다 보았 다. 불과 하루 전까지만 하더라도 도현 역시 저들처럼 즐겁게 여행을 하는 분위 기로 식당에서 식사를 했었다. 지금 혼자서 이렇게 돌아 다니는 것이 별로 싫지 는 않았지만 역시 2년 동안 떨어진 적이 없었던 스위드와 잠시나마 떨어져 있는 것이 조금은 아쉬웠다. 이곳에 오고 나서 많은 것이 달라졌지만 역시 가장 많이 달라진 점은 도현이 누 군가에게 의지하는 마음을 품게 되었다는 사실이었다. 예전에는 오직 외국어를 익히고 맡은 일을 하고 그저 앞을 보며 살아가는 것만을 생각했었다. 그러나 지 금은 그런 재능이나 하던 일과는 상관없이 과거를 돌아보며 그리워하고 다시 그 것을 찾길 바라며 살아가고 있었다. 예전의 자신은 충분히 능력도 갖추고 있었고, 사고 방식도 또래와는 다르다고 생 각하며 결코 어리지 않다고 자신하고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깨닫는 것 은 3년 전의 자신 보다는 2년 전의 자신이 훨씬 성숙하고, 2년 전의 자신 보다는 지금의 자신이 훨씬 성숙하다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아직 살아갈 날들은 많이 남아있었다. 어떤 상황에서도 시간이 흐르면 사 람은 조금씩 변화한다. 도현은 앞으로 자신이 얼마만큼 달라질 것인가를 생각하 면 두려운 생각도 들었지만 어떻게 보면 달라져서 다행이라는 기분이 들기도 했 다. 사람은 상황에 맞춰 변화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는 것이 당연하니까. "식사 나왔습니다." 생각에 잠겨 있던 도현은 그 소리를 듣고 정신을 차렸다. 눈앞에 놓인 먹음직스 러워 보이는 요리를 포크로 집어먹었다. 입안에 퍼지는 약간 매콤한 맛이 미각을 자극했다. 음식은 상당히 맛이 있어서 도현은 금방 한 접시를 비워버렸다. 후식으로 과일 주스 한잔을 주문하고 나서 그것을 조금씩 마시며 도현은 분위기 속에 녹아들기 위해 노력했다. 어떤 곳에서든 잘 지내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곳의 언어를 말할 수 있는 가가 아니라 얼마만큼 잘 적응하는가 라는 사실이었다. 어린 나이부터 꽤 많은 나라들을 돌아다니면서 도현이 직접 피부로 느끼고 배운 것이었다. 음료수까지 다 마시고 나자 도현은 음식값을 지불하고 식당을 빠져 나와 대로를 걷기 시작했다. 주위를 스치고 지나가는 사람들의 물결 속에서 도현은 조금씩 안 도감을 되찾았다. 아무도 없을 여관으로는 돌아가고 싶지 않아서 도현은 해가 질 때까지 마을 이곳 저곳을 돌아다녔다. 제국에 비하면 사이드 공국은 작은 나라였지만 수도인 만큼 규모는 상당히 컸고 사람들의 숫자도 많았다. 지는 해를 등 뒤에 진 채 여관을 향해 돌아오던 도현은 어느 순간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그것은 등 뒤를 미세한 바늘로 찌르는 듯한 거슬리는 감각이었다. 아무렇지 않게 계속 걸어가던 도현은 그 감각이 사라지지 않자 걸음을 멈췄다. 그러자 그 느낌이 점점 강해지기 시작했다. 그것은 시선이었다. 도현은 천천히 돌아섰다. 몇 미터 떨어지지 않은 곳에 나타난 것은 낯선 청년이 었다. 간편한 여행자 복장에 허리에는 긴 검을 하나 차고 있었다. 옷도 검도 상당 히 고급스러웠지만 장식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누구...." 도현이 채 말을 끝내기도 전에 청년이 가까이 다가와 말했다. "라딘님이십니까?" 아니라고 대답하려 했지만 순간적으로 표정이 달라져버린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도현은 대답하지 않은 채 가까이 다가온 청년을 바라보았다. 평범한 얼굴이었지 만 그 얼굴에 표정이 떠오르자 분위기가 달라졌다. "이런 곳에서 만나 뵐 줄은 몰랐습니다. 라딘님." "저는 당신을 모릅니다. 그리고 제 이름은 딘입니다."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지만 청년은 그 말을 믿는 것 같지 않았다. "물론 라딘님께서는 저를 알지 못하실 겁니다. 저는 얼마 전 재상이 되신 테 이드 님의 호위대 대장을 맡고 있는 사람입니다. 룬딜이라고 합니다." 정중한 소개에 도현은 아, 그래요? 반갑군요 라고는 대답해 줄 수 없었다. 가슴 한구석이 싸늘하게 식어 가는 느낌이 들었다. 2년만에 타인을 통해 들은 테이드라는 이름. 도현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2년이나 지난 지금에 와서 테이드와 연결된 사람을 의외의 장소에서 우연히 만나 게 될 줄은 몰랐다. 마주치고 싶지 않아서 일부러 세피의 여정에도 참여하지 않 았는데 이래서는 가지 않은 의미가 없었다. "왜 그런 사람이 이곳에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제 갈 길을 가겠습니다." 도현은 그렇게 말하고 나서 등을 돌리려 했다. "지금 저와 함께 가시면 테이드님을 만나실 수 있습니다." 그 말을 듣자 도현은 걸음을 멈춘 채 룬딜이라고 소개한 청년을 바라보았다. "상대방이 원하지 않는 배려는 하는 게 아니야." 화가 나서 반말이 튀어나왔지만 말한 쪽도 듣는 쪽도 개의치 않았다. 아니, 오히 려 룬딜은 라딘이 스스로를 인정했다는 사실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그런 룬딜의 생각과 달리 도현은 진절머리가 나서 굳어진 얼굴로 고개를 흔들었다. 이제 정말 다른 사람이 하는 말은 듣지도 않고 자기가 하고 싶은 말만 하고, 자기 생각대로 멋대로 판단하는 사람은 질색이다. 도현은 입속으로 낮고 빠르게 주문을 읊조렸다. 바닥에 환한 은색의 마법진이 생겨나자 룬딜은 당황해서 손을 뻗었지만 그가 잡 은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아니, 희미하게 손안에서 흩어지는 듯한 환한 빛줄기뿐이었다. ============================================================ 무사히 이사를 마치고 지금은 집정리 70% 진행중입니다. 걱정해 주신 분들 감사 해요 ^^ 양은 적지만 한 편 올립니다. 집 정리가 완전히 끝나면 성실모드로 복귀 예정입 니다. 후훗;; 책 정리하면서 느꼈는데 제가 책을 정말 많이 샀더군요. 여러 종류의 소설책과 자료 책들, 그리고 만화책 수백권;; 박스를 풀어도 풀어도 책이 계속 나와서 정말 내가 생각해도 많군...이라고 말할 수 밖에 없었어요. 저는 이사오기 전에도 이사 온 후에도 계속 책정리만 했습니다. 그럼, 모두 즐거운 하루 보내세요 ^-^ 테이드는 룬딜의 보고를 듣고 아무 말도 없이 의자에 몸을 묻은 채 움직이지 않 았다. 이런 곳에서 갑자기 라딘의 소식을 들을 줄은 몰랐기 때문에 놀란 것은 사실이었 다. 하지만 갑자기 마음이 조급해지거나 섣불리 움직이겠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 다. 단지, 이제 닿을 수 있는 곳에 존재한다는 사실이 안도감을 전달했다. 2년 동안이나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던 라딘을 사이드 공국에서 찾아냈다. 그 것만으로도 큰 수확인 것은 분명했다. 그러나 놀랄 만한 소식은 그것 뿐만이 아니었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온 첼시피 온이 스위드가 이곳에 있다는 말을 한 것이다. 테이드는 그 말을 들은 순간 바로 알 수 있었다. 예전에 헤어질 때 그랬듯이 스 위드와 라딘은 함께 어딘가에 있었던 것이다. 스위드는 황태자의 마법사였으니 충분히 뛰어난 실력을 가지고 있을 것이 분명했고, 그 정도의 실력이라면 다른 사람에게 발견되지 않고 살아가는 것도 어려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잘 된 일입니다. 그 둘의 행방은 중요한 열쇠가 될 수 있습니다." 첼시피온의 말에 테이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스위드는 어디에 있습니까?" "세피디나 공주의 옆방에 머물고 있습니다. 며칠 후에는 다시 센 왕국으로 돌 아간다고 합니다." 스위드는 자신이 현재 무슨 일을 하고 있는 지 밝히지 않았지만 첼시피온은 그 가 마법사 길드에 등록해 의뢰를 받아 여러 가지 일을 하고 있을 것임을 짐작했 다. 간단한 마법을 할 수 있는 마법사의 숫자는 많았지만 실력이 높을수록 그 숫자는 무척 적다. 특히 왕궁에서 일할 수 있을 정도의 실력자는 상당히 드물기 때문에 길드에서 자유롭게 움직이는 마법사들을 받아들이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 었다. 그들이 비밀 보장을 해 달라고 한다면 분명 길드에서는 수단 방법을 동원 해서 그렇게 했을 것이 분명하다. "라딘은 그 동안 스위드에게 마법을 배운 모양이군요. 신의 보석은 능력을 특 화시켜주는 만큼 마법을 쓴다고 해도 이상한 일은 아니겠지요." 룬딜의 보고에 따르면 라딘은 공간 이동 주문으로 사라져 버렸다고 했다. 그것도 거의 들리지도 않을 정도로 빠르게 주문을 외우고 사라져 버렸다고 했으니 실력 이 상당할 것이라는 사실은 분명했다. 불과 2년만에 그 정도의 실력이 된다는 것은 일반적인 마법사 지망생이라면 불가 능하지만 신의 보석을 가진 자라면 다르다. "이제 어디에 있는 지 알았으니 만나는 것도 그렇게 어려운 일만은 아닙니다. 분명 라딘은 만남을 피하려고 하겠지만 방법을 찾아보면 분명 해결책이 있을 것 입니다." 첼시피온은 담담하게 말했다. 테이드는 지금 당장 라딘을 만나기 보다는 제대로 계획을 세워 다시 데려오는 것이 최선이라고 여겼다. "확실하게 되돌아오게 만들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물론입니다. 저는 저의 목적을 위해서 백작님은 백작님의 목적을 위해서 함 께 움직이는 겁니다." 첼시피온은 그렇게 말하고 나서 잠시 생각에 잠겼다. 라딘이 이년이라는 시간 동안 그렇게 발전했을 줄은 몰랐다. 물론 첼시피온과 마 지막으로 만났을 때만 하더라도 분명 특별하다고 생각을 하기는 했지만 정말 놀 라울 정도로 발전한 것이다. 확실히 관심을 갖을만한 존재였던 것이다. 라딘 라메 르라는 소년은. 자신이 다른 세계에서 왔으며 돌아갈 방법을 찾겠다고 외치던. 그리고 첼시피온 의 거짓말 때문에 강하게 노려보는 눈동자로 거절의 뜻을 전달했던 라딘. 첼시피온은 언젠가 라딘을 다시 만나면 아무렇지 않게 예전처럼 웃어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첼시피온이 케이스워크에게 감금 당하게 된 원인은 라딘이었지만 그 것은 어디까지나 구실이었음을 잘 알고 있었다. 케이스워크는 단지 마음을 쏟아 부을 누군가가 필요했던 것뿐이다. 지난 일년은 다른 것에 주의를 돌릴 수 없을 정도로 시달림을 당했지만 그래도 지금의 첼시피온은 자유로웠고 과거의 일은 조금씩 지워져가고 있었다. 완전히 잊는 것은 불가능 하지만 첼시피온은 앞으로는 계속 자유로울 것이고 잠시나마 자신의 자유를 구속했던 존재를 용서할 마음은 없었다. 누군가에게 이런 마음을 품은 것은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케이스워크. 그 이름을 첼시피온은 가슴속에 깊이 새겨 넣었다. "젠장!" 도현은 여관 방으로 돌아와 침대 시트를 주먹으로 내려치며 낮은 소리로 외쳤다. 그런 곳에서 테이드의 이름을 듣게 될 줄이야. 비록 직접 만난 것은 아니지만 테 이드에게 자신의 존재가 알려졌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자 도현은 마음이 무척이나 복잡해졌다. 오늘 만큼 마법을 배워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던 적은 없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분명 그대로 끌려가서 테이드와 만났을 것이다. 예전에 처음 이곳에 오게 된 후 무력하게 보내야 했던 그 때 처럼. 도현은 언어를 익히는 재능 이외에 다른 힘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물론, 언어를 빠르게 익히고 이해하는 재능이라는 것은 살아가는 데 아주 중요하다. 도현 역시 금방 언어를 익힌 덕분에 의사 전달을 할 수 있었고 여러 가지를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 만으로는 저택에서 빠져나갈 수도 없었고, 억지로 신의 보석을 손에 얻게 되었을 때도 도망칠 방법 조차 없었다. 단지 목이 터져라 나는 라딘이 아니 라고 외치는 것 이외에 도현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도현은 충분히 자신의 힘으로 어떤 일을 해결할 만한 능력이 있었고, 그때 보다 도 충분히 강해졌다. 하지만 테이드에게 알려졌다는 사실 만으로, 어떤 식으로건 다시 그와 연결되었 다는 사실 만으로 이렇게나 걷잡을 수 없이 흔들리는 마음은 어떻게 할 수가 없 었다. 하필이면 테이드가 기현 형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지독할 정도로 냉정했기 때문에, 도현의 가슴에 상처를 남겼기 때문에 오히려 깊이 새겨져 버렸 다. 테이드를 마음속에서 완전히 지워버릴 수 없는 것은 아무리 다른 사람이라고 해 도 그의 외모가 형과 같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사람이 얼마나 외모에 많은 구애 를 받은 존재인지 도현은 절실히 깨닫고 있었다. 그냥 속시원히 다른 사람이라고 인정하고 지워버리면 아무런 문제가 없을 텐데 마음은 도현의 생각을 배반했다. "차라리 그냥 형이라고 생각해 버릴까...." 도현은 중얼거렸지만 그것은 인정할 수 없는 일이다. 만약 테이드를 형으로 받아 들여 버린다면 도현은 이 세계를 완전히 받아들인 것이 되고 현실 세계의 형을 버리는 것이 된다. 그것만은 할 수 없었다. 비록 평생 그곳으로는 되돌아 갈 수 없다고 해도 마음속 에서 도현의 고향은 언제나 그곳이며 가족은 그곳의 가족들뿐이라는 사실만은 달 라지지 않을 테니까. 비록 절망 속에서도 인간은 한줄기 작은 희망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희망이 없으면 그것은 살아있는 인간이 아니다. 계속 망연자실한 얼굴로 괴로워하던 도현은 바닥에 주저앉은 채로 침대에 머리를 기댔다. ".......스위드." 온화한 시선과 단정한 얼굴이 그리워졌다. 걷잡을 수 없이 무너져 내리는 마음을 붙잡아 줄 수 있고, 도현이 기댈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인 스위드. 그는 이곳에 속한 사람이지만 또한, 속하지 않은 사람이기도 하다. 그렇기 때문에 진심으로 그를 믿고 의지할 수 있었다. "빨리 돌아와....." 당장이라도 마법으로 연락을 취해 스위드에게 돌아오라고 하고 싶었지만 그것만 은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도현은 그저 혼자 스위드를 그리워하며 계속 주저 앉은 채 움직이지 않았다. "도현아." 다정한 목소리가 귓가에 울리며 따뜻한 손이 어깨를 감쌌다. "이런 곳에서 자면 어떻게 해. 감기 들겠다." 한참 번역을 하다가 책상에 엎드려서 잠이든 모양이었다. 밤 늦게 퇴근을 하고 집으로 돌아와 도현의 방문을 살짝 열었던 기현은 책상 위에 엎드린 채 잠이 든 어린 동생을 흔들어 깨웠다. "아....형..." 도현은 눈을 비비며 흐릿한 시선으로 형의 얼굴을 올려다 보았다. 선이 뚜렷한 남자답게 잘 생긴 얼굴. 갑자기 형의 얼굴이 너무나 그립게 느껴져서 도현은 잠 시 움직이지 않고 기현을 쳐다보고 있었다. "뭘 그렇게 봐? 자, 일어나서 침대에 가서 자. 일은 다 한 모양이네." "형..... 뭔가 상당히 긴 꿈을 꾼 것 같아. 나도 이제 달라질 수 있어." 몽롱하게 중얼거리는 도현의 얼굴을 기현은 슬픈 듯한 표정으로 내려다 보았다. "도현아." "응?" 이제 조금씩 뚜렷해진 시선으로 형을 올려다 보자 기현의 얼굴이 상당히 씁쓸해 보인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꿈이 아니야." "응?" 도현이 조금 멍청하게 되묻자 기현은 다시 한 번 대답했다. "그건 꿈이 아니야, 도현아." "현실이지." 그리고 이어진 대답은 기현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깜짝 놀란 도현이 고개를 돌리자 익숙했던 도현의 방은 책상 근처까지만 확실한 형태를 취하고 있었고 그 주변은 모두 어둠이었다. 그리고 그 건너편에 밝은 빛 의 문을 열고서 말하고 있는 것은. "스...위드..?" 도현이 입술을 달싹이자 스위드는 미소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쪽으로 와. 네가 있어야 할 곳은 여기야." 도현은 그 말에 이끌리듯 환한 빛이 비치는 쪽으로 걸어갔다. 걸어가면서 뒤를 돌아보자 굳어진 듯 제자리에 멈춰선 기현이 슬픈 눈동자로 멀어져 가는 도현의 뒷모습을 배웅하고 있었다. 점점 빛이 가까워지고 스위드의 모습도 선명해졌다. 도현은 스위드가 내민 손을 잡았다. 그 순간 온기가 손끝을 타고 전해지며 주변의 어둠이 일시에 밝은 빛으로 바뀌었 다. 천천히 눈을 깜빡이자 사방은 이미 환한 낮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침대 옆에 앉 아 있는 것은 희미하게 미소를 떠올리고 있는 스위드였다. "스위드.....언제 왔어...?" 아직 멍한 기색이 가시지 않은 목소리로 묻자 스위드는 방금 전이라고 대답했다. "아직 날짜가 더 남은 거 아니었어?" 그렇게 묻자 스위드는 미소지었다. "네가 부르는 것 같아서." 뭔가 꿈을 꾼 것 같기는 했지만 제대로 기억나지는 않았다. 그냥 어렴풋한 이미 지만이 남아 있을 뿐. 그러나 그것도 얼마 지나지 않아 지워져 버렸다. 단지 도현이 느낀 것은 긴 터널을 빠져 나온 것 같다는 기분. "할 말이 많았는데 조금 있다가 할래." 스위드는 고개를 끄덕이며 도현을 침대에 편안하게 눕혀 주었다. 이제는 정말 안도감에 휩싸인 채 도현은 깊은 수면 속으로 빠져들어갔다. =============================================================== 이번 파트 끝났습니다. 다음주까지 못 올리나 했지만 열심히 썼어요. 다음주 중으로 복귀를 목표로 노력 하고 있습니다. 요즘에는 정말 정상적인 생활을 하고 있어서 스스로도 놀라고 있 습니다. 앞으로는 아침에 글을 쓰는 생활을 하게 될지도?! 모두 즐거운 주말 보내세요~ Part 4. 그림자 눈을 떴을 때 시야에 들어온 것은 아스라한 빛이었다. 아직 이른 새벽의 빛이 창문 사이로 넘어 들어와 방 안을 어렴풋하게 비추고 있 었다. 가만히 눈을 뜬 채로 그 빛에 시선을 빼앗기고 있던 도현은 문득 홀린 듯 이 침대에서 일어나 창문을 열었다. 조금은 차가운 온기가 피부에 맞닿아 한번에 잠을 깨워버렸다. 새로운 보금자리가 된 센 왕국의 저택으로 돌아온 지 일주일.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시간은 흘러가고 단조롭게 느껴질 정도로 평화로운 하루가 흘러가고 있었 다. 세피는 여행이 끝나고 다시 무사히 그녀의 집으로 되돌아갔다. 도현이나 스위드 와 헤어지는 것을 무척 아쉬워했지만 그래도 그녀는 자신의 입장을 잘 알고 있었 고 함부로 예정에 없는 행동을 하지는 않았다. 가끔씩 놀러오겠다는 세피의 말에 도현은 웃으며 환영의 뜻을 전했고 스위드 역시 그녀의 방문을 환영하겠다고 말 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런 식으로 친구가 하나 둘씩 생겨나고 이제 이곳에서의 생활 도 일상적으로 바뀌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도현은 문득 깨달았다. 도현은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생각했다. 아직 방법도 찾지 못한 원래 세상으로 돌아가는 일 만을 생각하고 그것에만 매달리며 사는 것이 당연한 일인 지, 아니면 지금 살고 있는 시간에 현재에 충실해서 최선을 다하며 사는 것이 당 연한 일일지. 스무 살의 문턱에 서서 도현은 자신이 많이 변했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깨달았 다. 이곳에 와서 처음에는 좋은 경험 따위는 조금도 하지 못했지만 적어도 지금 은 웃을 수 있을 정도로 달라졌다. 그리고 그것으로 좋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큰 행운이나 요행이 아니라 작고 소소한 행복일 테니까. 도현은 그렇게 생각하자마자 옷을 갈아입고 로브를 걸치고 나서 스위드의 방으로 향했다. 이른 아침이었지만 분명 스위드는 깨어있을 것이 분명했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생각했던 대로 스위드는 의자에 앉아 책장을 넘기고 있었다. 분명 젊은 얼굴임에도 불구하고 조용히 책장을 넘기고 있는 스위드의 모습을 볼 때마다 도현은 그의 두 어깨에 내려앉은 거대한 세월의 무게를 보는 것 같은 느 낌을 받았다. "스위드." 도현이 스위드의 이름을 부르자 그는 그제서야 천천히 책에서 시선을 떼고 고개 를 들었다. 스위드는 대답하지 않은 채 시선으로 도현의 말을 재촉하듯이 쳐다보 았다. "친구들을 만나러 다녀올게." "그래." 스위드는 누구를 만나러 가는지, 언제 돌아올 것인지, 어디로 가는지 하나도 묻지 않았다. 그것은 도현을 신뢰하고 있고 도현이 가진 실력을 잘 알기 때문에 보여줄 수 있 는 태도였다. "그럼, 다녀올게." 도현이 즐거운 듯한 표정으로 문 밖으로 나가자 스위드는 작게 한숨을 쉬며 무릎 위에 놓여 있던 책을 덮어 버렸다. 세피와 함께 사이드 공국에 다녀온 기간 동안 도현은 많이 불안해하고 또 많이 즐거워했다. 낯선 세상에서 온 소년은 다른 사람들이 그 자신의 존재를 의심하지 않아도 스스로가 이방인이라는 사실에 괴로워하고 계속 돌아가고 싶어했다. 그러나 그렇게 손에 닿을 수 없는 것만을 바라며 사는 것은 절망만을 안겨주는 일일 뿐이다. 스위드는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소년에게 아 무렇지 않게 방법이 없으니 이곳에서 살아가라 라는 말을 할 수는 없었다. 희망조차 없다면 도현의 얼굴에 미소가 피어나는 날은 오지 않았을 것이라는 사 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도현이 마법을 사용해 저택에서 사라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저택에 방문자가 찾 아왔다.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입구로 나간 스위드는 낯익은 얼굴을 보고 그에게 자리를 권했다. 의외라는 표정으로 스위드를 바라보는 남자에게 스위드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차를 건넸다. 스위드가 자신 몫으로 준비한 차를 반 정도 마실 때까지도 남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자리에 앉아있기만 했다. 그러다가 스위드가 테이블 위 에 찻잔을 내려놓자 남자는 그제서야 입을 열었다. "부탁하고 싶은 일이 있어서 찾아왔습니다." "제가 수행할 수 있는 일이라면 의뢰를 받아드립니다." 담담한 스위드의 대답에 다시 시선을 준 남자는 다시 말을 꺼냈다. "동생을 찾고 있습니다. 라딘 라메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으며 올해로 19살 입니다." 스위드는 엷은 미소를 떠올리며 눈앞의 남자. 테이드를 바라보았다. 이 남자가 무슨 의도로 이곳을 찾았는지는 명백했다. "그 분의 일은 저도 예전부터 조금 관심이 있어서 조사해본 적이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라딘 라메르라는 사람은 이곳에는 존재하고 있지 않습니다. 어떤 마 법의 힘으로도 신의 힘으로도 닿을 수 없는 그런 곳에 머물고 있으리라 여겨집니 다." 테이드의 표정이 기묘하게 변했다. "죄송하지만 이 의뢰는 받을 수 없습니다." 스위드의 대답에 테이드는 표정을 굳혔다. 케이스워크의 곁에 있던 스위드는 지 금 처럼 이렇게 강한 존재감을 가지고 있지 않았었다. 그때의 스위드는 그저 그 림자처럼 조용히 케이스워크를 보좌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따로 스위드와 만나게 되자 스위드쪽이 오히려 케이스워크 보다도 존재감이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결코 만만하지 않을 것 같다는 확신이 뇌리를 스쳤다. "부하를 통해 이곳에 라딘이 있다는 보고를 받았습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사 이드 공국에서 직접 만났다고 하더군요." 스위드는 입가에 미소를 떠올린 채 테이드를 바라보았다. "다른 사람과 착각한 모양입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이곳에, 아니 이 세상에 라딘 라메르는 없습니다." "말장난을 하기 위해 이곳에 온 것이 아닙니다." 테이드의 표정의 굳어지자 스위드 역시 얼굴에 떠올랐던 미소를 지워버렸다. "사람들은 단지 눈에 보이는 것만 믿고 정작 진실을 보려고 하지도 않고 믿으 려 하지도 않습니다. 테이드 백작님. 직접 자신의 마음에 물은 적이 있습니까? 정 말 2년 전 당신의 앞에 있던 소년이 당신의 동생이었는지, 단지 외모가 같기 때 문에 그렇다고 생각한 것은 아닌지 진지하게 스스로에 물었던 적이 있습니까?" "라딘이 했던 말을 반복하려는 것이라면 듣고 싶지 않습니다. 다른 세상이 있 다는 말 따위는 믿지도 않으니까요." 완고한 테이드의 부정에도 불구하고 스위드는 여유로웠다. "그럼 다른 질문을 하도록 하지요. 당신은 왜 동생에게 집착합니까? 라메르 백작가를 몰락으로 몰고 간 장본인이 사라졌다는 사실에 오히려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는 것이 옳지 않았을까요? 단지 신의 보석을 얻게 되었다는 사실 때문에 당 신의 마음이 달라졌을 리는 없습니다." 테이드는 피식하고 웃었다. "형이 동생을 생각하는 것에 이유가 필요합니까? 그리고 당신과는 상관이 없 는 일입니다. 스위드." "아니요, 상관이 있습니다." 스위드는 눈가를 휘며 소리 없이 웃었다. "라딘 라메르에게 마법을 걸어 황가의 핏줄을 이은 흔적이 드러나지 않도록 만든 것은 바로 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가 라딘 라메르를 알아보지 못할 리 가 없습니다. 당신이 찾는 상대가 진짜 라딘 라메르라면 제가 걸었던 마법의 흔 적이 남아있지 않을 리가 없습니다." 테이드는 상당히 놀란 것 같았다. 굳어진 듯한 표정으로 눈도 깜빡이지 못한 채 테이드는 한 동안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단지 라딘을 찾기 위해 이곳에 왔을 뿐인데 기대로 하지 않았고 예상도 하지 못한 말을 듣게 된 것이다. "아직 당신이 어린 아이였을 무렵, 라딘 라메르가 태어나기도 전에 저는 당신 을 본 적이 있습니다. 당신 역시 저를 보았을 수도 있습니다. 저는 그때부터 계속 이 모습이었으니까요." 테이드의 눈이 조금 더 커졌다. "지금 당신이 동생이라고 생각하는 소년에게는 제가 걸었던 마법의 흔적이 남 아있지 않습니다. 만약 그가 진짜 라딘 라메르라면 그 소년은 분명 지금 황제와 같은 색의 눈을 가졌겠지요. 제가 그 소년을 돌보는 것은 약간의 책임감도 포함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 제 앞에 라딘 라메르가 있다면 사과의 말을 건네야 겠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한 사람의 일생을 뒤바뀌게 만든 원인은 제가 제공한 것이니 말입니다." 테이드는 충격 때문에 아무 말도 못한 채 테이블 위로 시선을 떨구었다. 미미하 게 손이 떨리고 있었다. 스위드의 말은 마치 지금까지 진실이라고 단단하게 믿어왔던 테이드의 사고 전체 를 부정하는 것과 같았다. 지금까지 테이드는 가문이 몰락한 이유가 단지 라딘이 검은 머리카락에 검은 눈동자를 가지고 태어났기 때문이라고 믿어왔다. 그런데 그것이 모두 한 사람의 힘에 의해 조작된 것이었다니. 그렇다면 전대 황제도 그리고 지금 황제가 된 케이스워크 역시도 그 사실을 모두 알고 있었다는 말이 된다. 아니, 케이스워크는 당연히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럼 에도 불구하고 그는 테이드를 재상으로 임명했고 옆에 두고 있었다. 19년 동안 라메르 백작가를 지켜보면서 분명 비웃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테이 드를 보면서도 분명 진실도 알지 못한 채 살아가는 모습을 보고 그 어리석음을 비웃었을 것이다. 결국 평생동안 황가에 농락 당한 것이다. 그리고 지금도. "그래도 당신의 마음이 진심이라고 생각한다면 다시 한번 동생의 행방을 찾는 의뢰를 하셔도 좋습니다. 이번에는 동생이 아닌 동생의 자리에 들어와 있었을 뿐 인 소년을 찾는 의뢰게 되겠지만 말입니다." 테이드는 스위드의 말을 제대로 듣지 못했다. 이곳에 올 때까지만 해도 라딘을 만나서 직접 데려가겠다고 생각했고 마법을 배 운 라딘이 그것을 거부한다고 해도 절대로 놓치지 않으리라고 다짐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테이드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라딘이 아니라 스위드였고, 감춰 져 있던 진실이었다. 그 동안 아무 것도 알지 못한 채 라딘을 원망하고 가문을 일으켜 세우기 위해 보 내왔던 오랜 시간이 순식간에 부서져 내렸다. 온 몸에서 힘이 쭉 빠져나간 것 같은 느낌에 테이드는 고개도 들지 못한 채 움직 이지 않았다. "내가 이런 이야기를 당신에게 하는 이유는 나 역시 이제 케이스워크의 그림 자에서 벗어났기 때문입니다. 그는 나에게 자유를 주었지만 그것은 결코 자유는 아니었습니다. 나에게 진정한 자유를 준 것은 그가 아니라 당신의 동생과 같은 얼굴을 한 소년이었습니다. 이 세상에 유일하게 나와 같은 이방인인 그 소년 뿐 이었습니다." 조용하게 이어진 스위드의 목소리는 테이드의 귓가에 선명하게 파고 들었지만 테 이드는 그 말을 제대로 받아들일 여력이 없었다. 스위드 역시 그 사실을 알고 있 었지만 그래도 말하는 것을 멈추지는 않았다. "오랫동안 세상을 살다보면, 그리고 앞으로도 그 시간이 언제까지 이어질 지 알 수 없을 만큼 길게 남아있다면 다른 사람이 악이라고 생각하는 일도 아무렇지 않게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살아가는 것 자체의 외로움 때문에 비틀린 집착을 가 지게 되기도 합니다. 그 깊이는 보통 인간들로서는 상상할 수조차 없을 만큼 깊 습니다." 스위드는 시선을 창 밖으로 돌렸다. 스위드의 시선에는 창 밖의 한산한 풍경이 비치고 있었지만 마음 속에 떠오른 것 은 휘트린의 얼굴이었다. 증오하지만 결코 떠날 수 없는 그리고 벗어날 수 없는 절대적인 존재. 그녀는 스 위드에게 집착하는 것으로 오랜 시간을 견디고 있었다. 그리고 스위드는 누군가 를 돌보는 것으로, 그 누군가에게 필요한 존재가 되는 것으로 시간을 견뎌내고 있다. ================================================================= 음...더 쓰려다가 이 다음 이야기는 쌍둥이가 등장하므로 다음 편으로 건너뛰기로 했습니다. ^^ 이제 가능하면 성실하게 연재를 하려고 해요. 몸이 좀 안 좋았는데 푹 쉬고 났더니 나아진 것 같기도 합니다. 모두 즐거운 한 주를 시작하시기 바래요 ^0^ 아카데미의 수업을 마치고 먼저 기숙사 방으로 돌아온 것은 카드리였다. 리올과 카드리는 대부분의 수업을 같이 듣지만 카드리쪽은 파괴적인 마법에 더 강했고, 리올은 섬세한 조정을 필요로 하는 마법에 더 뛰어났다. 덕분에 수업이 끝난 후 리올은 가끔씩 교수들에게 불려가거나 선배들과 함께 마법에 대한 토론을 위해 시간을 쓰는 경우가 있었다. 카드리의 경우에는 후배들을 위한 실습에 불려나가 파괴적인 마법을 시연해 주는 경우가 있었지만 오늘은 그런 요청이 없었기 때문 에 카드리는 수업이 끝나자 마자 기숙사로 되돌아왔다. 5학년이 되었기 때문에 기숙사 방은 층수를 옮겨 5층이 되어 있었다. 깔끔한 문에 손을 대 밀면서 방 안으로 들어섰을 때 카드리는 순간적으로 위화감 을 느꼈다. 그것은 카드리가 마법사이기 때문에 느낄 수 있는 아주 미묘한 변화 였다. 카드리는 긴장하며 금방이라도 마법을 쓸 수 있도록 단단히 준비했다. 그러나 잔뜩 긴장한 채로 침실 문을 연 순간 카드리는 맥이 탁 풀려서 헛웃음을 지을 수 밖에 없었다. 기가 막혀서 소리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카드리는 한참 동안 문에 기댄 자세로 침대에 누워서 속 편하게 잠들어 있는 친 구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내가 제발 연락은 하고 나타나 달라고 부탁한 것 같은데, 다 잊은 거겠지....." 카드리는 중얼거리며 한숨을 쉬었다. 거울을 통한 마법으로 연락만 취해오다가 2년만에 실제로 다시 보게 된 친구의 얼굴은 확실히 처음 만났을 때와는 많이 달라져 있었다. 조금 더 갸름해진 얼굴 선이나 여전히 흰 피부. 어깨를 덮을 정도로 길어진 머리카락. 그리고 잠들어 있어서 그런지는 모르지만 표정도 달랐다. 한참 동안이나 카드리는 잠든 도현의 얼굴을 관찰하며 움직이지 않았다. 그렇게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거기 서서 뭐해?" 뒤쪽에서 리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침실 문을 열어놓고 기댄 채로 움직이지 않고 있는 카드리에게 다가오며 리올은 의아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언제....온 거야?" 침실 입구로 다가온 리올은 카드리가 그렇게 서 있는 이유를 알아차렸다. 그리고 리올의 표정 역시 카드리와 비슷하게 변했다. "나도 몰라. 문을 여니까 이러고 있었어." "연락이라도 미리 왔었으면 놀라지 않았을 텐데....." "깨워서 물어 보자. 친구를 보러 왔으면 친구를 봐야지 왜 자고있는 거야...?" 카드리는 중얼거리며 침대로 다가갔다. 세상모르고 잠든 도현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몇 번 흔들자 눈꺼풀이 희미하게 열 렸다. "일어나, 대체 왜 여기서 자고 있는 거야?" 카드리가 심통 맞게 묻자 도현은 잠에 취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카드리....?" "그래, 너 여기에 자러 왔어?" "아침에 왔더니 아무도 없어서....기다리고 있었는데 잠이 들었나봐." "그런 것 치곤 너무 본격적인 거 아니야? 침대에서 곤하게 잠들었던 걸 보니 작정했다고 밖에는 볼 수 없잖아." "카드리, 그만 해. 도현도 일어나서 이리로 나와." 카드리가 본격적으로 입 싸움을 시작하려 하자 리올이 나서서 사태를 수습했다. 도현은 나른하게 침대에서 일어나 거실로 나왔다. 리올이 의자를 하나 더 준비해 테이블 옆에 놓아두고 자리에 앉자 카드리와 도현도 각자 의자에 앉았다. "반가워." 그리고 나서 리올은 도현을 정면으로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도현은 조금 무안해 졌다. 그것은 친구에게 그런식으로 진심이 와 닿는 말을 들 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마법으로 연락을 취하긴 했지만 실제로 만나는 것 은 2년만이었고 쌍둥이들의 분위기는 상당히 많이 달라져있었다. 기본적인 성격 은 달라지지 않은 것 같았지만 외모는 확실히 변했다. 카드리 조차도 상당히 분위기가 있어 보여서 도현은 솔직히 놀라고 있었다. "그건 그렇고 앞으로는 자주 만날 수 있는 거야?" "응." "그건 다행이로군." 여전히 뾰루퉁한 표정으로 카드리가 대답하자 리올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웃었 고 도현 역시 입가에 절로 미소가 피어 올랐다. 친한 친구와 함께 있을 때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편안한 공기를 맛 본 것이 대체 얼마 만인지 기억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렇게 쌍둥이와 한 자리에 있게 되자 그 것이 너무 자연스럽게 느껴져서 오히려 이상할 정도였다. "널 만나면 가장 먼저 마법을 시험해 보려고 했는데, 이 자리에선 좀 곤란하 잖아." 섭섭한 듯이 말을 꺼낸 카드리를 보며 도현은 가볍게 웃고는 빠르게 입안에서 주 문을 읊조렸다. 도현의 목소리를 듣고 쌍둥이의 눈이 커진 것도 잠시. 테이블 위 에 선명한 마법진이 새겨졌다. 그것은 작지만 정교하고 섬세한 마법의 구현이었다. 마법진이 무엇을 위한 것인 지 알아본 둘은 한동안 굳어져 있었다. "억울해!" 그러다가 카드리가 거의 도현을 노려보다시피 하며 외쳤다. 도현이 가만히 웃고 만 있자 카드리는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나에게도 신의 보석을 달란 말이야. 이런 건 애초에 비교가 안 되잖아!" "몸을 지키는 데 치유 마법은 별 효과가 없어." 도현이 담담하게 말하자 그제서야 카드리는 흥분을 조금 가라앉히고 의자에 앉았 다. "그나저나 굉장한데, 2년만에 이 정도로 정교한 마법을 구사하게 되다니...." "스위드와 휘트린 덕분이야." "휘트린.....?" 리올이 묻자 도현은 그녀에 대해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고민하다가 간단하게 대 답했다. "스위드의 어머니야." "하지만 정말 의외야. 스위드가 황제의 곁을 떠난 것도 그렇고 너와 사이가 좋아진 것도 말이야." 카드리의 말에 도현은 작게 웃었다. 인생의 우연이나 아이러니를 도현은 짧은 시간동안 너무나 많이 겪었다. 이제는 외계인이 이곳에 찾아와서 다른 행성으로 가자고 말한다고 해도 놀라지 않을 것 같았다. "스위드는 내가 이곳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데 많은 도움을 줬어." "네 표정이 많이 부드러워졌어. 그건 네가 그 만큼 많은 것을 받아들이게 되 었다는 뜻이겠지?" 리올의 말에 도현은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얼마 전에는 새로운 친구도 사귀게 되었어. 나처럼 신의 보석을 가진 활발한 아가씨지." 재촉하는 듯한 카드리의 눈빛 때문에 도현은 세피에 대한 일을 간략하게 이야기 해 주었다. 세피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자 그 동안 어떤 식으로 지내왔는지에 대 한 설명도 해야했기 때문에 도현은 꽤 오래 여러 가지 이야기를 했다. 쌍둥이는 걱정도 해주고 감탄도 하면서 도현의 이야기를 열심히 들어주었다. "얼마 전에는 사이드 공국에서 우연히 테이드의 호위를 만났어. 너희들의 말 을 듣고 일부러 왕성에는 가지도 않았는데, 우연이란 건 정말 피하려 한다고 피 할 수 있는 건 아니었어." "하지만 넌 테이드 백작님을 어떻게 생각하는데?" 카드리는 이상하다는 듯이 질문했다. "엄격하게 말하면 진짜 피가 이어진 네 형은 아닌거잖아. 네가 살았다던 세상 에 대한 이야기를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네가 라딘 라메르가 아니고 백작가와 관련이 없다는 건 믿어. 하지만 이상하잖아. 정말 관련이 없다면 일부러 피할 이유도 없고 신경 쓸 이유도 없는 거 아니야?" 카드리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이란 그렇게 쉽게 단호하게 잘 라낼 수는 없는 것이다. "나도 스스로에게 묻고 싶어. 단지 얼굴이 같으니까 형이라는 생각을 지우지 못하는 건 아니냐고 말이야." 도현은 잠시 말을 끊었다가 다시 말했다. "얼마 전까지 미련 때문에 구애받았다면 지금은 조금 다른 것 같아...." 그렇게 말하고 나서야 도현은 테이드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조금은 알 것 같기도 했다. 테이드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것은 마치 테이드가 도현을 라딘이라 고 생각하고 집착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단지 얼굴 때문이라면 완전히 다른 사 람이라는 것을 알게된 그 순간에 미련 따윈 버렸어야 옳았다. 도현은 처음 테이드를 만났던 때의 기억을 되살렸다.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기 현과는 완전히 다른 차가운 말투도 아니었고 표정도 아니었다. 차갑게 가라앉은 찌르는 듯한 시선. 그 선명한 녹색 눈동자가 떠올랐다. 도현이 입을 다문 채 생각에 잠기자 리올은 눈빛으로 카드리를 나무랐다. "무거운 생각은 접어두고 앞으로 우리가 어떻게 만날 것인지에 대해 이야기하 자. 그리고 너도 궁금한 것이 있으면 물어봐. 아무래도 여러 가지 소식을 접하지 는 못했을 테니까." "아...응." 도현은 생각을 접어두고 다시 대화에 동참했다. 카드리는 도현에게 앞으로는 아무 연락없이 찾아오지 말라고 당부하면서 이쪽에 서 연락을 취할 방법을 알려달라고 강요했다. 도현은 결국 쌍둥이에게 거울 마법 을 가르쳐주었다. "이제 나도 너한테 연락 할 테니까 기대하고 있어." 금새 의기양양해진 카드리를 보며 도현은 피식거리고 웃었다. 한참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중에 카드리가 갑자기 진지해진 표정으로 도현 을 바라보며 물었다. "이 질문은 꼭 하고 싶었어. 네가 다른 세계에서 왔다는 사실을 내 마음 속에 서 인정하게 된 이후부터." "뭔데?" 도현 역시 카드리 처럼 진지한 표정이 되었다. "만약 돌아갈 수 있는 방법을 찾는 다면 넌 돌아갈 거야?" 예전이었다면 생각할 필요도 없이 그렇다라고 대답했겠지만 지금 도현은 조금 망 설였다. 그러나 대답은 같았다. "돌아갈 거야. 방법이 있다면...." "그렇구나." 카드리는 그냥 웃었다. 리올은 조금 복잡한 얼굴이었다. 도현의 기분이나 카드리의 기분을 모두 알고 있 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아직 어떻게 될 것이라고 확정된 미래는 없었다. "중요한 건, 현재에 충실하게 사는 거야." "리올, 너 현자같이 말하지 마." 조금 가라앉았던 분위기는 카드리가 다시 심통 맞은 말을 하는 바람에 평소처럼 되돌아왔다. 그러나 세 사람의 마음 속에 새겨진 무거운 진실이 지워지는 일은 없을 것이었다. "황제 폐하께서 오늘 저녁 식사를 함께 하자는 전갈을 보내셨습니다." 집무실에서 한참 서류를 살피느라 여념이 없던 테이드에게 시종이 와서 케이스워 크의 말을 전했다. 시종이 사라지고 나서도 한참이 지나서야 테이드는 문서를 살 피던 손을 멈췄다. 진실을 알게된 이후로 가슴 속은 싸늘히 식어버렸다. 인생 자체를 농락당했다는 느낌 때문에 머리가 타버릴 것처럼 감정이 끓어올랐지 만 오히려 가슴 속은 냉정해졌다. 하루가 지나고 또 하루가 지남에 따라 황성에 들어와 평소와 다름없이 일을 하면 서 테이드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업무를 처리했고 사람들을 만났다. 케이스워 크와도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면서 표정에 별다른 기색을 떠올리지도 않았다. 하지만 마음 속에 커다란 구멍이 뚫린 듯한 느낌은 사라지지 않았다. 아마도 그 구멍이 메워지는 일은 없을 것이다. 지금까지 진실이라고 믿어왔고 의심조차 하지 않았던 것이 모두 거짓이었고, 그 거짓된 감정에 지배당한 채 살아온 시간 모두를 부정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그 런 시간을 보내게 만든 장본인을 용서하는 것 역시 불가능했다. 직접적인 원인을 제공한 것은 전대 황제였지만 테이드의 가슴을 싸늘하게 식어버 리게 만든 것은 케이스워크였다. 모든 것을 알면서도 아무렇지 않게 지켜보고 있 었던 소년. 테이드는 모든 일이 일어나기 전에 보았던 어린 황자의 얼굴을 되살렸다. 마치 지금 케이스워크의 아들인 카예드처럼 어린 소년이었던 무렵, 그 때의 케이스워 크는 절대 순진한 어린아이가 아니었다. 그리고 19년이 지난 지금. 황제가 된 그 는 여전히 타인의 마음을 마음대로 주무르려고 했다. 그 뿐 아니라 인생마저도. 테이드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경멸 어린 목소리로 케이스워크가 동생에게 집착하는 자라고 말했던 것을. 그 속에 담겨있었을 비웃음까지 알아버린 지금, 테이드는 더욱 더 케이스워크를 용서할 수가 없었다. 반드시 그 얼굴에 고통이 배어드는 것을 지켜보겠다는 다짐을 몇 번이나 반복하 며 테이드는 일에 전념했다. 시간이 어떻게 가는지 모르게 일에 열중하고 있던 사이 어느새 해가 지고 저녁 식사 시간이 다가왔다. 테이드는 시종의 안내를 받아가며 화려한 식당으로 들어 섰다. 두 사람의 식사를 위해 마련된 자리치고는 상당히 넓었지만 테이드는 고개 를 숙여 케이스워크에게 예를 표하고 나서 의자에 앉았다. 첼시피온에 대한 보고는 첼시피온이 말했던 그대로 귀국하자마자 케이스워크에게 전달했다. 케이스워크는 표정조차 달라지지 않았지만 테이드는 케이스워크의 내 면에 숨어있는 비틀림을 이제 볼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었다. 황족의 피는 썩어있다고. 대를 이어 전해지는 그 피가 황족의 마음을 비틀리게 만드는 것이 틀림없었다. 그리고 그것은 귀족의 피도 마찬가지다. 첼시피온은 테이드에게 다시 제국을 찾았을 때 예전처럼 케이스워크에게 굴복하 지 않을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말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 말에 적극적으로 동조할 생각은 없었지만 지금은 달랐다. 과거 황가의 피를 이은 자들이 다른 사 람을 통해 라메르 백작가를 농락하고 파국을 맞이하게 했듯이 테이드 역시 다른 사람의 손을 빌어 그렇게 할 것이다. 케이스워크의 저 오만한 얼굴이 당혹으로 일그러지는 것을 반드시 보고 말겠다고 테이드는 온화한 표정으로 다짐했다. "늦게 전달된 보고 중 한가지가 무척 흥미로워서 오늘 그대에게 개인적인 자 리를 청했다. 라메르 백작." "네, 폐하." "그대의 동생을 사이드 공국에서 발견했다는 보고가 있더군. 사이드 공국에 붙들려 있거나 자의로 그곳을 돕기 위해 머물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지 만 흥미로운 보고였다." "그 건에 대해서는 저도 따로 조사를 하고 있으니 조금만 기다려 주시면 만족 스러운 대답을 드릴 수 있을 것입니다." 천성적인 오만함이 배어있는 케이스워크의 얼굴을 밝은 황금색 머리카락을, 그리 고 라딘의 것이 되었을 지도 모르는 보라색 눈동자를 테이드는 시선 안에 담았 다. 어차피 농락 당할 대로 농락 당한 세월이었고, 그 세월을 보상받을 수는 없다. 비틀리고 망가져 버린 마음 역시. 테이드는 이제 더 이상 거리낄 것도 망설일 것 도 없다는 사실을 알고 오히려 해방감과 비슷한 감정을 맛보았다. 30년의 세월을 보내고 나서야 비로소 진정한 자신을 찾은 듯한 느낌이었다. ================================================================ 오늘은 바람이 너무 강하게 부네요. 저희집은 4층인데 바람 소리가 너무 강해서 오즈의 세계로 집이 날아가 버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에요 =ㅂ=;;; 광풍도 이제 진도를 팍팍 나가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성실신이 계속 강림해 있을 수 있도록.... 모두 바람에 날아가지 않게 조심하세요 -_+ 늦은 밤. 라메르 백작가 저택의 응접실에는 흐릿한 불빛으로 밝혀져 있었다. 잠을 자고 있어야 할 시간에 응접실에 앉아 있는 것은 저택의 주인인 테이드였 다. 테이드는 의자 깊숙이 몸을 묻은 채 생각에 잠긴 얼굴을 하고 있었다. "별로 특별한 건 없는 모양이군요." 생각에 잠겨 있던 테이드는 아무도 없을 것이라 여겨졌던 반대편 의자 위에서 들 려온 목소리에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마음을 숨기는 것에는 특별한 재능을 가진 사람이니까요." 테이드는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대답하고 나서 소리 없이 미소 짓고 있는 아름 다운 청년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막 그림에서 빠져나온 듯한 청년은 흐릿한 불빛 아래에서 더욱 신비롭게 보였다. 어둡게 빛나는 금색 머리카락은 자연스럽게 어깨를 감싸며 흘러 내려와 있었고, 섬세하게 조각된 듯한 얼굴 역시 시선을 뗄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워 보였다. 대륙에 소문이 자자한 요정의 피를 이은 왕자의 모습을 테이드는 지금에서야 제 대로 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케이스워크가 첼시피온의 몸을 가진 것도 이 해가 가지 않는 일은 아니었다. 너무 아름다워서 함부로 손을 댈 수 없을 것 같은 느낌을 주는 것은 사실이었지 만 그와 반대로 저 얼굴이 쾌락에 젖어 흐느끼는 것을 보고 싶다는 가학 심리가 생겨나는 것 역시 부정할 수 없었다. "백작님이 해 주실 일은 간단합니다. 백작님의 손에 들어오는 무수한 정보를 제게 알려주시기만 하면 됩니다. 약속했듯이." "물론 그렇게 할 생각입니다. 제국에 지켜야 할 의리 따위는 남아 있지 않습 니다." 테이드의 대답에 첼시피온의 얼굴에 의외라는 표정이 살짝 스치고 지나갔다. 불 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테이드는 첼시피온을 돕겠다는 의사는 표현했지만 그렇게 적극적이지는 않았던 것이다. 첼시피온은 테이드의 마음에 커다란 변화가 있었다 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첼시피온은 테이드의 변화를 불러온 것이 무엇인지 물으려 했지만 결국에는 묻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그와 자신이 서로 협력을 하고 있다는 것일 뿐, 그 계기가 무엇인지 설사 다른 목적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상관은 없었던 것이다. 오직 중 요한 것은 결과 뿐이니까. "이번 일로 인해 대륙의 세력 판도가 크게 달라질 지도 모릅니다." "알고 있습니다." 테이드는 관심 없다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이제 테이드는 자신이 마음 속으로 계속 되뇌어 왔던 가문이 가진 이름도 지금까 지 테이드의 삶을 지탱한 비틀어진 원동력이 되어 주었던 동생도 더 이상 아무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리석은 자신을 비웃어주고 싶었지만 아직 할 일도 제대로 끝내지 못한 상태에 서 그렇게 풀어져 있을 수는 없는 것이다. 하지만 강한 시선으로 맞부딪혀 오던 익숙한 얼굴을 테이드는 결코 떨쳐 버릴 수 없었다. 지금은 오히려 타인이라는 사실을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묘한 안도감과 더불어 더욱 놓을 수 없다는 집착이 강하게 생겨나 있었다. 결국 테이드는 작게 웃었다. 자신은 무언가 마음을 강하게 붙잡아줄 목표가 없으 면 살아갈 수 없는 인간이라고. 목표가 사라진 이후에 다시 살아가기 위해서는 새로운 목표를 정하고 그것만을 바라보며 움직이는 것이 최선이었다. 이미 이렇게 굳어진 이상 테이드는 더 이상 다른 방법을 찾아낼 수 없음을 깨달았다. "이미 바닥까지 다 경험해 본 이상 두려울 것도 망설일 것도 없습니다. 저는 당신에게 확실하게 협력할 것입니다. 첼시피온 왕자." 첼시피온은 테이드의 마음이 더할 나위 없이 확고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엷게 미 소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케이스워크가 무슨 생각으로 첼시피온을 고국으로 돌려보냈고, 테이드에게 재상 의 자리를 맡겼는지는 모르지만 그 모든 것이 결국에는 자신의 무덤을 파는 결과 가 될 것이다. 도현은 쌍둥이들의 밤에서 하룻밤을 머물고 다음 날이 되자 센 왕국으로 돌아갔 다. 이별을 아쉬워하며 쌍둥이들은 다음 번에는 반드시 2년 전에 가지 못했던 별 장에 함께 가자는 이야기를 건넸다. 완벽한 공간이동 마법을 사용해 돌아간 도현을 배웅하고 나서 쌍둥이는 한 동안 아무 말 없이 의자에 앉아있기만 했다. 왠지 모르게 허탈한 기분이었다. 그렇게 마법을 통해서만 연락을 할 것이 아니라 직접 만나고 싶다고 여겼던 친구를 2년 만에 직접 만나고 함께 음식을 먹고 이야기를 나누기까지 했는데, 현실감이 들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너무 생생해서 그것이 어색했다. "직접 만나면 한 대 때려주거나 뭐라고 하려고 했었는데 말이야....." 한참이 지난 후에 카드리는 긴 의자에 비스듬히 누운 자세로 중얼거리듯이 말했 다. "좀....많이 달라진 것 같아." 리올은 고개를 끄덕여 카드리의 말에 동의했다. 도현은 확실히 많이 달라졌다. 어떻게 보면 2년이라는 시간은 길 수도 있고 짧을 수도 있는 시간이었지만 도현에게는 긴 시간이었던 모양이었다. "우리도 달라졌잖아, 카드리." 쌍둥이 특유의 직감으로 리올은 카드리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지 알아차렸다. "도저히 아무렇지 않게 말을 걸 수가 없었어. 난 그 녀석이...." 카드리는 한 번 말을 삼키고 나서 다시 천천히 말을 이었다. "난 그 녀석이..... 어딘가 알 수 없는 먼 곳으로 떠나가는 게 싫어." 리올은 씁쓸하게 웃으며 카드리의 옆자리로 가서 앉았다. 같은 얼굴을 한 형제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리올이 말했다. "친구란 건 어떤 선택을 하건 옆에서 지켜봐 주는 거잖아. 처음엔 우리도 목 적을 가지고 접근했던 거였으니까. 게다가 그 녀석은 이곳 사람이 아니잖아. 너도 만약 다른 세계에 혼자 떨어져 있게 되었다면 다시 이곳으로 돌아오고 싶어했겠 지. 당연한 거야." 카드리는 대답 없이 손을 들어올려 눈을 가렸다. 쌍둥이여서 태어날 때부터 함께 있었고 지금도 늘 함께이며 마지막까지 함께일 리올을 제외하고 카드리가 이토록 마음이 끌린 존재는 없었다. 대 상단을 소유한 상인 가문의 아들로 태어난다는 것은 결코 다른 사람들이 생각 하는 것만큼 부럽기만 한 자리도 아니며 당연히 얻을 수 있는 지위인 것도 아니 었다. 리올과 카드리가 샤르코 가문의 후계자가 된 것은 어렸을 때부터 무수한 다른 친척들을 물리치고 능력을 보였기 때문이었다. 마법에 재능이 있다는 사실 이 밝혀지고 그로트 아카데미에 입학하면서 부터는 확실히 그 자리를 굳혔지만 그 이전에는 또래 친구를 사귈 여유도 없이 일에 매달려야만 했다. 귀족처럼 세습되어 내려온 가문이 아니었기 때문에 가문의 이름을 지키고 빛낸다 는 것은 훨씬 더 어려운 일이었으며, 지금까지 위세 좋게 이어져 왔던 상단의 이 름을 자신들 대에서 더럽히지 않기 위한 부담감도 상당히 컸다. 그로트 아카데미는 쌍둥이에게 있어 일종의 도피처였지만 아카데미에서도 결코 자유로운 것은 아니었다. 어딜 가도 그들이 샤르코 상단의 후계자라는 사실은 모 두 알려져 있었고, 그저 돈 많은 평민에 불과하다고 여기는 귀족들의 시선과 시 기하는 평민들의 시선 사이에서 적절히 자리를 지킨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 니었다. 그렇게 치열하게 살아가던 와중에 우연히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라메르 백작가 의 소문의 주인공이 아카데미에 들어오게 되었다는 사실을. 처음엔 호기심 반, 그리고 가문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이유 때문에 접근했다. 그 리고 만난 것은 주눅이 들어있는 백작가의 도련님이 아니라 생생하게 살아있는 눈빛을 가진 반항적인 소년이었다. 다른 사람에게서는 결코 찾아볼 수 없는 특유의 선명함에 쌍둥이는 벌이 꽃에 이 끌리듯이 끌렸다. 그리고 진심으로 빠져들었다. "친구라는 건....이런 기분이야...?" 잦아드는 목소리로 카드리가 묻자 리올은 대답 없이 카드리의 머리카락을 쓰다듬 을 뿐이었다. 카드리가 느끼고 있을 소중한 존재에 대한 애정과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에 대한 안타까움. 그리고 그 친구의 상황이 무척이나 특수하기 때문에 느끼 는 복잡한 심정을 리올은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아무 말도 해줄 수 없었다. 뭔가 누군가를 열렬히 사모하는 사랑의 감정과 비슷하다고 카드리는 느끼고 있었 다. 또한, 예전에는 위태롭기 그지없었던 상대방이 이제는 스스로의 힘으로 일어설 수 있게 되었고, 여유 있게 웃을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그러나 곁에 있는 것은 다른 사람이었다. "나...조금 이상한 거 아냐?" "아니야..." "젠장.....그 때 함께 마지막까지 갔었어야 하는 건데...." 카드리는 2년 전 계획이 틀어지는 바람에 도현이 용병들에게 이끌려 엉뚱한 곳으 로 가게 되었고 결국에는 실종되었던 일을 떠올렸다. 같은 위치에 있다고 여겼던 사람이 결국 먼 곳으로 떠나버렸고 함께 있을 수는 있어도 그 위치가 결코 같아지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나자 카드리 는 그것 때문에 분하기도 했고 아쉽기도 했다. "나는 계속 곁에 있을 거야....." "그래." 두 손을 교차시켜 눈을 가린 채로 카드리는 계속 말했다. "그 자식이 어떻게 사는 지 계속 볼 거야. 돌아가면 돌아가는 대로 마지막에 인사를 할 거고, 남아 있겠다면 친구로 남아있을 거야." 그리고 나서 카드리는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뭐가 뭔지 모르겠어....." 한참 동안 말없이 같은 행동을 반복하고 있던 쌍둥이는 그로부터 시간이 더 지나 고 나서야 겨우 평소의 모습으로 되돌아왔다. "마법을 시험해 보자." 카드리는 조금 전 까지 우울해하고 있었던 것이 거짓말인 것처럼 활발한 얼굴로 되돌아와 리올에게 말을 걸었다. "이번에는 우리가 먼저 연락을 하는 거야." 둘은 거울이 있는 곳으로 다가가 도현이 가르쳐준 주문을 신중하게 읊조렸다. 처 음 하는 마법을 성공시키기 위해서는 집중력이 중요했기 때문이었다. 얼마 지나 지 않아 거울 속에 깔끔해 보이는 방의 전경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성공이다." 카드리는 소리내어 말했고, 그 목소리를 들었는지 가구만이 비치던 거울 건너편 에 사람의 얼굴이 나타났다. 편한 복장을 하고 있는 도현이 환하게 웃으며 인사했다. "안녕, 친구들." ================================================================= 갑자기 일이 폭주하여 오늘까지 넘기느라고 어제는 좀 바빴습니다. ^^;; 겨울잠을 자겠다고 선언했더니 일이나 하라고 일거리가 늘어나는 걸까요;; 새로나온 해리포터 소설책을 읽고 나서 또 패러디를 써보고 싶다는 생각이 무럭 무럭 피어오릅니다. 다 보고 나서 또 쓰게될지 어떨지 모르겠어요. 오늘은 소설 분량이 좀 짧지만 내일 다음 편을 올릴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이제 다시 스위드씨의 등장입니다. ^^ "새로운 의뢰가 들어왔어." 마법 서적을 건성으로 뒤적이고 있던 도현은 문을 열고 들어선 스위드의 말에 고 개를 돌렸다. "뭔데..?" "하고 싶지 않으면 거절 해도 좋아." 스위드의 표정이 조금 심각해 보여서 도현은 책을 아예 덮어 버리고 자세를 똑바 로 했다. 그러자 스위드 역시 도현을 마주보는 위치에 서서 입을 열었다. "라메르 백작의 의뢰야. 라메르 백작과 하루에 정해진 시간마다 연락을 취해 서 그 때 얻게된 소식을 첼시피온 왕자에게 전달하는 일이야. 교신 마법을 사용 하는 것이니 만큼 직접 몸을 움직일 필요는 없지만 내키지 않는다면 이 일은 내 가 맡도록 하지." 도현은 굳어진 얼굴로 스위드를 바라보다가 입을 떼었다. "....할게." 더 이상은 도망치기만 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도현은 확실하게 깨달았다. 테이 드에게서 도망친다는 것은 결국 언제까지나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뜻이기 도 했다. 하지만 더 이상 피해갈 수 없는 일을 언제까지나 피하려고 하고, 제대로 마주치 지 않으려고 하는 것은 스스로를 도피자라고 인정하는 꼴 밖에 되지 않았다. "나도 현실을 제대로 받아들일 때가 됐어." 도현은 그렇게 말하고 나서 작게 웃었다. 스위드는 조금씩 변화해가며 현실을 똑 바로 응시할 수 있게 된 도현을 보며 대견함과 더불어 아쉬움을 느꼈다. 시간이 지나면서 어리기만 했던 소년은 자라나 스스로의 힘으로 걸을 수 있게 된 것이 다. 더욱 많은 시간이 지나면 이제 아마 누구의 부축도 받지 않고 혼자만의 힘으 로 모든 것을 헤쳐나갈 수 있게 될 것이다. 그것은 마치 작은 새가 부모의 품에서 떨어져 나와 스스로의 힘으로 날갯짓을 하 고 하늘 높이 날아오르는 것과 마찬가지인 일이었다. "일은 언제부터 시작하면 돼?" "오늘부터. 아직 확실하게 교신 마법만을 사용하게 될지 아니면 움직일 일이 있을지는 알 수 없어. 그래도 하겠어?" 스위드가 재차 확인하듯 물었지만 도현은 이번에는 확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밤에 테이드 백작과 연락을 취해서 어떤 형태로 일을 전담하게 될 지 이야기 할 거야." "응." 2년은 유예 기간이었다. 도현은 가장 처음 눈을 뜨고 이곳이 현실 세계가 아님을 완전히 다른 세상, 어디 에 어떤 식으로 존재하는지도 알지 못하는 세상이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 어떤 기 분이었는지 떠올렸다. 모든 것이 혼란스럽기만 하고 자신의 말을 들어주고 믿어 주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던 그 때. 친형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현을 지탱해준 것은 테이드의 존재였다. 비록 그가 도현을 라딘으로 생각하고 차가운 시선을 던졌어도 같은 얼굴이 있으면 기대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아마 테이드도 그랬을 것이다. 자신이 어떤 기분이었는지 알기 때문 에 도현은 테이드를 마냥 원망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백작에게 진실을 알렸다. 네가 라딘 라메르라고 믿지 않을 수 있도록 확실하 게 말했지. 이제 백작도 더 이상은 널 동생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을 거야." 도현은 조금 놀란 것 같았지만 곧 표정을 풀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은 스위드 가 자신의 정체를 어느 정도는 밝혔다는 말이라는 사실을 도현은 알고 있었다. "고마워, 스위드." 진심을 담아 말한 도현에게 스위드는 살짝 미소지어 보였다. 저녁 식사를 마친 후 스위드와 도현은 커다란 거울 앞에 앉았다. 마법을 시도한 것은 스위드였다. 거의 주문을 외우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거울 속에 깔끔한 방 안의 전경이 비치고 있었다. 그곳은 라메르 백작가의 새 저 택이었지만 도현의 기억에는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신의 보석을 흡수한 이래로 새로운 저택에서 지낸 기간은 너무 짧았기 때문에 지금은 어렴풋하게 그냥 집이 상당히 컸다는 기억만 남아있었다. 방안의 전경이 제대로 보이는 것을 보니 스위드가 마법을 시전한 것은 아마도 창 문인 것 같았다. 한 동안 사람의 모습은 거울 안에 나타나지 않았지만 둘은 조용 히 기다렸다. 그리고 거울 안에 테이드의 모습이 나타났다. 조금 마른 것 같기도 한 얼굴은 2 년 전과 그리 달라진 곳은 없어 보였다. 이제 서른이라는 나이가 되었을 기현의 얼굴을 살짝 엿본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도현은 테이드의 얼굴을 조용히 바라보 고만 있었다. 거울 속에 비친 테이드 역시 도현의 얼굴을 보고 말없이 응시하기만 했다. "의뢰는 받아들이기로 했습니다. 정확한 내용을 결정하도록 하지요." 두 사람 사이의 침묵은 스위드의 말에 의해 깨어졌다. "이틀에 한 번씩, 내 집무실에 찾아와 직접 문서를 가져가는 것으로 했으면 합니다. 첼시피온 왕자에게 전달하는 방식은 그 쪽에서 편한 대로 해도 좋습니다. 어차피 당신들에게 의뢰를 한 것은 안전을 위해서니 말입니다." "좋습니다. 그러면 이틀 후부터 방문하기로 하지요." 스위드가 대답하는 동안 도현은 내내 조용히 테이드의 얼굴을 관찰했다. 선명한 녹색 눈동자나 딱딱해 보이는 얼굴 표정. 2년 전보다 조금 야윈 듯한 상체. 생각해보면 이런식으로 자세하게 테이드의 얼굴을 바라본 적은 없었던 것 같았 다. 확실히 동안이긴 했지만 테이드에게서는 나이에 걸맞는 연륜이 느껴졌기 때 문에 단지 외모만을 보고 다른 사람이 함부로 대할 만한 분위기는 아니었다. 아 마도 재상이라는 지위에 오르고 나서 더욱 무거운 분위기를 가지게 되었을 것이 다. 도현이 지켜보는 사이 테이드와 스위드는 이야기를 끝내고 막 마법을 중단하려 하고 있었다. 그때, 테이드가 도현을 직시하며 말했다. "잠시 이야기를 해도 괜찮을까요?" 스위드는 잠시 도현에게 시선을 주었지만 도현이 살짝 미소지어 보이자 고개를 끄덕이며 물러났다. "건강해 보이는구나." 테이드는 마치 자상한 형이 말하듯이 인사말을 건넸다. "응, 잘 지냈어." 도현 역시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지만 어색한 기분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렇게 인사만을 주고 받고 나서 둘은 약속이라도 한 듯이 입을 다물었다. 도현 은 그 어색한 분위기가 싫어서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피하지 마." 그리고 단호하게 들려온 목소리 때문에 도현은 저절로 정면을 바라보았다. 무언 가 단단히 결의라도 한 것처럼 테이드의 표정은 굳어져 있었다. "네가 내 동생이 아니라는 사실은 알았지만 난 결코 널 놓아줄 생각은 없다." 그 말을 듣자 도현은 울컥하고 화가 치밀어 올랐다. "당신이 뭔데 놓아준다 만다야? 아무런 상관도 없는 타인이잖아?" 조금 전까지만 해도 어색한 분위기였다거나 2년 동안 만나지 않다가 얼굴을 보게 된 탓에 기분이 상당히 묘하다거나 하는 생각은 이미 저 멀리로 날아가 버렸다. 역시 테이드는 도현의 기분을 엉망진창으로 휘저어 놓는다. "그래, 타인이지. 하지만...." 테이드는 입술 끝을 살짝 들어올리며 웃었다. "그런 것은 상관 없어. 네가 내 친 동생이 아니더라도, 라딘 라메르가 아니더 라도 넌 충분히 내 인생을 뒤흔들어 놓았다. 그게 이유다." 도현은 기가 막혀서 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역시 괜한 연민을 가진 것은 아무런 소용이 없는 일이었던 것이다. 2년 동안 만 나지 못했으니 달라졌으리라고, 도현 자신이 너무 다르게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 라고, 테이드 역시 자신과 마찬가지일 거라고 생각했지만 아니었다. "그래서 날 어떻게 하기라도 하겠다는 거야?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발목이라 도 부러트리고 가둬놓겠다고? 하지만 난 예전의 내가 아니야." 화가 난 탓에 도현의 검은 눈동자는 어느 때 보다 선명했고 테이드는 그것을 즐 겁게 바라보았다. 저 밑으로 가라앉았던 마음이 다시 물위로 떠오르는 것 같은 기분을 맛보면서 테이드는 어느 때 보다 즐거운 기분이 되어 있었다. "물론 지금의 넌 능숙하게 마법을 사용할 수 있고, 나는 그저 재상이라는 지 위만 가졌을 뿐인 평범한 귀족에 불과하지. 능력 따윈 가지고 있지 않아.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상관은 없다. 내 마음은 달라지지 않을 테니까. 앞으로 넌 날 지탱 시키는 이유가 될 것이고, 그걸 받아들이기만 하면 된다." "헛소리 작작해!" 도현은 너무 화가 나서 소리를 질렀다. 이런 식으로 화를 내는 것도 얼마 만인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기현과 지낼 때는 이렇게 화를 낸 적은 없었는데 테이드는 항상 도현의 마음을 저 밑바닥에서부터 부글거리며 끓게 만든다. 어떻게 보면 저것도 일종의 재능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 였다. "당신이 그렇게 생각한다면 나도 내 생각을 말해주지." 도현은 화가 나서 창백해진 안색으로 테이드를 노려보며 말했다. "당신의 인생을 동정했어. 당신이 동생을 원망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나름 대로 이해하려고 노력했어. 하지만 그건 말도 안 되는 일이지. 어떻게 다른 사람 을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겠어. 더군다나 당신은 그렇게 밖에 살 수 없는 인간인 데!" "그래, 네 말이 맞다." 도현은 오히려 너무 순순히 인정하는 테이드 때문에 맥이 빠졌다. "난 이상한 점이 많았는데도 널 내 동생이라고 생각했지. 아무리 기억을 잃어 버렸어도 말하는 방법까지 잊었을 리가 없는데, 그런 점은 그냥 사고였으니까 어 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성격이 완전히 달라진 것도, 네가 내 동생이 아니라고 라 딘 라메르가 아니라고 말하는 것도 모두 부정했었지. 하지만 진실은 언젠가는 밝 혀지는 법이고 언제까지 마음에 거짓말을 새기는 것도 불가능했다." 도현은 테이드가 점점 다른 사람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지금까지는 형의 그림자 와 겹쳐 보고 있던 상대를 이제 완전히 개별적인 인간으로, 다른 인간으로 볼 수 있게 되었다. 오히려 친숙한 얼굴도 다르게 보였다. "2년 전의 넌 스위드를 선택했고, 자신을 찾기 위해 떠났지만 이제 네가 있어 야 할 곳이 어디인지 다시 생각해야 할 거야." 도현은 피식거리는 웃음 소리를 냈다. "나는 계속 이 자리에 있을 거야. 내가 있을 곳은 스위드의 곁이지, 당신 옆이 아니야." 단호하기까지 한 도현의 말을 듣고도 테이드는 온화하게 웃어 보였을 뿐이었다. 그런 테이드의 자신감 있는 표정 때문에 기분이 나빠졌다. 2년이 지났다고 해서 잊고 있었지만 테이드는 아무렇지 않게 사람의 발목을 부러트릴 수 있는 사람이 었고, 친동생이라고 여겼던 자신의 혀를 물어뜯은 전력도 있었다. 타인의 고통쯤 은 아무렇지 않게 냉정하게 바라볼 수 있는 것이 테이드라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사람의 본성은 쉽게 바뀌지 않는 법이다. 아무리 온화하게 미소지을 수 있다고 해도. 도현은 이미 몇 번이나 온화하게 웃는 미소 속에 감춰진 진심이 얼마나 날카로운 지 맛보았고, 말이 통해도 사람의 말을 제대로 들어주지 않는 사람들 속에서 답 답함에 미쳐버릴 것 같은 기분을 느꼈었다. 결코 그 기분을 잊을 수는 없었다. "이제 더 이상 할 말은 없으니 다음에 다시 만날 때는 일과 관련되어서 일 거 야." 도현은 그렇게 말하고 나서 마법을 해제시켜 버렸다. 거울에 비치고 있던 테이드 의 영상은 흐릿해지더니 사라져 버렸다. "바보 같은 소리나 하고 말이야...." 도현은 중얼거리며 의자에서 일어나 자신의 방으로 걸어갔다. 가던 길에 스위드 의 방을 지나치자 책을 읽기 위해 켜 놓은 불빛이 문 틈으로 새어 나와 복도를 비추고 있었다. =============================================================== 도현이와 테이드씨의 간접 대면이었습니다. 열심히 일한 돈으로 DVD를 왕창 산바람에 다시 열심히 일을 해서 돈을 벌어야 해요. 그 동안 잘 절약하고 살았는데 이번에는 유혹에 지고 말았습니다. 벌써 또 주말이 다가왔네요, 내일도 가능하면 올릴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이제 광풍다운 내용을 써야 할텐데...빨리...바람아 불어라 =ㅂ=;;; 첼시피온의 외모는 여전했다. 아니 오히려 예전보다 훨씬 더 눈에 띄는 용모가 되어 있었다. 섬세하지만 연약 해 보이지는 않는 이목구비. 어깨를 지나 흘러 내려와 있는 부드러워 보이는 금 발. 여자들이 울고 갈 것 같은 투명한 피부까지. 게다가 분위기는 상당히 묘해서 도 현은 첼시피온을 마주 본 순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여러 가지로 첼시피온에 대한 소식은 많이 들었었고, 2년 전 첼시피온의 진심을 알게 되고 나서 결코 용서한 것도 아니었지만 첼시피온의 그러한 변화는 시간이 많이 흘렀다는 사실을 실감하게 해 주었다. "안녕." 도현은 먼저 인사했다. 테이드에게서 처음 문서를 가져오는 것은 스위드가 맡았고, 도현은 그 문서의 내 용을 첼시피온에게 전달해 주는 일을 맡았다. 양쪽 다 마법사이기 때문에 마법으 로 연락을 취하는 것이 편했다. 첼시피온은 거울 건너편에서 도현의 얼굴을 보며 희미하게 미소지었다. "이거야." 도현은 문서를 펼쳐들고 거울 앞에 글자가 적힌 면이 자세히 보이도록 바짝 가져 다댔다. 한참이 지나고 첼시피온이 됐다는 말을 할 때까지 도현은 움직이지 않았다. 첼시피온은 싸우고 나서 아무 말도 없이 헤어진 후 우연히 만나게 된 친구였다. 첼시피온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 지 몰라도 도현에게는 그랬다. "너... 좀 많이 변한 것 같다." "너 역시." 한 마디씩 주고받고 나자 서먹한 기분은 여전했지만 그래도 대화를 이어갈 수가 있었다. "제국에 억류되어 있었다는 말은 들었어." "1년간, 별궁에 갇혀 있었어." 겉모습을 보면 더 아름다워졌고 얼굴에 떠오른 사람 좋아 보이는 온화한 미소도 여전했지만 도현은 어딘가 근본적으로 자신과 알고 지내던 때의 분위기와는 확실 히 다르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뭐, 시간이 지나면 변하는 건 당연한 것이고. 네가 나한테 거짓말을 했던 것 도 사실이지만 어차피 지난일이고 하니 잊어줄게. 하지만 너와는 일 이외의 일로 만나는 일은 없을 거야." "고맙다고 대답해야 하나...?" "마음대로 해. 별로 인사를 받고 싶은 마음은 없어." 도현은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이렇게 해서 조금씩 과거와 만나고 맞부딪혀 가면서 현실을 똑바로 바라보는 것 이다. 어차피 이곳에서 살아야만 한다면 뭐든 확실하게 결론을 내 두는 것이 좋을 것이 다. 아직 완전히 모든 것을 포기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도현은 이곳에서 살아가 기로 결심했다. 그런 도현에게 있어 테이드와 첼시피온은 과거의 인물이었다. 그 둘을 넘어서지 않으면 결코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고 도현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나에게 할 말 없어?" 도현은 첼시피온을 강한 시선으로 바라보며 물었다. 첼시피온은 바로 대답하지 않고 도현의 얼굴을 천천히 살피며 시선을 이동했다. 그러다가 첼시피온의 시선 이 도현의 눈에서 멈췄다. "별로. 단지.... 네 마음에 뚜렷한 확신이 생긴 것 같아서." 도현이 잠자코 듣고 있자 첼시피온은 계속 이어서 말했다. "아쉬운 점은 어쩌면 너와 난 좋은 친구가 되었을 지도 모른다는 사실이지. 이미 그렇게 되기엔 많은 것들이 달라졌지만." "네가 날 속이지만 않았어도 우린 친구가 될 수 있었을 거야. 아니, 적어도 사 실을 알게 되기 전까진 친구라고 생각했어. 너는 아니었겠지만." 이런 식으로 사이가 벌어져 버린 상대와 얼굴을 마주하고 이야기하는 것은 생각 보다 상당히 불편했다. 아무렇지 않게 대화를 나눌 수는 있어도 마음의 어색함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그것도 일방적으로 배반당한 상대와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별로 권장할 만한 일 은 아니었다. 멀리서 가끔 상대방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는 것과 직접 대면하는 것은 느낌이 완 전히 달랐다. "사실 과거를 잊겠다고 해도 널 볼 때마다 드는 어색한 마음은 사라지지 않을 것 같아. 우린 그냥 이 정도의 거리를 두고 지내는 게 좋겠어." 첼시피온은 대답 없이 조용히 도현을 응시했다. 가라앉은 눈동자는 무엇을 생각 하고 있는 지 알 수가 없을 정도로 깊어 보였다. 스위드와 함께 지내면서 다른 사람과 다른 존재라는 것이 얼마나 큰 고독을 불러 오는 일인지 알게 되었다. 첼시피온 역시 보통 인간과는 다른 존재지만 스위드 만큼 첼시피온을 깊이 이해하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확실히 첼시피온은 처음 보는 상대방에게 경계를 하지 못하게 만들 정도로 아름다운 외모를 가지고 있지만 그것은 어딘지 모르게 다른 차원의 아름다움이었다. 스크린 너머에서 존재하는 연예인처럼 첼시피온 역시 그렇게 닿을 수 없는 곳에 있는 존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의뢰가 종료되는 그 날까지 같은 시간에 연락을 취하도록 하겠습니다." 도현은 예의 바르게 말하고 꾸벅하고 인사했다. "알겠습니다." 첼시피온 역시 별다른 말없이 대답했다. 해제 주문을 외우자 거울은 보통의 거울 로 되돌아왔다. 그러나 거울에 비쳤던 영상이 깨끗하게 사라진 것과 반대로 도현 의 마음은 복잡하기만 했다. 도현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스위드의 방으로 갔다. 문을 열자 스위드가 부드러운 표정으로 도현을 맞이했다. "연락은 잘 했어?" "응. 별 문제는 없었어." 도현은 의자에 반대로 앉아 등받이 부분에 손을 올리고 그 위에 턱을 얹은 후 비 스듬하게 고개를 기울인 채 스위드를 응시했다. 아무리 봐도 20대 중반 정도로 밖에 보이지 않는 스위드의 얼굴이 오늘 따라 더 욱 놀랍게 느껴졌다. 스위드의 존재야말로 이곳이 다른 세상이라는 것을 알려주 는 생생한 증거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난 그냥 여기서 이렇게 지내는 게 좋아. 더 이상 다른 누구 의 인생에 얽혀서 복잡한 생각을 하는 것도 싫고, 무턱대고 믿었다가 배신 당하 는 것도 싫고 일에 휘말려서 끌려 다니는 것도 싫어." 연속으로 테이드와 첼시피온의 얼굴을 마주하게 되자 괜히 가슴이 답답해졌다. 사실 스위드를 알게 된 것이 가장 나중 일이었는데 지금은 이렇게 함께 있는 것 만으로 편안해 진다는 것이 신기하기도 했지만 그런 것을 일일이 신경 쓸 필요는 없었다. 지금 마음이 편하면 그걸로 족하니까. "일은 그저 일로 생각하면 돼. 너는 도현이고 이곳 사람도 아니고 라딘은 더 더욱 아니지. 네가 원하는 삶을 살면 그걸로 된 거야." "응. 알아." 이방인이면 이방인답게 살면 되는 것이다. "스위드. 어디 경치 좋은 데 없어?" 마음이 답답할 때는 그저 여행을 떠나는 게 제일이다. 물론 며칠 동안 자리를 비 울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그들에게는 마법이라는 편리한 수단이 있었다. 잠시 생각에 잠겨있던 스위드는 의자에서 일어나 손짓으로 도현을 불렀다. "좋은 곳이 떠올랐어." 도현이 곁으로 다가오자 스위드는 빠르게 주문을 외웠다. 선명한 검은색 마법진 이 바닥에 새겨짐과 동시에 둘의 몸은 빛에 휩싸여 다른 곳으로 이동했다. 분명 오후였음에도 불구하고 도현이 도착한 곳은 이른 새벽처럼 어둑어둑했다. "여긴...." 도현이 주위를 두리번 거리며 묻자 스위드는 어느 한 곳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휘트린의 영지야. 내가 어린 시절 유일하게 나올 수 있었던 장소이기도 하 지." 스위드는 담담하게 말했지만 도현은 이제 자신에게는 친절하고 매력적인 여성으 로 비춰지는 휘트린이 스위드에게 있어서는 어떤 의미인지 조금은 알고 있었다. "너에게 이걸 보여주고 싶었어." 도현은 스위드의 손끝을 따라 시선을 이동시켰다. 그곳에 있는 것은 거대한 나무였다. 10미터는 훨씬 넘어 보이는 그 나무는 짙은 고동색 몸체를 가지고 있었다. 두께도 상당히 두꺼워서 시야 안에 다 들어오지 않을 것 같았다. 또한, 나무 기둥은 색이 상당히 어두워서 지금처럼 어둑어둑한 하늘 아래서는 검은색으로 보일 정도였다. 하지만 그 나무 줄기를 따라 점점 위 로 시선을 올려가던 도현은 어느 순간 감탄성을 터트렸다. "멋있다...." 짙은 몸체와는 달리 거대한 나무의 잎은 선명한 흰색이었다. 그것도 솜털처럼 가 볍고 부드러워 보이는 작은 잎들이 무수하게 나무에 매달려 있었다. 그러고 보니 주위가 어둑어둑하게 느껴진 것은 거대한 나무와 다른 나무들에 빛이 가려진 탓 이었다. "케힌. 영원의 나무지." 도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왠지 이 나무에 잘 어울리는 이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나무는 내 몸 속에 흐르는 마녀의 피와 같은 시간만큼 이 대륙에 뿌리를 내리고 살아왔어. 이 세상에 마녀가 처음으로 태어난 그 때부터 지금까지 계속." 그렇다면 이 나무는 스위드의 가문의 역사라는 말도 된다. 어둠의 힘을 가졌기 때문에 이 나무도 어두운 색인걸까 하고 도현은 잠시 생각했다. "이 숲에는 바람이 불지 않지만 가끔 이렇게 하는 것도 나쁘진 않아." 도현이 의아해 하며 고개를 든 순간 스위드의 손끝에서 바람이 피어올랐다. 아니, 그것은 적절하게 타이밍을 맞추어 스위드가 마법의 발동과 동시에 손을 움직인 것이었다. 하지만 도현의 눈에는 그것이 스위드의 손끝에서 바람이 피어오른 것 처럼 보였다. 가느다란 나뭇잎은 바람을 타고 지상에 흩날리며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그것은 마치 따뜻한 눈이 쏟아져 내리는 것 같은 광경이었다. 도현은 고개를 들어올린 채 손바닥을 펴고 나뭇잎을 손에 담았다. 민들레 홀씨처럼 부드러운 잎이 손바닥에 내려앉아 있었다. 그것을 바라보고 있 던 도현의 귓가에 나지막한 스위드의 목소리가 흘러 들어왔다. "나는 네가 어떤 곳에 어떤 모습으로 존재한다고 해도, 네가 원하는 그 순간 까지 항상 곁에 있을 거야." "고마워." "내가 먼저 널 떠나는 일은 없을 거야. 도현." "내가 원래 세상으로 함께 가자고 해도?" 도현은 농담 섞인 목소리로 그렇게 물었다. 스위드는 온화한 눈으로 도현을 바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까지나." 윤기 있는 검은색 머리카락이 바람에 흩날렸다. 어둠 속에서 스위드는 더욱 더 존재감을 발하며 더욱더 선명하게 시선 속에 들어 왔다. 도현은 스위드가 조금 생소하게 보였지만 금새 그 생각을 지워버렸다. 스위드는 도현에게 자유를 주었고, 신뢰를 주었다. 이 세계에서 도현이 가장 필요 로 하던 것을 주었다. 도현은 손을 내밀어 스위드의 손을 잡았다. 어둠 속에 녹아 들어갈 것처럼 보이던 스위드가 그 순간 온기를 가진 따뜻한 존 재가 되어 따뜻한 시선으로 도현을 바라보고 있었다. "응." 도현은 웃으며 대답했다. 선선한 바람이 새하얀 나뭇잎을 눈처럼 하늘 위에서 계속 뿌려댔다. 도현은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채 땅 위에 쌓여 가는 흰색 잎을 조용히 응시했다. ========================================================== 고백 타임은 끝났다! 도현은 이제 누구를 고를 것인가 =ㅂ=!! 연애는 멋진 남자랑 해도, 결혼은 착한 남자랑 하는 거란다 얘야. 누님의 충고가 전달된 가운데 도현의 선택은 누구를 향할 것인가.... 결과는 다음회에.... 나오지 않습니다. -ㅂ-;;;; 저는 앞으로 1주일간 컴퓨터 업그레이드를 위해 피나게 일을 할 예정입니다. 그래도 일하는 짬짬이 글을 써서 올릴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모두 즐거운 한 주 시작 하시기 바라면서, 저는 일거리를 향해 Go~ 덜컹거림이 그리 크지 않은 마차 안에서 창 밖을 내다 보며 여유 있게 즐기는 것 은 오랜만의 일이었다. "꼭 옛날로 돌아온 것 같은데?" 반대편에 앉아 있던 카드리의 목소리에 도현은 입가에 엷은 미소를 떠올린 채 고 개를 마차 안으로 돌렸다. "맞아. 그 때도 너네 집안의 마차를 타고서 함께 갔었지." "사고만 없었어도 즐겁게 여유있는 생활을 할 수 있었을 텐데." "그래도 그 사고 덕분에 난 전환점을 맞았으니까, 오히려 고맙게 생각해." 도현의 대답에 카드리는 입술을 삐쭉하게 내밀었다. "네 생각만 하는 거 아니야...?" "카드리." 리올이 어이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카드리의 어깨를 가볍게 쳤다. "미안해. 카드리." 도현은 오히려 카드리에게 사과했다. 카드리가 자신을 많이 걱정해 주었고 그래 서 저런 말을 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너희와 친구가 되어서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어. 사실 진짜 친구라고 말할 수 있을 만한 상대는 너희가 처음이야. 원래 내 세계에서도 그런 친구는 없 었거든."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에서 생활한 것은 얼마 되지 않았지만 도현에게는 죽 마고우라거나 뭐든 털어놓을 수 있는 친구는 없었다. 도현의 외모가 섣불리 접근 하는 것을 꺼려지게 만들기도 했지만 도현 자신이 그리 친구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지 못했다. 이곳에 오기 전까지만 해도 도현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타 고난 언어쪽 능력을 어느 정도까지 개발할 수 있는가가 전부였다. 그 외에는 가 족도 친구도 연인도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그런 일상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고 도현은 완전히 낯선 세상에서 모든 것을 새롭게 시작해야만 했다. 자신의 말을 진심으로 받아들여주는 사람이 없다 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인지, 함께 있을 때 마음을 편하게 만들어주는 친 구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도현은 낯선 세상에 와서야 처음으로 깨달았다. 많은 시행착오를 거쳐서 지금 이 자리에 서 있는 자신을 깨닫자 곁에 있어주는 친구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자 마음 한구석이 따뜻해져왔다. "만약 이곳에서 너희와 만나지 못했다면 나는 아마도 평생.....그런 소중함이나 기쁨 같은 건 느끼지 못했을 지도 몰라." 천재라는 사실은 타고난 능력이 있다는 사실은 알게 모르게 사람에게 오만함을 심어준다. 도현 역시 그랬지만 낯선 세상에서 도현이 가진 능력이 도움을 준 것 은 언어를 조금 더 빨리 익힐 수 있었다는 것 외에는 없었다. 혼자서 살아가기 위해 도현이 가진 능력은 없었던 것이다. 겸연쩍은 듯한 표정으로 괜히 창밖을 내다보는 카드리나 차분하게 미소짓고 있는 리올을 번갈아 쳐다보며 도현은 다시 웃었다. "크레이슨 왕국은 어떤 곳이야?" 지금 마차가 향하고 있는 곳은 대륙에서 힘의 균형을 유지시키고 있는 다섯 나라 중의 하나인 크레이슨 왕국이었다. 지금 도현이 살고 있는 곳도 그 중 하나인 센 왕국이었지만 도현이 가본 곳이라고는 제국의 일부 지역과 센 왕국 사이드 공국 의 일부 지역 뿐이었다. 물론 체피의 의뢰 때문에 여행 아닌 여행을 하면서 어느 정도 지리를 익힐 수 있었지만 아직까지 도현에게 있어 대륙은 미지의 지역이었 다. "북쪽에 가까운 나라라서 기온이 다른 곳에 비해 차갑고 유일하게 눈을 볼 수 있는 나라이기도 해. 우리 상단에서 주로 거래하고 있는 품목은 크레이슨 왕국에 서 나오는 지하 광물을 특수 세공품이나 음식물과 교환하는 거야. 전체적으로 기 후가 추운 편이라서 과일 종류는 몇 개 나지 않거든." 리올이 차근차근 설명을 해 주었다. 제국은 거의 봄 같은 날씨가 계속 이어졌고 센 왕국이나 사이드 공국 역시 지나 치게 덥지도 그렇다고 춥지도 않은 온화한 날씨가 대부분이었다. 사계절이 뚜렷 한 나라에서 살아온 도현에게는 만년 봄이나 가을 날씨라는 것은 조금 생소했지 만 이제는 항상 신록이 우거진 자연을 볼 수 있다는 것이 멋진 일이라고 생각하 게 되었다. "이번에 우리 상단에서 그 동안 주로 거래해 오던 크레이슨 왕국 내의 상인 조합 대표가 바뀐 것 때문에 인사도 하고 시장 조사도 할 겸 우리를 보낸 거지. 아카데미를 졸업하면 본격적으로 상단을 이을 공부를 하게 될 테니까." "너희들 마법사가 되려는 게 아니었어?" 도현이 의아한 표정으로 묻자 카드리는 그것도 몰랐냐며 다시 뾰루퉁해 졌고, 리 올이 웃으며 설명했다. "물론 아카데미 마법부에 입학한 건 마법을 배우기 위해서고 우리는 상단의 후계자라는 사실을 떠나서 마법은 열심히 배울 것이고, 마법사라는 칭호도 받을 거야. 하지만 본업은 샤르코 상단의 후계자라는 거지." "결국 내 친구는 재벌의 후계자였다는 거네." "뭐.....재벌...? 그게 뭔데...?" 도현이 중얼거리자 카드리가 당장에 질문을 던졌다. "너희들 같은 집안을 두고 재벌이라고 불러. 아주 돈이 많다는 뜻이지." "흐음..."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저녁이 되어 있었다. 마차는 크레이슨 왕국에서 가까운 곳에 있는 상단의 건물에 멈춰섰고 그 집을 관리하고 있던 사람 들이 쌍둥이의 도착 소식에 반색을 하며 달려나왔다. 환대를 받으며 저녁 식사를 하고 나서 각자 침실로 안내 받았지만 잠자기에는 이 른 시간이었기 때문에 도현은 쌍둥이들의 방에 함께 모여 앉아서 신선한 과일을 간식으로 즐기며 또 다시 이야기 꽃을 피우고 있었다. 한참 이야기를 나누나보니 어느새 화제가 도현이 지금 하고 있는 일로 집중되었 다. "그러니까 자세한 것까지 말할 필요는 없잖아. 너희도 내가 상단의 일로 꼬치 꼬치 캐물으면 전부 대답해 줄 수 있는 건 아니잖아?" 도현이 조금 곤란하다는 듯이 말하자 카드리가 불만이 가득한 표정으로 투덜거렸 다. "하지만 말해 줄 수 있는 문제 아니야? 네가 뭘 하고 있는지 안다고 해서 우 리가 그걸 악이용할 것도 아닌데." 카드리가 계속 투덜거리자 도현은 결국 한숨을 내쉬며 대답할 수 밖에 없었다. "테이드와 첼시피온을 연결시켜 주는 일을 하고 있어." "뭐?" 먼 곳에 떨어져 있는 사람들의 정보 교류를 담당하고 있다고만 말했던 도현을 카 드리는 기가 막히다는 표정으로 응시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리올 역시 한숨을 내 쉬었다. "그런 건 좀 진작 말해주면 안돼?" "나도 이제 충분히 혼자서 상대할 수 있어. 예전처럼 아무런 능력도 없는 게 아니니까." "하지만 네 능력은 치료하는데 중점적이고 그밖에 부수적인 마법은 이동이나 통신 같은 전투력과는 무관한 마법뿐이잖아." 툭하고 내뱉은 카드리의 말이 정곡을 찌른 바람에 도현은 잠시 움찔 했지만 그 정도로도 충분하다고 대답했다. "원래 싸움 같은데는 재능이 없었으니까 별 상관 없어. 위급한 순간에 재빠르 게 몸을 뺄 수 있는 것도 재능이니까." 도현의 대답에 쌍둥이는 동시에 한숨을 내쉬었다. "그건 그렇고 이번에 새로 상인 조합 대표가 됐다는 사람은 누군데?" 사실 도현이 리올과 카드리의 이번 일정에 함께 참가하게 된 것은 쌍둥이가 이번 에 만나야 할 사람이 도현에게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기 때문이었다. "크레이슨 왕국에도 신의 보석을 가진 사람이 있다는 건 알고 있지?" "응." "이번에 상인 조합의 대표로 선출된 사람이 바로 그 신의 보석을 가진 사람의 부친이야." 도현이 원래 세상으로 돌아가고 싶어한다는 사실을 예전부터 알고 있었던 쌍둥이 는 나름대로 정보를 모으고 있었다. 물론 친구를 다른 세상으로 떠나 보낼 일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이 달가운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모든 가능성을 다 찾아보 고 도전할 수 있는 기회가 있는데도 포기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는 생각에 도 현에게 연락을 취한 것이었다. 이미 예전에 첼시피온이 한 말처럼 신의 보석을 가진 자는 이 세계에서 떠날 수 없게 된다는 말이 사실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만약 신의 보석이 모두 한 자리에 모였을 때 그 힘이 합쳐져서 도현에게 원래 세상으로 돌아갈 수 있는 길을 알려 줄 지도 모른다는 희망은 아직 남아있었다. 그때가 되었을 때도 만약 돌아갈 수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면 그것을 받아들여야하겠지만 희망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 다면 그것을 믿는 것이 사람이었다. "신의 보석의 주인들 중에서 네가 빛의 보석의 주인이 되기 전까지 가장 최근 에 신의 보석의 주인이 된 게 바로 크레이슨 왕국에 있는 물의 보석의 주인이야. 사실 우리 상단에서는 신의 보석의 주인들과 인맥을 형성 시켜서 도움을 구하기 위해 사람을 보내곤 했는데 지금으로서 성공했다고 말할 수 있는 건 너 하나 뿐 이지." "너희들, 사실 날 이용하려고 접근한 거지?" 도현이 화난 척 하며 묻자 리올은 입을 다물어 버렸고, 카드리는 정색한 표정으 로 격렬하게 부정했다. "아니야, 아니야. 사실......처음부터 그런 의도가 없었다고는.....못하겠지만." "그것 봐." "뭐야, 그래서 지금 우릴 못 믿겠다는 거야?!" 카드리가 소리를 지르자 도현은 표정을 풀고 마구 웃어댔다. 역시 카드리는 금새 발끈하는 성미 때문에 놀리는 재미가 있다. 도현과 쌍둥이는 밤이 깊어가도록 이야기를 하느라 시간이 가는 것도 모르고 있 었다. 점점 가라앉는 밤 공기 속에서 세 소년의 웃음소리가 퍼져 나갔다. 이마에 새겨진 선명한 푸른색의 문장은 반년 전부터는 아예 사라지지 않았다. 소 년은 거울 속에 비친 푸른색 문장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보통 사람은 그 문장이 무엇을 뜻하는지, 어떤 형태로 이루어져 있는지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소년은 그 문장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다. 신의 보석의 주인이라는 증거이자 보석의 힘이 가장 극대화 되었을 때 문장은 선 명하게 외부로 드러난다. 그러나 평소에는 잠들어 있어야 할 문장이 소년의 이마 위에는 마치 문신처럼 뚜렷하게 드러나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었다. 소년은 손을 뻗어 조심스럽게 이마의 문장을 쓰다듬었다. 복잡하게 얽힌 문장은 손 끝에 닿자 온기만을 전했을 뿐, 그 형태가 손 끝으로 느껴지는 것은 아니었다. "세인." 한참 거울을 들여다 보고 있던 소년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리자 세인은 거울에서 시선을 떼고 고개를 돌렸다. 반쯤 열린 문 사이로 자상해 보이는 인상의 중년 남자가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내일 약속은 잊지 않았겠지?" "네." 무심한 표정으로 짧게 대답하는 아들을 바라보다가 남자는 속으로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신의 보석의 주인이 된 이후로 남자의 아들은 마치 보석의 성질을 물려받기라도 한 것처럼 차가운 성격이 되어갔다. 아니, 주변에 관심이 없는 것 같았다. 오직 세인이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은 어떻게 하면 보석의 힘을 자유 자재로 사용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마법을 더욱 효과적으로 사용할 수 있을까였다. 아침부터 낮까지 왕궁에 들어가 왕실 소속 마법사들에게 집중적으로 교육을 받고 저녁에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생활이 반복되고 있었지만 세인은 그런 것을 조금 도 지루하게 생각하고 있지 않았다. 아무리 신의 보석의 주인이 되었다지만 남자는 아들이 조금은 그 나이대의 소년 들이 그렇듯이 친구들과 어울려 장난을 치고 뛰어다니며, 즐겁게 하루를 보내기 를 바랬다. 하지만 세인은 또래와는 조금도 어울리지 않았고 오직 마법만을 탐구 했다. 남자는 샤르코 상단의 후계자라는 쌍둥이들에게서 세인과 만날 수 있겠냐는 요청 이 들어왔을 때 흔쾌히 그것을 허락했다. 외부로 세인을 데려가는 것은 국가에서 엄격하게 금지하고 있었지만 누구와 만나느냐는 전적으로 세인과 가족들의 의사 에 따라 결정되었다. 남자는 아들이 신의 보석의 주인이라거나 덕분에 평민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가 족들이 귀족들과 같은 대우를 받으며 살게 되었다는 사실 보다도 아들이 밝게 웃 으며 나이에 맞는 소년이 되는 것을 가장 바라고 있었다. "그럼, 쉬거라." "네." 무표정한 세인의 얼굴에 미소를 던져주고 나서 남자는 문을 닫았다. 문이 닫히는 소리와 동시에 남자의 입술 사이로 무거운 한숨이 새어나왔다. ================================================================= 대략 정신이 멍한 가운데 하루가 가고 있습니다. ;ㅁ; 오늘은 뉴페이스가 등장했습니다. 아직 어떤 페이스 인지는 모릅니다. ^ㅂ^ 저는 평소에 집에서 프리랜서로 일하고 있는데요. 이번에 제가 맡은 일은 모 텍 스트를 작성해서 넘기는 것인데 분량이 1주일 동안 책 한권 분량...이정도에요. 그래서 유체이탈 상태로 놀고 싶은 마음과 사투를 벌여가며 일하고 있습니다. 빨리 끝내고 쉬는 것만이 제 바램입니다. 모두 즐거운 하루 되세요 ;ㅁ; 가느다랗고 긴 은색 귀걸이를 도현은 손끝으로 만지작거렸다. 미세하게 새겨진 글자들이 손끝을 통해 느껴졌다. 휘트린이 자신의 마법으로 만들어 내고 세공한 귀걸이는 마법적인 힘이 담겨있는 것으로서 마녀의 피를 이은 사람이라면 귀걸이를 하고 있는 사람의 위치를 언제 어디서든 찾아낼 수 있게 해 주는 일종의 추적 마법 효과를 가지고 있었다. 덕분에 아무리 멀리 떨어진 곳에 있어도 휘트린과 스위드는 도현이 어디에 있는 지 알 수 있었다. 2년 전, 휘트린의 힘에 의해 탑으로 가게 된 직후 스위드와 만 나게 되었고 스위드가 도현의 곁에 있겠다고 선택한 이래로 도현은 늘 스위드와 함께였다. 생각해보면 이곳에서 가장 오랫동안 함께 지낸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마치 가족처럼, 형제처럼 스위드는 늘 도현의 곁에 있어 주었고 도현도 언제부터 인가 그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그런 탓인지 지금 스위드가 곁에 없다는 사실이 조금 쓸쓸하게 다가왔다. 어차피 무슨 일이 있으면 금방 만날 수 있겠지만 그래 도 거리감이 느껴지는 것은 사실이었다. 이제는 습관처럼 아침 일찍 일어나 창 밖을 내다보며 도현은 계속 귀걸이에 새겨 진 모양을 손끝으로 매만지고 있었다. 아주 미세한 세공이어서 손끝의 감각에 정 신을 집중하지 않으면 제대로 느껴지지 않을 정도였지만 도현은 민감하게 그 모 양을 손끝으로 느끼고 있었다. "도현." 얼핏 들으면 같은 목소리지만 특유의 차분함 덕분에 도현은 목소리의 주인공이 리올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귀걸이에서 손을 떼고 자리에서 일어나자 제대로 옷을 다 차려입은 리올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와 있었다. "일찍 일어났네. 카드리는?" "아직 자고 있어." "여기 앉아." 도현은 리올에게 의자를 권하고 나서 반대편에 마주 앉았다. 크레이슨 왕국 상인 연합에서 마련해준 숙소는 꽤 고급이었고 가구도 상당히 신 경을 쓴 것처럼 보였다. 같은 대륙이라도 나라가 달라서 그런지 유럽풍의 느낌을 주던 제국과는 달리 크레이슨 왕국은 약간 오리엔탈 쪽에 더 가까운 것 같았다. 의자 바닥에 푹신하게 깔린 쿠션도 꽤 현란한 붉은색이어서 처음에는 생소한 느 낌이었지만 조금 지나자 나름대로 익숙해졌다. 아무리 얼굴이 같은 쌍둥이지만 리올과 카드리는 개성이 다르고 성격이나 말투도 모두 달랐기 때문에 쌍둥이라는 느낌은 그리 강하지 않았다. 어느 한 쪽이 형이 라고 말한 적도 없지만 리올은 차분한 형 타입이었고 카드리는 말썽쟁이 동생 같 은 타입이라고 도현은 생각하고 있었다. "새로운 보석의 주인을 보게된다는 사실이 조금은 긴장이 되는 것 같아." 도현이 먼저 입을 열자 리올은 엷은 웃음을 매단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주의해야 할 점은 네 정체를 들키지 않아야 한다는 거야. 너는 우리 상단에 서 나와 카드리의 보좌 역할을 맡기 위해 함께 가는 것으로 이야기해 두었으니 까." "그런 거야 상관 없어. 그리고 너희들이 날 딘이라고만 부르면 아무도 이상하 게 생각하지 않을 테니까." "카드리가 좋아할 거야. 사실 네 원래 이름은 발음하기가 힘들다고 항상 투덜 거렸으니까." 그 말에 도현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앞으로도 그렇게 부르는 게 편하다면 그렇게 불러도 좋아. 그냥 애칭 같은 걸로 생각할 테니까." 그렇게 말하고 나서 도현은 화제를 돌렸다. "나도 너희처럼 나이가 비슷한 형제가 있었다면 어쩌면 지금이랑은 많이 달랐 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해. 나에겐 나이차이가 많이 나는 누나와 형 그리고 일 때 문에 바쁜 부모님이 계셨기 때문에 사실 가족에 대해 친밀감을 느끼지는 못했어. 아니, 생각해 보면 그건 나 자신의 문제였지. 언제나 난 나에 대한 일을 가장 먼 저 생각했거든. 그런데 지금은 그런 내 행동이 후회가 돼." 도현은 항상 쌍둥이를 보며 생각했던 것을 말했다. 쌍둥이라는 사실을 떠나서 리 올과 카드리처럼 가까운 사이의 형제를 보자 부러움이 강하게 느껴졌고 도현도 그런 형제를 가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때로는 친구처럼 때로는 누구보다 가 까운 형제로 그렇게 평생 같이 산다는 것은 의외로 만족스러운 기분을 안겨줄 것 같았다. "쌍둥이라는 건 영혼을 나눈 존재니까 보통 형제들보다는 훨씬 가깝지. 함께 있는 것이 너무나 자연스럽고 기분도 잘 이해할 수 있어. 하지만 미묘하게 여러 가지가 달라." 리올은 조금 가라앉은 도현의 표정을 보며 위로하듯 말을 이었다. "비록 지금 네가 느끼는 기분을 가족들에게 전달할 수는 없겠지만 그렇게 생 각한다는 것 자체가 큰 변화이고 좋은 일이라고 생각해. 분명 네가 이곳에 오게 된 까닭도 있을 거야. 운명의 거대한 틀은 인간으로서는 짐작할 수 없을 만큼 많 은 것들을 품고 있다고 하잖아. 나는 네가 절망하지 않아서 지금의 모습이 됐다 고 생각해. 넌 충분히 강해." 왠지 가슴이 뿌듯해지는 듯한 느낌에 도현은 미소지었다. 비슷한 나이대의 형제 가 없더라도 지금 이 세계에서 리올이나 카드리 같은 친구와 만났다는 사실만으 로도 충분히 행운이었다. 처음에는 혼자 낯선 세상에서 아무도 아는 이 없이 고 통을 견뎌야 했지만 지금은 다르다. 가장 강한 힘이 되어줄 수 있는 스위드도 있 고 휘트린도 있으며 친구들도 있다. 세상은 역시 절망만으로 이루어져 있지는 않 다는 사실을 도현은 다시 한 번 깨달았다. "카드리가 널 많이 걱정했어. 너도 알겠지만 카드리는 진심을 드러내기 싫어 해서 억지로 싫은 척 하는 일도 많고 일부러 퉁명스럽게 대하기도 하니까." "응, 뻔히 보이는데 카드리 혼자 모르고 있어서 나도 모르는 척 해 주고 있 지." 그 사람이 없는 자리에서 그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은 물론 그리 바람직 하지는 않지만 리올과 도현은 비밀을 모의하듯이 카드리에 대해 쑥덕거렸다. 만약 이곳에 오지 않았다면 평생 모르고 지나쳤을 지도 모르는 많은 것들을 조금 씩 깨닫고 배워나가며 도현은 성장하고 있었다. "샤르코 상단의 후계자인 리올, 카드리님입니다. 이쪽은 보좌역을 맡기 위해 함께 일을 배우고 있는 딘입니다." 리올이 크레이슨 왕국 상인 조합 대표인 켄의 인사 직후에 자신들을 소개했다. 도현 역시 쌍둥이들과 함께 서서 인사했다. "복잡한 이야기들은 나중에 하도록 하고 오늘은 우선 젊은 사람들끼리 이야기 를 나누는 것이 좋겠군요." 켄은 그렇게 말하고 나서 사람을 시켜 아들을 불러오게 했다. 응접실 문이 열리 고 상당히 차가운 느낌의 소년이 들어섰을 때 누구보다 놀란 것은 도현이었다. 도현은 하마터면 크게 소리를 낼 뻔 했지만 간신히 그것을 억눌렀다. 그러나 그 소년에게서 시선을 뗄 수는 없었다. "제 아들인 세인입니다." 켄이 자리를 권하자 세인은 고개를 까딱해서 인사를 하고 나서는 조용히 의자에 앉았다. 그러자 도현은 조금 더 자세히 소년을 관찰할 수 있게 되었다. 도현은 세인의 이마에 새겨진 푸른색의 선명한 문장을 보고 놀람을 감출 수가 없 었다. 색만 다를 뿐 세인의 이마에 새겨져 있는 듯이 보이는 문장은 도현의 이마에도 나타난 적이 있었고, 스위드의 이마 위에도 떠올랐던 것이었다. 저 문장이 떠오를 때는 바로 신의 보석의 힘을 사용할 때 였는데 지금은 마법도 사용하지 않고 있 는데 문장이 떠올라 있다는 사실이 도현을 놀라게 만든 것이었다. 쌍둥이 역시 세인의 이마에 신기한 문장을 보고 놀란 것 같기는 했지만 도현 만큼은 아니었 다. "그럼 저는 저녁때 따로 만나기로 하고 지금은 함께 이야기를 나누도록 하시 기 바랍니다." 상당히 정중한 태도로 나오는 켄에게 인사하고 나서 쌍둥이와 도현의 시선은 일 제히 세인에게로 향했다. 세인은 그 시선을 느끼지 않았을 리가 없는 데도 무심 하기 그지 없는 표정으로 테이블 위의 한 지점을 바라보고 있었다. "소개가 늦었군요. 저는 샤르코 가문의 리올 이쪽은 쌍둥이인 카드리. 그리고 이쪽은 우리의 보좌를 맡게 된 딘이라고 합니다. 모두 나이는 같은 19살 이에요." "세인, 17살입니다." 리올의 소개에 세인은 짧고 간단하게 대답했다. 그렇게 말하는 동안 시선은 계속 테이블의 한 지점을 향하고 있었다. 한눈에 보기에도 타인에게 관심이 없다는 사 실을 알 수 있게 해 주는 태도였다. 세인은 전체적으로 선이 가는 얼굴에 가는 체격을 가진 소년이었는데 피부색이 흰 편이어서 연약한 느낌이 나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당장이라도 쓰러져 버릴 것처럼 위태로워 보이지도 않았다. 게다가 신의 보석의 탓인지 머리카락은 검은 색이라기 보다 푸른색에 더 가까운 진한 색이었고 물에 젖은 듯이 보이는 머리카 락은 허리까지 길게 내려와 있었다. 눈동자는 선명한 푸른색이여서 이마의 문장 과 더불어 전체적으로 푸른색이라는 이미지가 강했다. 잘 생긴 것으로 치면 도현 쪽이 한 수 위였지만 세인은 독특한 분위기 때문에 눈길을 끌었다. 도현은 말 없이 계속해서 이마의 푸른색 문장을 바라보며 어째서 저 문장이 사라 지지 않고 있는 것인지 고민했다. "서로 나이도 알았으니 말을 좀 편하게 해도 될까?" 사실 나이 차이가 나고 귀족이 아닌 사이에서는 바로 말을 놓는 것이 당연한 일 이었지만 세인은 신의 보석의 주인이었기 때문에 존댓말을 쓴 것이었다. 그러나 카드리는 그런 것을 참지 못하고 바로 그렇게 말했다. "편한대로 하셔도 됩니다." 세인이 대답하자 카드리는 불만스러움을 여지없이 얼굴에 드러냈다. 그 표정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알아차린 리올이 말리려고 했지만 입이 열리는 것은 훨씬 빨랐다. "이봐, 세인. 사람과 대화를 나눌 때는 서로 상대방의 얼굴을 보면서 이야기하 는 게 당연한 거 아닌가?" 시비조로 들리는 카드리의 목소리에도 세인은 별다른 표정의 변화를 보이지 않았 다. 단지 카드리의 말 대로 고개를 들었을 뿐이었다. 그렇게 세인이 고개를 들었을 때 도현은 세인과 정면으로 눈이 마주쳤다. 그 순 간 세인의 표정에 약간의 변화가 있었지만 금새 사라지고 다시 무표정한 얼굴이 되어 버렸다. 사실 도현과 만나게 해 주기 위해서 이 자리를 마련했는데 상대방 이 저런 태도여서야 대화가 쉽게 진행될 리가 없었다. 리올이 고개를 옆으로 돌 린 채 한숨을 돌리는 사이 도현은 세인을 직시하고 있었다. 왠지 어딘지 모르게 낯익은 느낌 때문에 도현은 세인의 이마에 새겨진 푸른 문장 에서 신경을 끊고 계속 세인을 쳐다보았다. "동류로군요." 그러나 세인의 입에서 나온 한 마디 때문에 분위기는 순식간에 돌변했다. 동류라 는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모르는 사람은 이 자리에 한 명도 없었다. 긴장된 표정으로 둘을 번갈아 응시하는 쌍둥이들 사이에서 도현과 세인은 말없이 서로를 탐색하듯 바라보았다. "지금처럼 산다면 넌 머지않아 분명 후회할 일을 만들게 될 거야." 그러나 도현이 한 말은 신의 보석에 대한 것도 그렇다고 세인에 대한 질문도 아 니었다. "무슨 뜻입니까?" "그냥 같잖은 충고야. 하지만 들어두면 나쁘진 않을 거야." 그렇게 말하고 나서 도현이 입을 다물자 세인 역시 약속이라도 한 듯 입을 다물 었다. 그런 둘을 잠자코 지켜보던 카드리가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이 외쳤다. "그러고 보니, 너희 둘 알게 모르게 닮았어!" "그게 무슨 소리야, 카드리." 리올이 한숨 섞인 목소리로 말하자 카드리는 흥분한 듯이 손가락을 들어 도현과 세인을 번갈아 가리켰다. "잘 봐. 분위기 말이야. 지금은 많이 달라졌지만 처음에 딘을 만났을 때랑 비 슷한 거 같지 않아? 아카데미에서 처음 기숙사를 찾아갔을 때 말이야." 카드리의 설명을 듣고 나서 생각해 보자 확실히 리올도 그렇다는 생각을 할 수밖 에 없었다. 처음 쌍둥이가 도현을 만났을 당시에 도현은 수업에도 나오지 않았고 귀찮은 듯이 접근하는 것조차 꺼려했었다. 마치 2년 전의 도현을 보는 것 같다는 생각에 쌍둥이는 이 기막힌 우연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 지 알 수 없어졌다. ================================================================= 네, 도현이랑 세인이 만났습니다. 그러나 분위기가 심상치 않죠. 옛날의 자기 자신을 만나는 기분은 썩 좋지는 않을 것 같네요. ^^ 이제 저는 아침 겸 점심을 먹고 책을 읽어야겠어요. 해리포터 3권을 사왔습니다. 후훗;;; 저는 일을 열심히 했으나 컴퓨터 견적이 많이 나와서 일을 더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췟, 바꿀 것이 늘어나서 슬픕니다. ;ㅁ; 모두 즐거운 한 주를 시작하세요~ 도현이 크레이슨 왕국으로 떠나고 난 후 혼자 저택에 남은 스위드는 언제나처럼 조용히 책장을 넘기고 있었다. 긴 손끝이 종이와 맞닿아 넘어가는 소리만이 전부 였다. 숨소리조차 제대로 들리지 않을 정도로 스위드의 방 안은 고요했다. 그런 침묵이 이어지던 중에 갑자기 방 안의 분위기가 달라졌다. 낮인데도 불구하고 어둠이 내린 듯한 미묘하게 어두운 분위기가 주변을 감싸자 스위드는 천천히 책에서 고개를 떼었다. 그러자 예상했던 대로 그곳에는 휘트린이 나타나 있었다. 몸의 실루엣을 살려주 는 긴 검은색 드레스를 입은 휘트린은 고요하게 가라앉은 시선으로 아들을 응시 하고 있었다. 둘은 약속이라도 한 듯이 입을 다문 채 서로의 눈만을 들여다 보았다. "마음을 정한 모양이구나." 휘트린은 처음부터 대화를 하고 있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말을 건넸다. "그렇습니다." 스위드 역시 무엇에 대한 질문인지 알고 있는 것처럼 바로 대답했다. 모자간이라고 느끼게 해 주는 것은 서로 닮은 분위기일 뿐, 둘 사이에 모자간의 정감은 조금도 흐르고 있지 않았다. "원하는 것을 손에 넣기 위해서라면 설령 그것이 타인을 불행하게 만드는 일 이라고 할 지라도 신경을 쓸 필요는 없지." "그것이 지금까지 당신이 살아온 방식이겠죠. 아버지를 손에 넣기 위해 그랬 던 것처럼." 스위드는 담담하게 말했지만 눈빛은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휘트린을 당황하게 만들 수 있는 일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 같았다. 적어 도 스위드는 지금까지 단 한번도 휘트린이 곤란한 표정을 짓거나 풀지 못하는 문 제를 만나 고민하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휘트린은 전지 전능한 신처럼 모든 것 을 굽어보고 있었고, 원하는 것은 반드시 손에 넣었다. 시간의 뒷길에서 살아가는 그녀의 존재를 어느 누구도 알지 못한 채 사람들은 살 아갔지만 그녀는 그런 사람들을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고 있었다. 대륙을 움직이 는 사람들도 그녀에게는 아무 것도 아니었고 관심거리도 되지 못했다. 누구나 손 에 쥐기를 원하는 권력이나 부 역시 휘트린에게는 아무 것도 아니었다. 스위드는 보통 사람의 수명을 넘어선 시간을 살아오면서 조금씩 휘트린을 닮아 가는 자신을 발견할 때마다 소름끼치는 기분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 아무리 그녀의 곁에서 멀어지려 애쓰고 다른 삶을 살아가려고 해도 결국 몸 속에 흐르는 진한 피는 어떻게 할 수가 없는 것이었다. 부정하려고 하면 할수록 더욱 더 가까워지는 것만 느껴질 뿐이었다. "나는 이 세상의 질서에 속해있지만 벗어나 있기도 하다. 이미 오래 전에 그 틀에서 벗어난 이상 내가 구애받을 만한 세상의 규칙은 없다." 너무 단호하게 들리는 휘트린의 목소리가 스위드를 지치게 만들었다. 늘 변하지 않은 채 하늘을 지키고 있는 태양처럼 휘트린은 너무나 확고해서 스위 드에게는 벗어날 수 없는 인력이었고 거대한 힘일 뿐이었다. 휘트린을 납득 시키 려는 노력은 이미 예전에 포기했다. "결국 당신은 긴 시간을 함께 할 동료가 필요했던 것입니까?" 휘트린은 살짝 미소지어 보였다. 그 미소는 누가 보기에도 매력적이었지만 스위드에게는 조금도 그렇게 느껴지지 않았다. "여자라면 누구나 자신의 아이를 가지고 싶어하는 게 당연한 일이다. 나 역시 그 감정을 느꼈고 널 가졌다. 삶의 고독 같은 것은 이미 예전에 체득한 감정이다. 그 때문이라면 아이를 얻을 필요 따윈 없었겠지." 한때는 스위드도 휘트린을 어머니라고 불렀고 그녀에게 끝없는 애정을 갈구한 적 이 있었다. 그러나 휘트린이 준 것은 깊이를 알 수 없을 만큼 깊고 깊은 어둠과 거미줄처럼 헤어나올 수 없는 끈적한 혈연의 이어짐이었다. 이미 수십년도 전에 죽은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희미하게만 남아있었다. 옛 이야기 속에 등장할 법한 정의감으로 무장한 기사였던 아버지. 그러나 옛 이 야기들 속의 기사들처럼 그는 마왕을 물리치고 공주를 구출한 것이 아니라 그 어 둠 속에 몸을 담가 버렸다. 행복한 결말로 끝맺었어야 할 이야기는 공주의 피로 물들었고 마녀와 용사는 어둠의 탑 속에 몸을 숨겼다. 그리고 용사가 나이를 먹고 죽음을 맞이한 직후에 남겨진 아이는 탑과 마녀의 영 역 속에서 수십년의 세월을 보내야했다. 마녀는 아들을 자유롭게 놓아주지 않았 고 아들은 그 보이지 않는 거미줄에 얽힌 채 자유만을 갈망했다. 언제나 휘트린 처럼은 살지 않겠다고 벗어나고 싶다고 생각했었지만 결국은 스위 드 역시 그녀처럼 살 수 밖에 없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에 반감은 더욱 커졌다. "그 소년은 영원한 이방인으로서 이곳에 남을 수밖에 없겠지. 소년이 떠나고 나면 너 역시 홀로 남겨지게 된다. 하지만 기억은 영원하지." 스위드는 조금 의외라는 표정으로 휘트린을 바라보았다. 꽉 막힌 듯한 마음의 답 답함은 여전했지만 그래도 휘트린이 조금이지만 자신의 마음을 보여준 것 같았 다. "그 기억을 위해서라면 짧은 시간이지만 영원처럼 보낼 수도 있고, 또한 다른 사람의 불행은 신경쓰지 않아도 좋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내가 부릴 수 있는 최 대한의 사치였다. 너 역시 이제는 알 수 있겠지. 네가 진정으로 원하던 것이 무엇 이었는지. 무엇을 계속 갈구해 왔는지." "아....." 휘트린을 언제나 오해하고 있었다. 스위드는 그 사실을 이제서야 겨우 깨달았다. 단지 그녀는 자신의 감정을 거의 드러내지 않았을 뿐 그저 오랜 시간을 살아왔을 뿐 완전히 다른 존재는 아니었던 것이다. "스위드, 너는 내 아들이다. 그 사실을 부정할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다." 무표정한 듯이 보이는 휘트린의 얼굴이 온화하게 느껴졌다. 마음 속의 굳어진 응어리가 단 한순간에 녹아버리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이제 스 위드는 휘트린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아무리 70년이 넘는 시간을 살아왔어도 휘트린이 보내온 세월에 비하면 스위드의 시간은 터무니없이 짧았다. 생애 단 한 번의 사랑과 그 추억. 스위드라는 증거를 보면서 휘트린은 얼마나 길게 이어질 지 모르는 시간을 보내 왔고 또 보내려는 것이었다. 지금은 곁에 없는 소년의 얼굴이 떠올랐다. 창백한 느낌이 드는 안색을 가진 소년은 조금씩 강한 눈을 하게 되었다. 혼란스 러움으로 가득 차 있던 검은 눈동자는 스위드의 곁에서 서서히 안정을 되찾아갔 고 조금씩 중심을 잡았다.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따뜻해지고 나락 속 으로 떨어져 버릴 것 같은 마음을 추스를 수 있게 만들어 주는 존재라는 사실 하 나만으로도 스위드는 절대 도현의 곁을 떠나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휘트린은 타인의 행복을 빼앗고 죽음을 부르면서까지 원하는 것을 얻었다. 스위 드는 그것을 이해할 수 없었고 그녀가 안겨준 숙명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결국 스위드 역시 타인을 불행하게 만들었고 그 사실에 큰 죄책감을 느끼 지도 않았다. 하지만 라딘을 대신하기라도 하듯이 도현이 찾아들었고 같은 얼굴 이었지만 완전히 다른 그 소년은 스위드의 마음을 가득 차지해 버렸다. 절대로 놓치고 싶지 않다고 스위드는 강하게 생각했다. 세인을 만난 직후부터 도현은 계속 생각에 빠져있었다. 식사도 거른 채 의자에 비스듬히 걸터 앉아있는 도현을 리올은 한숨을 쉬며 바라 보았다. 예전의 자신을 떠오르게 만드는 사람을 보고 기분이 조금 이상한 마음은 알겠지만 그렇다고 저렇게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생각에 잠겨 있다니 어떻게 말을 걸어야 할 지 알 수가 없어졌다. "예전의 내가 얼마나 주변을 돌아보지 않았었는지, 오로지 내 일만 생각했었 는지 이제 확실하게 알았어. 나는 혼자서 이미 어른이라고 착각하고 있었던 거야. 아무리 남들에게는 없는 능력을 가지고 있어도 그게 성인이라는 증거는 아닌데 말이야." 갑자기 말을 꺼낸 도현을 리올은 조금 어색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그러나 금새 표정을 가다듬고 차분하게 대답했다. "나 역시 그랬어. 누구에게나 시행착오는 있는 법이잖아." "하지만 말이야. 예전의 날 보는 것 같아서 기분이 나쁘지만 그래도 가만히 내버려 둘 수가 없어. 누군가가 대리만족이라고 한다고 해도 바꿔놓고 싶어. 나는 비록 2년이 지나고 나서야 깨달았지만 세인에게는 아직 기회가 많잖아." 이미 결심을 한 듯한 도현을 보며 리올은 그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리 올은 몇 시간 전 세인과의 대화를 떠올렸다. 대화가 얼마 진행되지도 않았는데 이미 도현이 또 다른 신의 보석의 주인이라는 사실을 알아버린 세인은 그 감각 때문에 셋을 놀라게 하더니 그 후에 이렇게 말 했던 것이다. "직접 저를 만나러 오신 까닭은 잘 알았습니다. 얼굴을 비췄으니 이제 돌아가 도 괜찮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세인의 말을 듣고 쌍둥이와 도현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감정도 제대로 드러나지 않은 표정으로 그렇게 말하는 세인에게 질려버렸기 때문 이었다. 그리고 나서는 대답도 듣지 않고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제서야 카드리가 의자에 서 벌떡 일어나며 세인을 붙잡았다. "아직 용건은 다 끝나지 않았어." "그렇다면 빨리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제게는 항상 시간이 부족합니다." "그 시간이란 건 마법을 연구하는 데 쏟아 넣는 시간을 말하는 거겠지?" 불쑥 던진 도현의 말을 듣고 세인은 여전히 무심한 표정으로 고개만을 도현쪽으 로 돌렸다. "이마의 그 문장 말이야. 신의 보석의 힘을 사용할 때 나타나는 걸 텐데 그 문장이 사라지지 않는다는 건 이미 신의 보석의 힘을 완벽하게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는 뜻이겠지?" "그렇습니다." 세인은 담담하게 대답했지만 그것은 간단하게 아, 그렇군 하고 넘어갈 일은 아니 었다. 몇 년 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보석의 힘을 최대로 끌어낼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은 그 만큼 세인이 가진 재능이 뛰어나다는 것을 의미한다. 지금까지 세피를 제외하 고 신의 보석을 가진 사람들은 모두 마법을 사용하고 있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 게 되었다. 스위드는 마녀의 피를 이은데다 어둠의 보석을 얻은 힘의 주인이며 얼마나 뛰어 난 능력을 가졌는지는 아직 도현도 잘 모른다. 그러나 스위드는 보석의 힘이 아 닌 자신의 피가 주는 힘만으로도 타인의 운명을 바꿀 수 있을 정도였다. 바람의 보석의 주인이자 요정의 피를 이은 첼시피온은 일찍부터 그 뛰어난 마법 적 재능으로 이름이 널리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첼시피온이 요정의 피를 이은 탓에 마법 능력이 보통 사람들보다 월등하게 뛰어난 것이라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런점에서 보면 세인이 뭐 하나 뛰어난 것 없는 보통 인간임에도 불구하고 신의 보석의 힘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는 사실은 상당히 놀랄 만한 것이었다. 하늘이 내린 마법의 천재란 아마 세인같은 소년을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분야는 다르지만 그 천재라는 점이 세인과 도현의 공통점이었다. 천재라고 해서 모두 주변에 관심이 없고 오직 자신의 일만 생각하는 것은 아니겠 지만 세인은 그런점까지 과거의 도현과 닮아있었다. 마치 과거로 되돌아가 거울을 마주보는 듯한 느낌 때문에 도현은 세인을 가만히 놔 둘 수가 없었다. 예전 같았으면 상관도 하지 않았을 테지만 세인은 신의 보석 의 주인 중 한 명이었다. 또한 신의 보석을 가진 사람들이 모두 모이면 혹시 기 적이 일어나 도현을 원래 세상으로 보내줄 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이 있었기 때문 에 그것 때문이라도 도현은 세인을 묵과할 수가 없었다. "대체 신의 보석은 뭘 기준으로 주인을 선택하는 건지 모르겠어. 나한테나 올 것이지." 침대 위에 길게 누워 중얼거리는 카드리의 목소리를 흘려 넘기며 도현은 여전히 자신의 생각에 빠져있었고 카드리 역시 복잡하다고 생각했다. 역시 세상 일은 생각한대로만은 진행되지 않았다. 처음에는 그저 물의 보석의 주인을 만나고 호감을 얻은 후에 나중에 도움을 청할 생각이었는데 이대로는 호감을 얻기는커녕 제대로 대화를 할 수 있는 기회가 또 생길 지 어떨지도 알 수가 없게 되었다. 리올은 버릇처럼 귀걸이를 만지작거리고 있는 도현의 옆얼굴을 보며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 많이 늦었죠? =ㅂ= 요즘 슬럼프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우울한 일이 있었는데 그것이 계기가 된 건지 어쩐건지 계속 글이 손에 잡히질 않아요. 며칠 동안 겨우 두줄 정도 썼다가 오늘 겨우 한 편을 썼습니다. 마음의 우울함이 날아갈 생각을 안하니 괜히 더 마음이 무거워집니다. 성실연재를 하겠다는 목표가 저 멀리로 날아가고 있네요 -_ㅜ "세인." 두꺼운 마법 서적을 뒤적이며 독서에 열중하고 있던 세인은 아버지의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오자 무심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샤르코 상단에서 오신 분들이 이곳에서 며칠 더 머물다가 가시기로 하셨다. 나이도 비슷하고 하니 친하게 지내는 것이 네게도 이롭지 않겠니?" "저는 사람 사귀는 일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세인은 바로 대답하고 나서 다시 책으로 시선을 돌렸다. "듣자하니 세 명 모두 제국의 그로트 아카데미 마법부 소속이라고 하더구나. 마법은 네 관심 분야이기도 하니 서로 대화를 나눈다고 해서 손해 볼 일은 없을 것이라 생각한다." 세인은 고개를 돌리지는 않았지만 책장을 넘기던 손을 멈췄다. 켄은 세인이 관심 을 보이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조금은 안도했다. "친구가 되는 것은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니다. 서로 관심 분야에 대해 이야 기를 나누다보면 친구가 될 수 있는 것이지." 신의 보석의 주인이 된 이후로는 타인과의 만남을 자제하고 국가에서 제공해준 마법서적을 읽으며 마법에만 빠져있는 아들이 비록 당장은 큰 변화를 보이지 않 더라도 조금씩 달라지는 모습을 보는 것이 켄의 바램이었다. 세인 덕분에 부유함 과는 거리가 멀었던 평민인 그의 가족들이 지금처럼 누구에게도 무시당하거나 안 좋은 일을 겪지 않고 살 수 있게 된 것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행복이 라는 것은 작은 것에서 비롯되는 것이지 결코 예상도 하지 못했던 행운으로 인해 행복하게 되는 것은 아니라고 켄은 생각하고 있었다. 비록 가난하고 고단한 삶이라고 하더라도 입가에 웃음을 머금을 수 있는 삶이라 면 그것이야말로 가장 바람직한 것이라고 말이다. 세인의 모친은 세인이 신의 보 석을 얻기 전에 죽었다. 어린 나이에 어머니를 잃은 탓에 세인이 더더욱 타인에 게는 쉽게 마음을 열지 않고 말 수가 적고 냉담한 아이가 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켄을 안타깝게 만들었다. 만약 세인이 신의 보석의 주인이 아니었더라면 친구를 따라 다른 나라로 잠시 여행을 보내고 싶었지만 신의 보석의 주인을 함부 로 국외로 보내는 일은 나라에서 허락하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적어도 샤르코 상단 일행이 크레이슨에 머무는 동안만이라도 세인을 또 래와 어울리게 해주는 것이 켄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었다. 지금은 세인의 흥미를 끄는 것이 마법뿐이었지만 조금씩 달라질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켄은 버리지 않았다. "오후에 서쪽 별관으로 찾아가 보도록 해라. 내가 미리 이야기는 해 두었으니 그냥 가기만 하면 된다." "네, 알겠습니다." 세인은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 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대답하고는 다시 책을 읽 기 시작했다. 주위에 사람이 있건 없건 상관 없이 오직 마법 연구에만 빠져있는 세인은 도저히 아직 어린 나이의 소년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였다. 크레이슨 왕국에 소속되 어 있는 마법사들 역시 세인의 끈기와 집중력에는 한 수 접어줄 정도였다. 처음에도 그리 말 수가 많지는 않았지만 신의 보석을 얻게 된 이후로 세인은 감 정을 잃어버린 것처럼 한 가지만 보는 소년이 되어 버렸다. 조용히 책을 읽다가 해가 기울어지기 시작하자 세인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비록 차갑고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표정도 읽을 수 없기는 하지만 약속을 어기는 일 은 없었다. 샤르코 상단에서 온 쌍둥이와 다른 신의 보석의 주인이 머물고 있는 별관에 도착 하자 멀리서부터 웃음 소리가 들려왔다. 뭔가 재미있는 이야기라도 하고 있는지 즐거움이 웃음에 배어 있었다. 잠시 문 앞에 서 있던 세인은 더 이상 기다리지 않고 문을 두드렸다. 그러자 안 쪽에서 대답 소리가 들려오며 문이 열렸다. 문을 열어 준 것은 쌍둥이 중의 한 명이었는데 얼굴은 똑같았지만 풍기는 분위기는 확실하게 달라서 세인은 자신에 게 불만스러운 말투로 말했던 쪽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들어 와." 카드리는 문을 열어주고 나서 다시 원래 앉아 있던 자리로 되돌아갔다. 리올이 세인에게 자리를 권하고 나자 넷은 테이블 하나를 사이에 두고 둘러 앉은 모습이 되었다. "이봐, 그 표정 좀 어떻게 할 수 없어? 넌 너무 딱딱하다고." 자리에 앉고서도 아무런 표정의 변화가 없는 세인에게 카드리가 한숨 섞인 목소 리로 말을 걸었다. 리올은 조금 곤란한 표정이었고 도현은 차분하게 보였다. 카드리의 말에 세인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카드리를 바라보았 다. 그러자 카드리는 무겁게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내가 너무 많은 걸 바란 것 같다." "우리는 그로트 아카데미 마법부 5학년이고 이쪽의 딘은 신관부였지만 지금은 그만 둔 상태야." 리올은 기분 나쁜 표정의 카드리를 시선으로 살피며 입을 열었다. "알고 있겠지만 그로트 아카데미는 대륙 최고의 시설과 교수들로 유명한 곳이 지. 특히 마법부는 많은 자료들을 항상 볼 수 있고 마법에 대한 토론이나 실험도 활발해서 자기 발전에는 아주 좋은 곳이라고 생각해." 세인은 조금 관심이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것도 리올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뿐 이지 표정에 별다른 점은 보이지 않았다. "딘에게 들은 바로는 이마에 선명하게 떠오른 문장이 뜻하는 것이 신의 보석 의 힘이 최대로 발휘되고 있다는 증거라고 하던데, 그 정도라는 건 네가 마법에 대해 얼마가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고 노력을 한 것인지 알겠어." 세인의 시선이 잠시 도현쪽으로 옮겨졌다. 도현은 뭐라고 말할 수 없는 착잡한 표정으로 세인을 응시했다. "마법에 대한 뛰어난 재능에 신의 보석의 힘까지 합쳐졌으니 사실 제대로 알 려지기만 했다면 너 역시 사이드 공국의 첼시피온 왕자 정도로 유명해질 수 있었 을 텐데, 아무래도 크레이슨 왕국에선 널 내세우고 싶어하지 않는 모양이야?" 카드리가 불쑥 끼여들어 말했다. "저는 외부 사정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네가 관심을 갖지 않아도 신의 보석을 가진 이상 나라에서는 널 국가의 소유 로 생각해. 무슨 일이 생겼을 때 가장 먼저 불려나가는 건 너란 말이야!" 카드리는 언성을 높였다. "그런 건 상관 없습니다." "넌 인형처럼 살고 싶다는 거야?!" 이제 대화는 거의 카드리와 세인의 감정적이고 담담한 어색한 대화로 이어졌다. "신의 보석이라는 게 얼마나 대단한지는 알아. 신이 지상에 남기고 간 흔적이 자 인간들에게 내려준 축복이라고들 하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신의 보석만 남 고 그 사람이 사라져 버리면 뭐가 되겠어? 나라에서는 신의 보석을 가진 사람을 소중한 무기로 생각해. 전쟁이 일어났을 때 자국을 보호하기 위한 수단으로 여기 지. 그 존재를 다른 나라에 알리지 않으려고 한다고. 그렇게 평생을 묶여서 사는 것이 좋아? 네가 그토록 좋아하는 마법만 있다면?" 거의 소리를 지르다시피 하는 카드리를 세인은 담담하게 바라보았다. "그렇습니다." 그리고 세인의 입에서 나온 대답에 카드리는 질렸다는 듯한 얼굴로 고개를 돌려 버렸다. "진정해 카드리." 리올이 카드리에게 부드러운 어조로 말을 걸자 카드리는 이마에 손을 올리며 의 자에 기댄 채 고개를 젖혔다. "처음의 너랑 비슷한데, 딘. 아니 조금 더 한 것 같아. 적어도 넌 뚜렷한 이유 가 있었으니까 말이야...." 김빠진 듯한 카드리의 목소리를 들으며 도현 역시 씁쓸하게 웃었다. "어떻게 생각하면서 살던 그것은 자유지만 소중한 것은 잃기 전에는 그것이 소중하다고 깨닫지 못하는 법이야.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늦는 법이거든. 두 번 다시 돌이킬 수 없게 돼." 도현은 담담하게 먼 곳을 응시하는 듯한 시선으로 말했다. "특히 가족을 잃어버리면 발판도 없이 낭떠러지 위에 위태롭게 서 있는 기분 이 들지. 알게 모르게 사람을 지탱해주는 견고한 끈을 잃어버리면 사람은 절망할 수 밖에 없어. 정말 소중한 건 작고 작아서 눈에 띄지 않는 것이라서 잃어 버리 기가 쉬워. 사람은 그렇게 어리석지...." 나직하게 독백하는 듯한 도현의 목소리는 이상하게 귀에 잘 들어왔다. "이상하게 여기더라도 내 이야기를 들어 줘. 그냥 이런 일도 있구나 라고 넘 겨 버려도 좋아." 도현은 그렇게 말하자 쌍둥이 역시 도현을 응시했다. 도현은 자신에게 모여든 세 쌍의 시선 속에서 담담하게 말을 꺼냈다. "천재란 태어날 때부터 보통 사람들과는 다른 특별한 재능을 가진 사람을 말 하지. 보통 사람들이 노력해도 할 수 없는 걸 천재는 간단하게 해 버려. 오히려 다른 사람들이 똑같이 하지 못한다는 것이 이상하게 여겨질 정도야. 아마 신의 보석을 가진 후에 느끼는 감각이 비슷할 거야. 내게는 언어를 익히는 데 재능이 있었어. 이곳에서는 그리 큰 쓸모가 있지는 않지만 원래 내 세상에서는 언어에 뛰어나다는 것은 그것이 바로 출세나 재산을 이어질 정도로 대단한 거였지. 나는 자연스럽게 여러 나라의 말을 익히고 나서는 오직 언어에만 매달렸어. 익히는 게 재미도 있었고 조금 더 많은 것을 알고 싶었어. 그래서 그것만 생각했지. 주위에 서 날 어떻게 보는 지 주변 사람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도 사실 별로 관심이 없었어. 지금 이곳에 있지 않다면 아마도 계속 그 생각은 바뀌지 않았을 거야." 쌍둥이도 처음 듣는 도현의 직접 적인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 채 아무 말도 꺼내 지 않았다. "가족이란 뭘까? 나는 가족에 대해서는 정말 존재하는 게 너무 자연스러워서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것처럼 행동하고 살았어.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형과 누나와 막내가 천재라는 사실 때문에 조금 어렵게 생각하지만 그래도 소중하게 여기는 부모님이 있었지. 하지만 난......지금 여기에 있어. 가족이 없는 낯선 곳 에." 도현은 뭔가 아련한 기억을 더듬는 것 같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여기에 와서야 비로소 깨달았지. 가족이 나에게 얼마나 단단한 울타리가 되 어 주었는지. 작고 사소한 관심이 얼마나 날 편안하게 해 주었는지. 아무리 얼굴 이 같아도.....타인은 결코 가족이 될 수 없어. 그리고 친구조차 없이 오직 나 자신 만을 바라보던 삶이란 게 얼마나 허무한 건지 이제는 알아....." "딘...." 카드리는 안타까운 표정으로 이름을 불렀다. 그러자 도현은 엷게 미소지으며 카 드리를 돌아 보았다. "사람은 결코 혼자서는 살 수가 없어. 누군가를 지탱해 주기도 하고, 위안 받 기도 하면서 함께 살아야 해. 모든 것을 잃어 버리고 나서야 소중함을 깨닫는 건 정말 바보 같은 짓이지. 되돌리려고 해도 돌이킬 수가 없거든. 지금은 신의 보석 이 모두 모인다고 해도 내가 바라는 기적이 일어날지 어떨지 확신을 할 수가 없 어. 항상 자고 일어나면 이상한 꿈에서 벗어나 가족들이 있는 내 집에서 깨어날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었지만 이제는 그런 희망은 품지 않고 있어. 벌써 2년 이나 지났잖아? 의외로 적응력이 빨라서 자연스럽게 이 세계의 공기에 익숙해진 날 보면 놀라곤 해." 세인은 여전히 도현쪽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표정도 담담 해서 뭘 생각하고 있는 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도현은 세인의 그런 표정이나 생각을 조금은 읽을 수 있었다. 의식의 변화라는 것은 다른 사람이 바란다고 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본인 이 깨닫지 못하면 아무리 누군가 옆에서 소리를 친다고 해도 달라지는 것은 없 다. 도현은 세인이 조금이라도 바뀌길 바랬지만 그것이 힘들다는 사실은 누구보 다 잘 알고 있었다. 동류는 동류를 알아 본다. "네가 언젠가 내가 한 말을 이해하게 되고 실제로 그런 일을 겪지 않기를 바 랄 뿐이야. 세인." 도현은 그렇게 말하고 살짝 웃었다. 창백해 보이는 안색에 웃음이 피어오르자 무척 인상적이었다. 도현은 이제 소년 에서 어른이되는 문턱에 아슬아슬하게 서 있었다. "그래서 후회하고 있습니까?" 세인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도현은 확실하게 대답했다. "응. 과거를 후회해.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 이런 곳에서라도 깨닫고 달라진 것 에 대해서는 고맙게 생각해." 왠지 홀가분해진 듯한 느낌이 들어서 도현은 조금 더 환하게 웃을 수 있었다. 아직은 어른이 아니고 모든 것에서 완벽해 질 수 없다는 것을 도현은 이제 잘 알 고 있었다. 아무리 개인의 힘이 뛰어나도 거대한 흐름이나 압도적인 힘 앞에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 역시 잘 알게 되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듯이 사 람도 조금씩 변하고 시행착오 끝에 조금씩 잘못을 고쳐 나간다. 과거의 자신을 보는 듯한 세인이 안타까운 것은 사실이었지만 다른 사람의 인생 에 개입하고 변화시키는 것은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실하게 알았 다. 그저 지금은 마음이 가벼워진 듯한 기분이 좋았다. 비록 많은 것을 잃었어도 얻은 것이 있었고, 무엇보다 도현은 지금 이렇게 낯선 세상의 공기를 마시며 살아있었다. ============================================================= 네 번째 파트는 왠지 길었던 것 같습니다. 연재 텀이 길어서 더 그렇게 느껴진 것 같아요. ^^ 네 번째 파트 그림자 모두 끝났구요. 다음 편 부터는 다섯 번째 파 트가 시작됩니다. 검푸른에 이어지는 광풍. 신의 보석 시리즈는 느긋한 마음으로 걸어가기로 했습 니다. 좀 오래 걸리더라도 완결까지 쓰고서 제 마음에도 홀가분한 기분이었으면 좋겠어요. 모두 즐거운 하루를 보내시길 바라면서. ^-^ Part 5. 지금 여기에 있는 모든 것 "아버님, 무슨 일로 부르셨는지요?" 작은 꼬마답지 않게 얌전하고 예의바른 태도로 카예드는 케이스워크에게 물었다. 최근 얼굴이 상당히 어두워진 듯이 보이는 케이스워크는 살짝 미간을 찌푸린 채 서명을 하고 있다가 들려온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함께 식사라도 하면서 이야기 하자고 불렀다. 카예드." 그러나 어두웠던 케이스워크의 얼굴은 카예드를 보자 금새 풀어졌다. 카예드는 보이지 않게 작은 한숨을 내쉬고 나서 집무실 안쪽의 의자에 앉아 케이 스워크의 일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서명을 마친 케이스워크가 의자에서 일어 나자 시종이 집무실 문을 열었다. 카예드는 케이스워크와 나란히 식당으로 향했다. 얼굴을 마주할 기회는 그리 많 은 편이 아니지만 카예드에게 상당히 많은 신경을 써주는 케이스워크는 일상적인 이야기를 건네며 이것저것 근황을 물었다. 주로 별궁에서만 지내며 본궁에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아 카예드의 존재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오히려 많았지만 카예드는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처지 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황실의 피를 너무 짙게 이어받은 탓에 조숙해진 것일 지도 모르지만 카예드의 표정이나 태도는 조금도 아이답지 않았다. 식당에 들어선 후 자리에 앉아 음식이 나오는 동안 별로 대화는 오고가지 않았 다. 에피타이저를 내가고 난 후 본 요리가 나오기를 기다리며 음료수로 목을 축 이는 동안 케이스워크가 다시 입을 열었다. "카예드." "네, 아버님." 잠시 카예드를 응시하던 케이스워크는 바로 말을 꺼냈다. "나는 너를 황태자로 할 생각이다." 담담한 그 말에 카예드의 표정이 흔들렸다. 기대조차 상상조차 하고 있지 않았던 말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정식으로 황비를 맞이하고 자식이 태어난다고 해도 황태자는 너다." "....아버님..?" 그렇게 말하는 케이스워크의 표정은 무척이나 단호해서 카예드는 더 이상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케이스워크는 마치 무언가를 결심하기라도 한 것처럼 보였다. 기대하고 있지 않던 일이기는 했지만 케이스워크가 그렇게 정했다면 카예드는 따 르는 것 이외에는 방법이 없다고 생각했다. "아버님의 이름에 누를 끼치지 않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내일부터는 본궁으로 옮기고 황태자에게 어울리는 수업을 받도록 해라. 정식 으로 발표하는 것은 귀족들에게도 초대장을 보내야 하니 보름은 지나야 할 것이 다." "알겠습니다. 아버님." 케이스워크는 미리 그 점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는지 카예드에게는 통보하기 위해 부른 것과 다름이 없었다. 그 후로는 일상적인 대화를 주고 받았지만 카예드는 뭔지 모를 붕 뜬 기분 때문 에 무슨 대화를 나누었는지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 본궁에서 나와 별궁으로 돌아가던 길에 카예드는 한 사람과 마주쳤다. 직접 만나는 것은 처음이었지만 그가 누구인지는 알고 있었다. "황태자 전하께 인사드립니다." 빈틈없는 인상을 풍기는 제국 재상 테이드 라메르는 정중하게 인사했다. 아직 정식으로 황태자가 된 것은 아니라고 대답하려 했지만 카예드는 테이드에게 서 뭔가 다른 것을 느끼고 그냥 조용히 인사를 받았다. "이곳에는 무슨 일로 나오셨는지 모르겠군요." 카예드는 바쁜 재상이 일부러 자신을 찾아온 이유를 모르겠다고 직설적으로 물었 다. "황태자로 결정 되었다고 해도 아직 지지세력이 없으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 다. 지지세력이 없다는 것이 얼마나 치명적인지는 알고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제 첫 번째 측근이 되고 싶다는 말을 하러 오셨습니까?" "그렇습니다. 전하." 카예드는 일부러 이유를 묻지 않았다. 세상에는 어떤 목적 없이 순수하게 도움을 주는 사람은 드물다는 사실을 카예드는 이미 훨씬 전부터 알고 있었다. 하지만 어떤 목적을 가졌건 카예드에게 지지세력이 필요하다는 것은 사실이었고, 첫 번 째 지지자가 제국의 재상이라는 것은 큰 도움이 될 터였다. "전하는 분명 훌륭한 황제가 되실 수 있을 것입니다. 황제 폐하의 피를 진하 게 이은 분이니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담담하게 말하는 테이드의 얼굴을 카예드는 조용히 올려다 보았다. 비록 별궁의 한쪽 구석에서 조용히 살아온 카예드였지만 황실에 얽힌 비화나 스 캔들 흐름 정도는 잘 알고 있었다. 그저 은신하듯이 조용히 사는 것 만이 전부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리고 카예드가 태어나기 전부터 그리고 지금까지 가장 큰 화 제가 되었던 것이 대귀족인 라메르 백작가에 얽힌 스캔들이라는 것과 그 피해자 의 한 명이 테이드라는 것 역시 알고 있었다. 보통 아이에 비해 생각이 깊은 카 예드였지만 테이드의 생각이나 마음까지는 읽을 수 없었다. 돌아가기 위해 마차에 오를 준비를 하며 크레이슨 왕국의 상인 연합의 간부들과 인사를 나누는 쌍둥이의 뒤에 서서 도현은 이 자리에는 나오지 않은 세인을 생각 했다. 과연 도현이 했던 말이 세인에게 영향을 조금이라도 주긴 했을까 하는 의 문이 치밀어 올랐다. 하지만 도현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한 사람의 사고 방 식을 바꾸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이곳에 처음 왔을 때 정신을 잃었다가 눈을 뜬 순간 낯선 세상에 낯선 사람들만 이 가득한 현실에서 도현을 있는 그대로 봐 준 사람은 없었다. 사람들은 눈에 보 이는 것만을 믿으며 자신이 실제로 겪지 않으면 어떤 것도 바꾸려들지 않는다. 인사를 마친 쌍둥이가 마차에 오르자 도현 역시 마차에 올라탔다. 문이 닫히고 마차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하는 동안에도 이마에 선명한 푸른 문장을 가진 세 인의 모습은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도현은 세인의 일은 기억의 한 구석으로 밀어두고 지금은 눈앞의 현실을 바라보 며 즐기기로 했다. 항상 이루어지지 않은 일을 생각하며 시간을 소진하기에는 주 어진 시간은 짧았다. 열흘간에 걸친 크레이슨 왕국 방문 일정이 끝나고 다시 저택으로 돌아왔을 때 도 현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스위드의 미소. 그리고 한 장의 초대장이었다. 발신인은 첼시피온 왕자. 첼시피온의 동생인 세트란이 정식 후계자로 결정된 것을 기념하기 위한 자리였 다. 첼시피온이 사이드 공국의 후계자가 되지 않은 것이 조금 의외였지만 긴 수 명을 가진 첼시피온에게 나라를 맡기면 아마 다른 왕족들의 반발이 클 것이기 때 문에 그렇게 결정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첼시피온에게 그렇게 좋 은 감정은 남아있지 않지만 자신의 선택에 의해 혼혈로 태어난 것도 아닌데 인간 들 틈에서 그런 외모와 능력을 가지고 살아가는 첼시피온이 조금 가엾기도 했다. 연회에 참석할 것인지를 묻는 스위드에게 도현은 흔쾌히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했 다. 예전 같았으면 한참을 망설였겠지만 지금은 그렇게 망설일 필요가 없었다. "첼시피온은 우리의 의뢰인 중 한 명이니까 공식 행사에 참석하는 것도 예의 겠지." "도현." 진지하게 도현의 이름을 부르는 스위드를 도현은 흔들림 없는 맑은 눈동자로 올 려다 보았다. "너와 언제나 함께라는 내 약속은 변하지 않는다." "고마워, 스위드. 스위드에게는 정말 몇 번 인사를 해도 모자르다고 생각해. 지금의 내가 있게 해 준 건 스위드니까." 스위드의 얼굴을 눈 한번 깜빡이지 않고 바라보던 도현은 입가에 미소를 떠올리 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언제까지고 스위드에게 기대고 있지만은 않을 거야. 함께 있는 게 당 연하고 함께 있기를 바라는 만큼 더욱 기대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 내가 제대로 일어설 수 있도록 도와줬으니까 이제는 내가 혼자 걸어나가는 걸 지켜봐 줘." "그래...." 스위드 역시 미소지었다. 그것은 굳은 얼음이 녹아 내리는 듯한 부드러운 미소였다. "나는 스위드가 휘트린을 조금은 이해했으면 좋겠어. 세상에서 단 둘 뿐인 가 족이잖아." 스위드는 도현을 조용히 응시했을 뿐 그 말에 대한 대답을 하지는 않았다. "아무리 사이가 나빠도 같은 하늘 아래에서 숨쉬고 있다는 사실이 나는 너무 부러워. 이제는 점점 더 확실히 알게 되니까. 내가 두 번 다시 돌아갈 수 없을 지 도 모른다는 걸 말야." 도현은 고개를 숙였다가 다시 들어 올렸다. 눈가가 조금 젖은 듯이 보여서 스위 드는 손을 뻗으려 했지만 이어지는 도현의 말을 듣고 움직이려던 손을 다시 내렸 다. "어쩌면 내가 이 세상에 오게 된 것은 하늘이 내린 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어. 그곳에서는 평생 소중함 따윈 모르고 오직 나만 보며 내 생각만 하면서 살았을 테니까. 사람은 언제나 후회하고 후회하면서 사는 건가봐." 도현의 눈동자가 흐릿해졌다. "이곳에 돌아왔을 때 너무나 편안함을 느꼈어. 이제 이곳이 내 집이라는 생각 이 들어서 그리고 나를 기다려 주는 스위드가 있어서 편안했어. 하지만 그럴수록 점점 더 그리워져...." 눈물이 금방이라도 흐를 듯 했지만 물방울은 떨어지지 않았다. "이제는 피하는 일은 안 할 거야. 어떤 일이 닥치건 간에 정면에서 맞설 거야. 이게 내 삶이고 앞으로 내게 주어진 시간을 어떻게 보내는지는 모두 내 마음에 달린 거니까. 후회 없이 그렇게 살고 싶어." 아픔을 딛고 일어서는 도현을 스위드는 아련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도현의 마 음이 금방이라도 손에 잡힐 것처럼 선명했다. 분명 지난 며칠간의 여행이 도현에 게 또 다른 영향을 주었으리라는 사실을 스위드는 금방 알 수 있었다. 스위드는 오랜 시간에 걸쳐 조금씩 달라졌다. 주어진 시간의 길이가 보통 사람과 는 아예 달랐기 때문에 또한, 닫힌 공간에서 지냈기 때문에 그랬다. 하지만 도현 은 짧은 시간에 많은 것을 보고 듣고 느끼고 배운다. 처음에는 그저 쉽게 부서질 것 같이 혼란스럽게만 보였던 어린 소년이 이제 거목처럼 단단하게 여물어가고 있었다. "나는 분명 너 보다 오랜 시간을 살겠지. 네가 점점 나이를 먹어 청년이 되고 내 외모보다 더 나이가 들게 되더라도 나는 늘 이 모습이겠지. 휘트린이 그렇듯 이. 하지만 네 생명이 지상에 머무는 동안 나는 늘 네 곁에 있겠어. 네 모든 것을 지켜보겠어." 스위드는 맹세하듯이 한마디 한마디 또렷하게 말했다. "너와 함께 하는 동안 내 시간을 모두 네게 줄게." 도현은 환하게 웃었다. 그리고 먼저 손을 내밀어 스위드의 손을 잡았다. 길고 하얀 손가락은 차가워 보였지만 맞잡은 손은 따뜻했다. 이제 이곳이 바로 집이고 자신이 있어야 할 장소라는 사실을 도현은 마음 속에 새겼다. + + + 첼시피온은 초대객 명단을 일일이 확인했다. 제국에서는 스위드와 라딘. 테이드와 제국의 황태자로 발표된 카예드. 그리고 샤 르코 상단의 쌍둥이. 다른 나라에서는 세피디나를 비롯한 왕족이나 유력 귀족이 초대되었다. 일단은 신의 보석을 가진 자들에게는 모두 초대장을 보냈지만 확답을 받은 것은 라딘과 세피디나 정도였다. 연회 중비는 하루가 다르게 진행되고 있었다. 첼시피온 역시 연회 준비를 위해 바쁘게 움직이며 직접 명령을 내리기도 했다. 페르마 대공왕은 언제나 입버릇처럼 첼시피온에게 이 나라를 지탱하는 기둥이 되 어야 한다고 말했고 첼시피온은 그 말을 마음속에 새겼다. 사이드 공국의 왕족 중에 가장 유명한 것은 페르마 대공왕과 첼시피온이었다. 페르마 대공왕은 대륙 을 움직이는 다섯명 중의 한 명이었으나 첼시피온은 뛰어난 외모와 요정과의 혼 혈이라는 사실 그리고 마법의 재능 덕분이었다. 그 때문에 첼시피온의 다른 형제 들은 그리 알려져 있지 않았지만 첼시피온은 형제들에게는 좋은 형이었다. 올해로 18세가 된 세트란은 첼시피온의 외모와는 다르게 곧은 적갈색 머리카락을 가진 건장한 체격의 청년이었다. 겉모습만 보면 첼시피온 쪽이 동생으로 보일 지 경이었지만 첼시피온의 자연스러운 차분함이 외모에서 풍겨오는 차이를 뒤바꿨 다. 초대객 명단을 확인하던 첼시피온이 동생의 방문을 받은 것은 점심 시간에서도 한참이 지난 시간이었다. 조금 화난 듯이 굳은 얼굴로 첼시피온의 서재에 들어온 세트란은 거칠게 의자에 주저앉았다. =============================================================== 사촌동생이 놀러와서 여기까지 쓰다가 말았습니다. 그래도 올려봅니다. ^^;;; 이제 새로운 파트의 시작이구요. 또 새로운 일들이 일어나게 됩니다. 시간 참 빠르군요. 이제 곧 12월....... 멍..... 모두 감기 조심하세요, 저는 추워서 밖에 안 나가렵니다. =ㅂ= "내가 왜 후계자가 되어야 해? 나보다 형이 더 낫다는 건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잖아!" 한참 동안 입을 다물고 있다가 세트란은 불쑥 내뱉듯이 말했다. "나는 왕이 될 수 없었어, 처음부터." 첼시피온은 온화한 표정으로 동생을 바라보았다. 이제 누가 봐도 세트란 쪽이 훨씬 나이가 많아 보인다는 사실을 첼시피온은 다시 한번 느꼈다. 그리고 그것은 형제들과의 명확한 차이를 보여주는 증거이기도 했 다. "인간이 아닌 자가 왕이 된 전례는 한 번도 없었다, 세트란." 차분하게 말하는 첼시피온을 세트란은 입을 꾹 다문 채 흥분이 가라앉지 않은 표 정으로 바라보았다. "나는 그저 사이드 공국을 흔들림 없이 지키는 것만을 생각하고 있고 그걸로 만족한다." 세트란은 금새 무거운 표정이 되었다. 처음부터 첼시피온은 형제들과는 달랐고 시간이 흐르면서 그 차이는 점점 더 명 확하게 드러나고 있었다. "진심으로 축하한다, 세트란." 부드럽게 미소짓는 첼시피온을 딱딱한 표정으로 바라보고만 있던 세트란은 한참 동안 입을 다문 채 표정을 굳히고만 있었다. 그러다가 시종이 들어와 식어버린 찻잔을 바꾸고 가는 동안에도 세트란은 굳은 얼굴로 테이블만 바라보고 있었다. "하고 싶은 말은 따로 있겠지?" 첼시피온이 입을 열자 세트란은 시선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는 곧고 강한 시선으 로 첼시피온을 바라보며 씹어 삼키듯이 말을 꺼냈다. "리카도 제국의 황제......그 자식만은 가만 두지 않겠어...!!" 첼시피온은 희미하게 웃었다. 어차피 자신의 입으로 진실을 밝힌 이상 주변 사람들에게 알려지는 것은 시간문 제였다는 사실은 잘 알고 있었다. 보통 인간과는 다른 정신 세계를 가진 첼시피온이었지만 아직 그때의 일은 다 잊 지도 못했고 지나치게 선명하게 남아있었다. 아마 아무리 오랜 시간이 지난다 해 도 설사 케이스워크가 죽어서 없어진다고 해도 과거는 사라지지 않는다. "형 앞에서 맹세하겠어." 세트란을 바라보며 첼시피온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다, 세트란." 첼시피온은 어두운 그림자를 가진 제국의 젊은 황제를 떠올렸다. 멀리 떨어진 곳 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자색 눈 속에 담긴 광기가 손에 잡힐 듯이 가깝게 느껴 졌다. 몇 년만에 각국에 활짝 문을 열고 손님을 맞이하는 사이드 공국 왕성은 분주하고 활기가 넘쳐 흐르고 있었다. 시녀들과 시종들은 바쁘게 움직이며 연회 준비와 손님 안내에 신경을 썼고 귀족 들이나 왕족들 역시 각자 손님을 맞이하는데 바빴다. 각국에서 왕족이나 고위 귀 족들이 새로운 후계자 등극을 축하하기 위해 모여들어 왕성은 마치 살아 있는 생 물로 변모한 듯이 활기에 넘쳤다. "리카도 제국의 재상 테이드 라메르 백작님이십니다." 화려한 마차가 멈춰서고 깔끔하게 차려입은 테이드가 마차에서 내려섰다. 시종의 안내를 받아 응접실에 도착하자 그 곳에서는 화사한 금색 의상을 입은 첼시피온 이 기다리고 있었다. 갸름한 얼굴에 여유있는 미소를 떠올린 첼시피온은 테이드에게 자리를 권하고 나 서 손수 차를 따랐다. "동생은 이미 도착 했습니다." "네." 테이드는 대답하고 나서 조용히 찻잔을 들어올렸다. 마법을 통해서가 아니라 직접 얼굴을 대면할 기회가 바로 코앞으로 다가온 것이 었지만 마음은 이상할 정도로 평온했다. 진실을 알았기 때문에 오히려 집착이 사라졌다. 아니, 조금 먼 거리에서 냉정하 게 생각할 수 있게 되었다. "그보다 계획은 잘 진행되고 있습니까?" "물론입니다. 실패는 없을 것입니다." 첼시피온은 온화하지만 단호한 어조로 대답했다. 지금까지 대륙은 다섯 명의 유력자들이 서로를 견제하며 겉으로는 평화로운 분위 기를 유지해왔다. 그러나 내부에서는 팽팽한 긴장과 알력이 오고가고 있었고 확 실하게 주인이 드러나지 않았던 보석에도 주인이 생겨 대륙은 오랜만에 모든 신 의 보석의 주인이 탄생한 시대를 맞이했다. "이번 행사에는 유사 이래 가장 많은 수의 신의 보석을 가진 자들이 모이게 됩니다. 어떤 나라에서 어떤 신의 보석을 가지고 있는 지는 왕족들만이 확실하게 알고 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모든 사람들에게 그 사실이 알려지게 될 것입니 다. 그리고 제국은 이제 자신이 믿고 의지할 것이 없어졌다는 사실을 확실히 깨 닫게 되겠지요." 첼시피온이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테이드는 완벽하게 알지 못하고 있었지만 목 적을 이룰 수만 있다면 어떤 방법을 사용하건 간에 상관할 생각은 없었다. 제국 이라는 이름이 가진 무게는 이미 테이드에게는 희박한 것에 불과했다. 가문을 짓밟고 가족 관계를 부서지게 만든 이래로 테이드에게 제국은 그 의미를 상실해 버렸다. 최악의 경우 설사 제국이 멸망의 길을 걷게 되고 최후의 재상이 된다고 해도 테이드는 아쉬움을 느끼지 않을 것이다. "이제 곧 대륙 최대의 연회가 시작될 것입니다." 첼시피온의 입가에 떠오른 미소를 테이드는 조용히 응시했다. 산책하듯 천천히 연회장을 거닐며 도현은 내부 광경을 감상하고 있었다. 제국에서도 황궁에 머무른 적이 있었지만 그 때는 여유롭게 내부를 구경할 시간 은 없었기 때문에 영화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왕족의 의식이라거나 연회장의 광 경을 체험하는 것은 무척 신기한 느낌이었다. 벌써 2년 정도 이 곳에 있었고 이 곳의 문화에 어느 정도 적응을 했다고는 해도 이런 장소에 오게되면 신기한 것은 당연했다. 화려하게 장식된 연회장 내부 모습이나 분주하지만 절도 있게 움직이는 시녀나 시종들의 모습이 마치 잘 훈련받은 배우들이 자기 역할에 몰입하고 있는 것 처럼 보이기도 했다. 도현은 검은색 예복 차림으로 연회장 한쪽에 서서 조용히 내부를 관찰했다. 그러던 어느 순간. 연회장에 약간의 술렁임이 퍼진다 싶더니 시종장이 중후한 음 성으로 센왕국의 공주 세피디나의 입장을 알렸다. 세피디나는 연회장에 들어서자 마자 주변을 한바퀴 시선으로 훑더니 곧 목표한 것을 찾아내고는 곧장 다가왔다. "딘!" 밝은 목소리로 말하며 세피가 도현의 앞에 와서 멈춰섰다. 예전에 의뢰를 받아 함께 여행하던 때와는 달리 세피는 화려한 붉은 색 드레스를 걸치고 얼굴에도 곱게 화장을 하고 있어서 정말 여성스럽고 귀여워 보였다. "잘 어울리네." 진심을 담아 이야기하자 세피는 살짝 웃으며 도현에게 왼손을 내밀었다. 도현이 예의바르게 그 손을 잡고 세피의 옆에 서자 세피는 도현의 에스코트를 받 으며 천천히 걸음을 걷기 시작했다. "스위드는?" "방에 있어. 혼잡한 곳은 별로 좋아하지 않거든." 정식으로 예식이 시작되기 전에 연회장에서 서로의 친분을 다지기 위해 사람들이 모여 담소를 나누고 있는 자리이니 만큼 참석은 자유였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이 온 것 같아." 도현이 연회장 내부를 둘러보며 말하자 세피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행사가 아니면 대륙의 왕족들이나 유명인사들이 한 자리에 모일 기회는 흔치 않으니까." 도현은 다시 한 번 연회장 내부를 둘러 보았다. 아는 얼굴은 전무했지만 사람들은 모두 화려한 예복을 차려입은 채 서로에게 인 사를 하며 말을 걸기에 바빴다. "후계자로 내정된 세트란 왕자는 첼시피온 왕자와는 전혀 다른 타입이야." 도현이 묻지는 않았지만 세피는 설명하듯이 말을 이어나갔다. "나와 첼시피온 왕자의 약혼 이야기가 오고 가던 무렵 몇 번 만난 적이 있었 는데, 뭘 생각하는지 알 수 없는 첼시피온 왕자와는 달리 좀 감정적인 면이 강한 타입이지. 하지만 솔직하고 꽤 괜찮다고 생각해. 외모는 첼시피온 왕자에 비할 수 없지만 여자라면 끌릴만한 매력을 가지고 있어." "너도?" "물론 나도 호감은 가지고 있지만 마음이 내키진 않아. 오히려 나는 딘 쪽이 마음에 드는데?" "빈말이라도 고마워." 도현의 대답에 세피는 살짝 눈을 흘겼지만 둘은 서로의 얼굴을 보며 금새 웃고 있었다. "신의 보석을 가진 자들끼리는 서로 끌리는 모양이군요." 연회장이 한 눈에 내려다 보이는 테라스 위에서 테이드는 한 점을 뚜렷이 응시하 며 입술을 움직였다. 테이드의 곁에는 어디서나 눈에 띄는 아름다운 외모의 주인 공인 첼시피온이 서 있었지만 테라스 위에는 둘 밖에 없었기 때문에 둘은 주위에 신경쓰지 않고 마음껏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서로가 금방 신의 보석의 주인이라는 사실을 알 수는 없지만 본능적으로 끌 리는 것은 사실입니다." "저런 식으로 밝게 웃는 모습을 본 기억은 아무리 과거를 더듬어 보아도 없는 것 같습니다." 테이드는 멀리 보이는 도현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말했다. 금방이라도 손에 닿을 수 있을 만한 가까운 거리에 있었지만 테이드는 자신의 존 재를 벌써부터 드러내고 싶지는 않았다. 이제 동생이 아닌 완전한 타인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그래도 마음 속을 채운 감정은 사라지지 않는다. 익숙한 얼굴, 익숙한 목소리, 익숙한 동작. 테이드는 문득 어째서 이토록 같은 존재를 눈앞에 보냈느냐고 신에게 묻고 싶어 졌다. 그렇지만 이미 이 지상에 신은 남아있지 않다. 신은 그저 자신의 흔적만을 남긴 채 사라져 버렸다. 고대로부터 이어져 내려오던 많은 것들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변화하고 달라진 다. 사람이 달라지듯이 언제나 변하지 않을 것처럼 보이던 많은 것들 역시 달라 지는 것이다. 테이드는 이미 자신이 되돌아갈 수 없는 길의 종착지를 향해 달려가고 있다는 사 실을 확실히 깨닫고 있었다. 하지만 절벽 끝에 서 있어서 아래로 뛰어내릴 수 밖 에 없는 상황도 그리 나쁘지는 않았다. "이제 예식이 시작됩니다." 조용히 말하는 첼시피온의 목소리는 마치 무언가를 선고하는 것처럼 들렸다. ================================================================ 오랜만에 슬럼프의 늪에서 고개를 내밀고 돌아왔습니다. 완전히 벗어난 건 아니지만 조금씩은 쓸 수 있게 됐네요 ^^;; 기다려주신 분들께 죄송스럽습니다. 늦었지만 새해 복 많이 받으시구요. 조금씩이라도 보여드릴 수 있도록 노력할게요. ^-^ 엄숙한 가운데 진행되는 예식을 도현은 멀리 떨어진 자리에서 지켜보았다. 예식이 시작되기 얼마 전에 방에서 나온 스위드와 나란히 서서 도현은 사이드 공 국의 왕족들이 공식 석상에 모여 있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 자리에는 처음 보는 페르마 대공왕도 있었고 멀리서도 확연히 눈에 띄는 첼시 피온과 첼시피온의 형제들로 보이는 왕족들도 있었다. 그리고 이번 예식의 주인공이자 다음 사이드 공국의 왕이 될 세트란에게 시선을 돌리자 세피가 했던 말을 확실히 깨달을 수 있었다. 첼시피온의 동생이라는 사실 을 미리 알고 있지 않았더라면 혈연 관계를 의심할 정도로 세트란과 첼시피온은 외모가 전혀 달랐다. 아니, 첼시피온만이 동덜어진 외모라고 설명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도현이 관찰하는 시선을 던지는 동안 예식은 끝나고 세트란은 페르마 대공왕의 곁에 나란히 섰다. 왼쪽에 조용히 서 있던 첼시피온은 온화한 표정으로 동생을 응시하고 있었다. 페르마 대공왕은 위엄있는 목소리로 사람들을 둘러보며 말을 건넸다. ".....오늘 이 자리에 참석해 주신 여러 나라의 귀빈 여러분께 감사 인사를 드립니다. 내일까지 베풀어질 연회를 부디 마음껏 즐기시기 바랍니다." 이윽고 대공왕의 말이 끝나자 연회장에 음악이 울려 퍼지며 사람들의 말소리가 이곳저곳에서 새어나왔다. 도현도 스위드와 함께 한쪽으로 물러나 간단하게 음식을 먹으며 이야기를 나눴 다. 연회장에서의 시간은 금방 흘러갔다. 페르마 대공왕은 연회가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자리를 떠났고 오늘 연회의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세트란 역시 한시간 정도 후에 연회장을 나갔다. 다른 왕족들역시 하나 둘씩 자리를 뜨고 마지막까지 남은 것은 첼시피온 뿐이었다. 도현은 알고 있는 얼굴 중에서는 세피와 이야기를 나눴을 뿐 다른 사람들에게는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첼시피온과 나란히 서 있는 테이드의 모습을 목격했지 만 이제 도현은 그를 아무렇지 않게 볼 수 있었다. 예전처럼 형이 떠올라 마음에 미련이 생기지도 않았고 뭔가 말을 해야겠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이렇게 시간이 흐르면서 사람은 달라지는 것이구나 하는 사실을 도현은 깨달았 다. "이제 마음이 편해진 것 같아." 도현은 누구를 지칭해서 말하지 않고 그냥 생각나는 대로 말했다. 스위드는 그런 도현을 조용히 응시했고 세피는 온화한 표정을 떠올리며 웃어주었 다. 그렇게 마음의 무게를 훌훌 털어버리고 있던 도현은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꼈 다. 주위를 둘러 보았지만 이상한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연회장 창 밖은 이미 어둑 어둑해져 있었고 연회장 안은 온기와 사람들의 목소리로 가득했다. "....스위드." 이름을 부르며 스위드의 얼굴을 바라보자 스위드의 표정역시 약간 굳어져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딘..." 세피역시 조금 불안한 표정이 되었다. 그때였다. ".....!!!" 순간적으로 오싹한 느낌 때문에 고개를 돌린 순간. 쾅하는 굉음이 들리고 그 순간 희뿌연 먼지가 피어 올랐다. 마치 거대한 지진이 일어나기라도 한 듯이 지축이 흔들리고 건물 역시 큰 진동을 보였다. 먼지 때문에 처음에는 상황을 제대로 판단하기 힘들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사 람들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 있었다. 연회장의 천장이 무너져 내린 것이다. 그 순간 모든 세계는 소리 없이 돌아가는 무성 영화 필름을 보듯이 침묵으로 뒤 바뀌었다. 아니, 분명 소리가 들리고 현실이 눈을 찔렀지만 도현은 그 광경을 영화를 관람 하듯 무감동한 시선으로 응시했다. 원래 사고는 예기치 않은 순간에 일어난다지만 연회장의 시끄럽고 활기차던 분위 기는 순식간에 절망과 고통의 신음으로 바뀌었다. 커다란 돌덩이에 깔려 신음하는 사람. 피를 흘리며 창백하게 굳어진 사람. 친구를 살피며 일으켜 세우려는 사람. 소리를 지르며 연회장을 빠져나가려고 아우성치는 사람들. 아비규환에 빠진 것처럼 주변에서는 비명소리와 신음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무너져 내린 건물 틈 사이로 붉은 피가 카페트 처럼 펼쳐져 있었다. 도현은 그 혼란 속에서 동떨어진 존재처럼 조용히 서 있었다. "........." 아무 말도 할 수 없었고 할 말 따위는 떠오르지도 않았다. 신의 힘을 가진 자. 보석의 주인인 도현은 온화한 흰 빛 속에서 보호받고 있었 다. 따로 마법을 발동시키지 않아도 보석은 주인을 위해 저절로 힘을 발휘했다. 지옥 같은 풍경 속에서 무사한 것은 신의 보석을 가진 자들 뿐이었다. 그리고 도현의 시야 속에 머리에서 피를 흘리며 한쪽 벽에 등을 기댄 채 앉아 있 는 테이드의 모습이 들어왔다. 그 순간 도현은 가슴 속에서 통증을 느꼈다. 분명 테이드는 얼굴은 같아도 기현이 아니고 핏줄도 아니지만 창백한 얼굴로 가 늘게 숨을 쉬고 있는 테이드를 보자 마음에 커다란 돌덩이라도 담긴 것처럼 괴로 워졌다. "....스위드. 나는 이제 물러서지 않겠어..." 도현은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스위드는 가라앉은 듯한 검은 눈으로 도현을 응시하며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영화를 보듯이 고요한 시선으로 주변을 둘러보던 도현은 이윽고 눈을 감았다. 굳게 닫혀있던 입술이 열리고 그 사이로 마법의 언어가 빠르고 정확하게 새어나 왔다. 먼지와 피에 휩싸인 연회장 바닥에 은빛의 거대한 마법진이 새겨지기 시작했다. 선명한 은색으로 새겨진 거대한 마법진은 곧 빛을 내뿜으며 사람들의 몸 속으로 스며들었다. 마법진에서 새어나온 빛이 사람들의 몸을 감싸자 고통에 신음하던 사람들의 표정 이 금새 놀라움으로 바뀌고 정신없이 고개를 돌리며 마법을 쓴 주인을 찾기 시작 했다. 그리고 그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이마 위에 선명한 흰색 문양이 떠올라 있는 도 현을 발견할 수 있었다. 사이드 공국에서 발생했던 사고는 많은 사람들에게 경악을 안겨 주었다. 다른 어느곳보다 안전해야할 왕궁 연회장에서 발생한 사고라는 이유 때문에 여러 가지 의심이 난무했는데 그것은 사고라기 보다는 다른 나라에서 꾸민 공격 의도 가 틀림없다는 의견이 가장 지배적이었다. 페르마 대공왕의 후계자인 세트란을 노렸다는 이야기가 가장 유력한 설로 퍼져나갔다. 그리고 범인으로 지목된 것은 다름아닌 대륙에서 가장 많은 수의 마법사를 보유 하고 있는 리카도 제국이었다. 대륙의 국가들간에는 암묵적인 평화가 유지되고 있었지만 그 평화가 언제까지나 이어질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게다가 경비가 철저한 왕궁 깊은 곳의 연회장을 공격하는 것은 마법 이외에는 불 가능하다는 것이 당연시되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소식이 사람들 사이에 퍼져나갔다. 그것은 연회장에 모습을 드러낸 빛의 보석의 주인에 관한 이야기였다. 여섯 개의 신의 보석 중에서 가장 까다롭게 주인을 고르는 것은 빛의 보석이다. 신이 지상에 남기고 간 여섯 개의 조각 중에서 유일하게 치유의 힘을 발휘하는 빛의 보석은 무너져 내린 연회장에서 다치고 상처입은 사람을 완벽하게 구해냈 다. 낙석 때문에 절명한 사람들을 되살릴 수는 없었지만 큰 부상을 입은 사람들 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건강을 되찾았다. 연회장안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빛의 보석의 주인을 확인했고 그것은 마치 신의 온기를 느낀 것과 같았다고 말하고 다녔다. 현재 빛의 보석의 주인은 사이드 공국의 귀빈으로 대접받고 있으며 또한, 페르마 대공왕은 이번 사고를 철저하게 조사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제국에 대한 의심 을 버릴 수 없기 때문에 조사가 진행되는 동안에는 사이드 공국을 방문중이던 제 국 재상 테이드 라메르를 돌려 보내지 않겠다는 공식 발표를 제국에 전달했다. 밀려드는 사람들과의 만남을 피하기 위해 도현은 몸이 그리 좋지 않다는 핑계를 대고 방 안에서 빠져나가지 않고 있었다. 도현이 머물고 있는 본궁의 왕족 전용 방 안으로 들어올 수 있는 것은 사이드 공국의 왕족들과 세피 그리고 스위드 뿐 이었다. "딘, 연회장에서 도움을 받은 귀족들이 감사를 표시하고 싶다면서 계속 만나 게 해달라고 하고 있어. 우선은 첼시피온이 네가 너무 큰 힘을 써서 며칠은 휴식 을 취해야 한다고 정식으로 발표했지만 그래도 사람들은 계속 찾아오고 있어." 외부의 동정을 살피러 갔던 세피가 돌아오자마자 도현에게 밖의 상황을 알려주었 다. 그 힘을 쓸 때부터 이미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이제 확실히 얼굴도 팔렸고 예전처럼 유유자적한 삶을 살기는 힘들어졌다. "어차피 내가 선택한 거야. 세피. 그 힘을 쓴 이상 예전처럼은 살 수 없겠지. 게다가 지금 나는 제국도 떠나와서 이곳저곳 떠돌아다니고 있으니까." 그 뒤에 이어질 말은 스위드가 대신했다. "분명 제국에서는 라딘 라메르라는 이름을 들먹이며 그 힘은 제국의 것이라고 말하겠지." "나는 내가 가진 힘을 어떤 한 나라를 위해서 권력자를 위해서 쓰지는 않을 거야. 난 이곳에서 내 의지로 살아가고 있고 내 의지로 선택한 일이 아니면 하지 않을 생각이니까." 의자에 비스듬히 기대앉은 도현은 느슨한 자세와는 다른 강한 눈빛을 보여주었 다. "사람이 사는 곳에서 다툼이란 피할 수 없는 건가봐. 예전엔 권력자들의 자리 다툼이나 전쟁 같은 것엔 관심도 없었는데 이젠 내가 그 한복판에 서게 되다 니..." 도현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중얼거렸을 때였다. 예고도 없이 문이 열리며 두 명이 들어섰다. 약간 창백해 보이는 안색의 테이드 와 화사한 복장의 첼시피온이었다. 첼시피온의 얼굴을 본 순간 도현은 생각할 필요도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다가갔 다. 그리고. 철썩. 소리가 날 정도로 세게 첼시피온의 왼쪽 뺨을 때렸다. 첼시피온은 도현이 손을 들어올리는 것을 보고 있었으면서도 피하지 않았다. 옆으로 돌아간 고개를 다시 정면으로 돌리며 첼시피온은 미소지었다. 그리고는 온화한 미소와는 다르게 차갑게 굳어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날 이렇게 만든 건 제국이고, 케이스워크야. 난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라면 어 떤 방법도 피해가지 않겠어." 첼시피온의 대답을 듣고 도현은 기가 차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이 방안에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도현이 화를 내는 이유를 알고 있었다. 단지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을 뿐. "라딘, 이제 내 목적은 단 하나야. 케이스워크를 제국의 마지막 황제로 만드는 것. 그리고 넌 내 싸움의 열쇠가 되어줘야겠어." "그게 뭘 부탁하는 사람의 자세야?" 도현은 굳어진 얼굴로 첼시피온을 노려보았다. 방 안에 감도는 분위기는 금방이라도 끊어질 듯이 팽팽했다. ============================================================ 벌써 주말이 다가왔네요. 시간 참 빠릅니다;;; 이번 주말 즐겁게 보내시구요. 추위에도 단단히 대비하세요 ^^ 저는 집에서 겨울잠 중;; 낯선 손님이 방문한 것은 늦은 오후의 일이었다. 아직 황태자궁의 화려한 생활이나 수업에 익숙해지지 못한 카예드는 하루 일과를 마치고 나서 휴식을 취하며 시간이 얼마나 더 지나야 이런 생활에 익숙해질 수 있을지 생각하고 있었다. 자신에게만 들릴 정도로 작게 한숨을 내쉬며 문득 고개를 들어 올렸을 때 카예드 는 주변이 이상할 정도로 조용하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물론 카예드의 주변에 서 시중을 들어주는 시종이나 시녀들은 먼저 말을 걸기 전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사람이 있다는 기척까지 사라진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것이었 다. 카예드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주변을 둘러보았다. 넓은 방 안에는 카예드 혼자 뿐이었다. "어떻게 된 일이지.........?" 카예드가 중얼거린 그 순간. 아무도 없던 방 안에 그녀가 모습을 드러냈다. 몸의 실루엣을 그대로 드러내 주는 검은색 드레스를 입은 그녀는 압도적인 존재 감을 내뿜으며 카예드를 내려다 보았다. "누....누구...?" 자기도 모르게 말을 더듬는 카예드에게 그녀는 천천히 손을 내밀었다. "나의 손을 잡겠나... 미래의 황제여." 카예드는 부드러워 보이는 손에 시선을 주었다가 고개를 들어 올려 그녀의 얼굴 을 자세히 살펴 보았다. 아름다운 얼굴이었지만 그것은 반할만한 평범한 것이 아니었다. 위험스럽고 화려 한 독초와 같은 것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눈동자는. 너무 깊고 깊어서 마주친 순 간 그 한없는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갈 것만 같았다. "이유 없는 친절은 받지 않습니다." 카예드는 어린 아이답지 않은 딱 부러지는 말투로 대답했다. 그러자 그녀, 휘트린은 미소지었다. "이런, 역시 황가의 아이들은 아이답지 않다니까. 하지만 그래서 더욱 매력적 이지." 중얼거리듯이 말한 휘트린은 내밀었던 손을 거두고 나서 무표정한 얼굴로 되돌아 갔다. "나는 검은 탑의 마녀 휘트린. 신이 지상을 떠난 후 대륙과 가장 오랜 시간을 함께 한 마녀다. 인간들의 역사와 인간들의 변화를 누구보다 가까운 곳에서 지켜 봐 왔지. 그리고 제국과는 꽤 오랫동안 친분을 유지해왔다." "저는 들은 적이 없습니다." 카예드는 아무렇지 않은 표정을 짓기 위해 애쓰고 있었지만 휘트린은 어린 황태 자의 눈속에 떠오른 두려움을 빠짐없이 읽어내고 있었다. "나는 황제가 될 사람의 앞에만 나타난다. 누군가가 원한다고 해서 나타나지 는 않아. 내가 선택한 자의 앞에 나타나 제안을 하는 것이 내 방식이지." "그렇다면 저는 거절하겠습니다." "제국이 더 이상 제국이 아니게 된다고 해도 말이냐?" 그 말을 듣자 카예드의 표정은 금새 무너져 내렸다. 눈앞의 마녀가 평범한 사람 이라는 사실은 부정하고 싶어도 할 수 없었다. 그녀가 나타난 것도 카예드는 확 인하지 못했고 늘 주변에 있을 시종들도 나타나지 않는다. 분명 휘트린이 무언가 를 어떻게 한 것이다. "그건 무슨 뜻입니까...?" "네가 들은 대로다. 어린 황자. 제국은 그 동안 쌓여온 악업의 대가를 치를 때 가 온 것이다. 나라를 이룬다는 것은, 그것도 제국이라는 거대한 세력을 만들고 다스린다는 것은 무수히 많은 사람들의 피를 요구하지. 그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있을지라도 실제로 했던 일들은 사라지지 않아. 영원히 피를 통해 이어진다." 황태자가 되리라는 생각은 해본 적도 없고, 그저 조용히 별궁에서 묻혀 지내리라 여기며 살아왔던 어린 소년은 이제 자신이 소용돌이의 한 가운데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그것은 거부한다고 해서 던져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니었으며 거부할 수도 없는 것이었다. 휘트린은 다시 한 번 손을 내밀었다. "네게 선택할 수 있는 기회를 주겠다." 그리고 이번에는 카예드도 손을 내밀어 생각보다 훨씬 더 부드럽고 따뜻한 휘트 린의 손 위에 올렸다. 바로 그 때. 집무실 책상 앞에 앉아 있던 케이스워크는 몸을 타고 피어오르는 기묘한 감각을 느꼈다. 등골이 서늘해지고 알 수 없는 불안이 마음을 뒤흔들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불안이었기 때문에 그 여파는 생각보다 훨씬 컸다. 그러나 케이스워크는 억지로 불안을 떨쳐버리며 웃었다. 이미 많은 것을 잃어 버렸고, 더 이상 잃을 것도 없다. 믿을 사람도 믿어야 할 사 람도 이제는 없다. 대륙은 다섯 명의 강자가 팽팽한 긴장을 유지하고 있던 탓에 역사 이래로 유래 없을 만큼 평화로운 시기를 맞이했다. 끊임없이 벌어지던 영토 확장 전쟁이나 외 교적인 문제로 인한 전쟁은 사라지고 전쟁이라는 말은 책 속에나 나오는 말처럼 여겨지는 시기가 이어졌다. 그러나 삶은 언제나 전쟁이었다. 케이스워크는 어린 시절에 이미 그 사실을 깨달았다. 황제는 권력을 위협할 만한 싹은 미리 잘라 두었고, 그 속에서 희생된 사람들은 과거에 아무리 영화로운 지위를 가졌다 하더라도 상관없이 몰락했다. 죽음을 안 겨주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스스로 몰락하게 만들었다. 자멸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케이스워크도 그것을 배우며 자랐다. 그러나 그런 자신감과 오만은 모두 조용히 뒤를 지켜주는 그림자가 있었기에 가 능했던 것이었다. 그렇다. 그 그림자는 사라지고 나서야 압도적인 존재감을 드러내는 심장처럼 소중한 것이 었다. 스위드. 마녀의 아들. 어둠의 보석의 주인. 그리고 처음으로 가진 그림자이자 친구. 고독하게 태어나고 고독 속에서 죽어가야 할 황족에게 가장 필요한 존재였다. 그러나 지금 케이스워크는 혼자였다. 철저하게. 지금 집무실 책상 위에는 얼마 전 발생했던 사이드 공국에서의 사건으로 인해 평 소의 세배나 되는 문서들이 쌓여 있었다. 그러나 케이스워크는 그것을 거들떠 보 지도 않았다. 어차피 일이 어떻게 된 것인지는 잘 알고 있었다. 첼시피온이 이빨을 드러낸 것이다. 요정의 피를 이은 아름다운 왕자는 화사한 외모 속에, 온화한 미소 속에 정체를 감추고 있었지만 케이스워크에게는 뻔히 보였다. 요정의 피보다 진한 것은 바로 왕가의 피였다. 그것은 상대방이 마지막 숨을 내뱉을 때까지 목줄기에 박혀 있는 맹수의 이빨을 떼지 않는 차가운 피의 본능이다. "그래, 원한다면 충분히 어울려 주지." 이미 나에게 더 이상 잃을 것은 없다. 케이스워크는 냉담한 표정으로 웃었다. 그러나 2년 전에 식어 버린 눈은 더 이상 웃지 않았다. ================================================================ 여기서 파트를 어정쩡하게 끊을 생각은 아니었지만, 그 동안 잠적이 너무 길었던 관계로 새로 정리하고 글을 쓰기 위해서 광풍의 앞부분 이야기는 여기서 끝내겠 습니다. 그리고 광풍2 라는 제목으로 다시 시작합니다. ^^;; 여러 가지 일들이 많아서 그 동안 잠적의 이유는 밝히지 않겠습니다. 단지 조금 힘들었습니다. ......; 광풍2 인간은 세상에 널리 퍼졌고, 그들을 위협할 것은 그들 자신밖에 남지 않게 되었을 무렵. 신은 자신이 창조한 생명에게 자유를 주었다. 대지를 떠나며 신이 지상에 남긴 것은 여섯 개의 보석들. 그것은 신의 파편이며 신이 인간에게 주는 마지막 선물이었다. 불의 보석은 불꽃처럼 격렬하며 따뜻하고 강한 심장을 가진 이에게. 물의 보석은 차갑고 냉정하며 강함을 추구하는 이에게. 대지의 보석은 온화하고 부드러운 포용력을 가진 이에게. 바람의 보석은 가장 자유로우나 결코 벗어나려 하지 않는 이에게. 어둠의 보석은 가장 어둠에 근접한 이에게. 빛의 보석은 절망 속에서도 한줄기 빛을 붙잡아 모두를 밝혀줄 수 있는 이 에게. 신이 찬란한 빛이 되어 지상을 떠났을 때. 여섯 개의 보석은 대륙 곳곳에 흩어졌고, 보석은 강하게 원하는 마음을 가 진 자에게. 혹은 보석이 스스로 선택한 자의 소유가 되었다. 그리고 지금. 신이 남긴 모든 보석이 주인을 찾았다. 피요드 공국은 대륙의 남부에 위치한 나라로 영토의 반 이상이 바다와 접해 있는 곳이다. 지리적 특성 때문에 바다를 이용한 산업이 성장했고, 병력의 절반은 해군이 었다. 유래 없는 평화로운 시기가 이어진 덕분에 사람들은 풍요로움에 익숙해져 있었지만 그래도 군사력이 약화되게 내버려두지는 않았다. 비록 영토는 그리 넓지 않았지만 피요드 공국은 공민들의 결속력이 상당히 강하고 유대감도 깊어서 나라에 어떤 일이 생기면 그것을 자기일 처럼 여겼 다. "어이, 아리엘. 오늘도 수고 하라고-!" 무겁지도 않은 지 두꺼운 통나무를 한쪽 어깨에 들쳐 맨 건장한 체구의 남 자가 외쳤다. 아리엘이라 불린 청년은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좋은 하루 되세요, 켈츠씨!" 하늘은 푸르고, 시원한 바람이 기분 좋게 불어오는 수도의 아침. 아리엘은 근무지를 향해 힘찬 걸음을 옮겼다. 목덜미에서 깔끔하게 정돈된 옅은 갈색 머리카락은 얼핏보면 금발로도 보였 다. 아리엘의 몸을 감싸고 있는 것은 검은색 제복이었는데, 가슴에 새겨진 은색 드래곤의 문장이 그가 공국 기사단 소속이라는 것을 알려 주었다. 피요드 공국의 최 정예가 모여 있는 곳을 사람들에게 물으면 누구나 이렇게 답할 것이다. 실버 드래곤 기사단 이라고. 잘 단련된 체구에 왠지 친해지고 싶은 인상을 가진 청년 아리엘은 실버 드 래곤 기사단에 속한 기사였다. 아직 특별한 직위는 가지지 못한 평기사 였지만 그는 기사단 내에서 기사 단장 보다도 훨씬 유명했다. "신의 축복, 폐하께 영광을-!" 기사단이 위치한 왕성 외곽에 들어서자 경비를 서고 있던 기사 후보생이 경 례하며 인사 했다. 아리엘 역시 자세를 바로 하고 같은 말을 외쳤다. 외곽 성벽을 지나쳐 곧장 걸어가자 기사단원들이 연무장에서 훈련하는 소리 가 들려왔다. 평소 같았으면 아리엘도 아침 일찍 연무장에 나와 훈련하는 동료들의 대열에 끼어 있어야 했을 테지만, 오늘 그에게는 다른 일정이 있 었다. 아리엘은 곧장 5층으로 이루어진 기사단 건물로 향했다. 2층에 있는 기사단장의 집무실로 가서 가볍게 문을 두드리자 익숙한 목소리 가 들려왔다. "어서 오게, 아리엘." 실력과 가문을 모두 겸비한 현 기사단장 가딘 경이 아리엘을 반갑게 맞이했 다. 가딘 경은 중년임에도 불구하고 단단한 체구에 나이보다 훨씬 젊어 보이는 얼굴이었다. "어서 앉게." 소박한 것을 좋아하는 가딘 경의 성격 답게 기사단장의 집무실은 쓸데없는 장식 같은 것은 하나도 없이, 실용적인 가구들로만 배치되어 있어서 어떻게 보면 무척 단순했다. 하지만 몸 움직이는 것을 좋아하는 기사들에게 쓸데없 는 격식은 사치 이외에는 아무 것도 아니다. "예전에도 한 번 언급한 적이 있지만, 폐하의 명령이 내려왔네. 자네도 소문으로 들어서 알고 있겠지만 주인을 선택하는데 가장 까다롭다는 빛의 보석이 주인을 골랐지." "아, 제국 백작가의 소년 말이군요?" "그렇다네. 그런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그 소년은 제국을 떠나 다른 나라 에 자리를 잡았지. 이전에 제국에서는 큰 화제가 되었던 스캔들의 주인공이 그 보석을 얻었으니 황제와 불화가 생긴 건 당연하고, 황제도 힘으로 막지 는 못했겠지. 어쨌던, 폐하께서는 그 소년을 우리쪽에 머물게 하고 싶어 하 신다네." 아리엘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빛의 보석이 있다면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은 당연하겠죠. 아니, 승리하 지 못하더라도 적어도 피해는 없겠죠." "바로 그렇다네. 물론 지금까지 유지되어 온 평화가 한 번에 깨지지는 않겠지만 조짐이 느껴지고 있으니 미리 준비해두는 것이 좋겠지." "알겠습니다. 언제 출발하면 됩니까?" "준비가 끝나는 대로 오늘 바로 출발하게. 행선지는 알고 있겠지?" "네, 센 왕국은 몇 번 가본 곳이라 크게 헤맬 일은 없을 겁니다." "연락은 취해 두었으니 만나는데 그리 시간이 걸리진 않을 거다." 피요드 공국 실버 드래곤 기사단 소속 평기사 아리엘은 국왕의 명령을 받아 한 소년과 만나기 위해 센 왕국으로 출발했다. 출발 하기 전, 동료 기사들이 한 자리에 모여 그를 배웅했다. "신의 축복, 보석의 명예, 폐하께 영광을-!" 늘씬한 흑마에 올라탄 아리엘은 동료들에게 정중하게 인사를 남기고 달려나 갔다. 1장. 마음과 마음 "라딘 그 자식, 매번 말도 없이 사라져!" 막 서류 검토를 마치고 펜을 정리하던 리올은 쌍둥이 동생의 투덜거림을 듣 고 슬며시 미소지었다. "연락 안 해도 네가 찾으면 되잖아." "그게 안 되니까 그렇지. 그리고 친구 사이에 가면 간다, 오면 온다고 말 좀 해주면 안 되는 거야? 왜 매번 나만 이렇게 걱정해야 하냐고, 라딘 그 자식은 우릴 생각하기라도 하는 거야?" "진정해, 카드리." 라딘과 만난 이후로 이런 저런 사건에 휘말리게 되다 보니, 처음에는 의도 적으로 접근했어도 이제는 오랫동안 알아온 친구사이처럼 가까워졌다. 쌍둥 이로 태어나 탄생하던 그 순간부터 늘 함께 있는 존재에 익숙해있던 카드리 와 리올은 특별히 친구를 필요로 하지 않았다. 그러나 라딘(딘이라고 불러달라고 했지만, 라딘쪽이 익숙하다)은 좀 달랐다. 라딘이 말하듯이 다른 세계에서 왔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보통 사람과는 뭔 가가 다르게 느껴졌다. 신의 보석 중 하나를 가졌기 때문일 수도 있었지만 쌍둥이가 라딘과 처음 만났을 때는 그런 사실은 알지도 못했었다. 처음에는 일상의 작은 변화였지만 나중에는 일상의 일부가 되고, 그것이 너 무나도 자연스러워졌다. 카드리는 고집스럽고 투정을 잘 부리기는 했지만 그것은 친한 사람들 앞에 서만 보여주는 모습이지, 낯선 사람에게는 별로 말도 걸지 않았다. 그랬던 카드리도 라딘과 만나고 나서 많이 달라졌다. 그리고 리올 역시. "어차피 스위드가 같이 갔을 텐데, 걱정은 안 해도 되잖아." "스위드.... 그 사람이 능력 있는 건 인정하지만 그 사람은 뭔가 꺼림칙 해. 알잖아, 그 사람이 원래 누구 옆에 있었는지." 지금까지는 라딘이 스위드를 의지하고 스위드도 라딘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 기 때문에 그가 곁에 있는 것에 대해 별다른 의구심을 품지 않았다. 아니, 그런 것을 품을 시간도 없었다. 하지만 쌍둥이는 스위드에 대해 잘 알지 못하고 대화를 많이 나눠보지도 않 았다. 친구가 좋다고 그 주변인 모두가 좋아지지도 않고, 그렇지 않은 게 당연하 듯이 스위드 역시 그랬다. 스위드는 믿음직스럽기도 했지만 위험하다. 카드리는 그렇게 단정지었다. "라딘이 좋다면 그걸로 된 거야, 난 별 걱정 안 해." "그러다가 나중에 스위드가 본색을 드러내기라도 하면?" 리올은 피식하고 웃었다. "너 설마 스위드가 사실은 황제 편인데 라딘을 어떻게 하려고 곁에 있다 가 나중에는 다시 배신할 거 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음..." 카드리는 정곡을 찔린 듯이 표정을 구기며 말을 삼켰다. "그건 첼시피온 왕자가 쓴 방법이잖아. 같은 방식으로 속으면 물론 큰 상처가 되겠지. 하지만 난 스위드가 그럴 사람이라고는 생각 안 해." "말도 안 해보고 그걸 어떻게 알아?" "느낌이라는 게 있잖아." 리올은 덧붙였다. "그리고, 만에 하나 또 다시 그런 일이 생긴다 해도, 우리가 있어." 당연하다는 듯한 리올의 말을 듣자 카드리는 괜히 화내고 걱정한 자신이 한 심하게 느껴졌다. 쌍둥이인데도 생각도 행동 방식도 너무나 다르다. "그건 그렇고 첼시피온 왕자가 너무 잠잠해서 괜히 불안해." "신경 써 봤자, 타인의 마음은 들여다 볼 수 없잖아." "리올, 넌 걱정도 안돼?" "나는 그렇게 걱정만 하기보다 확실하게 정보를 모아서 상황에 맞게 대 처하겠어." 그렇게 말하며 리올은 책상 위에 쌓인 종이 몇 개를 들어 흔들었다. "후우...." 카드리는 한숨을 내쉬며 쇼파에 털썩하고 드러누웠다. 고개를 돌리자 어두워진 창문에 자신의 얼굴이 비쳤다. 이마 위에 흘러내린 곱슬거리는 갈색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치우다가 치워 도 치워도 계속 내려오자 카드리는 결국 손을 멈춰 버렸다. 문득, 이마에 박혀있는 선명한 푸른색 문장이 떠올랐다. 카드리로서는 어떤 의미인지 읽을 수도 없는 그것은 마치 그림 같은 문장이 었다. 하지만 그것은 손으로 낙서하듯 그린 것이 아니라 태어날 때부터 가 지고 있던 것처럼 자연스러워 보였다. 라딘의 이마에 그 문장이 떠오른 것을 보긴 했지만, 카드리는 이상하게 그 푸른색 문장이 더 선명하게 떠올랐다. 이렇게 생겼었나? 하면서 카드리는 손가락을 들어 유리창에 그 문장을 그렸 다. 둥근 원 안에 새겨진 신비한 문장을 그려나가자 마치 얼음처럼 차갑고 딱딱 하기만 하던 그 소년, 세인이 생각났다. 그 자식, 처음 봤을 때 라딘이랑 똑같았지. 그렇게 생각하며 히죽 웃었을 때 였다. "뭐해?" 어느새 등 뒤로 다가온 리올이 묻자 카드리는 당황해서 손을 뒤로 숨겼다. "아, 아무 것도 아니야." 그런 동생의 이마를 리올은 손가락으로 가볍게 튕겼다. "적당히 고민하고 아래층으로 내려 와. 난 씻고 나서 갈 테니까." "그래, 알았어. 먼저 가." 리올의 발소리가 멀어지고 나자 카드리는 유리창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바 라보며 중얼거렸다. "그딴 자식..." ============================================================= 이제 정말 광풍답게 끝을 내야지 라고 결심해 봅니다. 겨울잠이 너무 길어서 다들 깨어나라고 말하네요 ^^; 광풍을 다시 쓰게 된 것은 S언니 덕분입니다. 성실하게는 아니라도, 쓰는대로 올리겠습니다. 그럼.. 도망....................... 감금 아닌 감금 상태에 놓인 테이드는 오랜만에 맞이한 여유로운 시간을 사 색에 잠긴 채 보내고 있었다. 돌이켜 보니 먼길을 쉬지 않고, 숨가쁘게 달려온 느낌이 들었다. 가문이 몰락하기 이전에는 작위를 이어 가문을 계승할 후계자로서 부족함이 없도록 노력했고, 그 후에는 몰락한 가문을 어떻게라도 일으켜 세우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다시 많은 것을 얻은 지금은 오히려 뭔가가 부족한 느낌이 강했다. 인간은 항상 손에 잡을 수 없는 무언가를 위해 움직이고 달린다. 테이드 역 시 그랬다. 그것이 집착이라는 이름으로 변질되어 버렸다고 해도, 집착은 미련이 되어 손을 내밀었다. 라딘 라메르. 그것은 동생의 이름이다. 닫힌 방안에서 테이드의 눈빛을 볼 때마다 가엾을 정도로 떨던 동생의 이 름. 라딘은 자신에게 쏟아지는 비난의 시선과 수군거리는 말들을 견디기에는 너 무 어렸다. 아니, 약했다. 아무도 어린 라딘에게 네가 잘못하지 않았다고 감싸주지 않았고, 애정 어린 말을 건네지도 않았다. 모두 각자의 상처를 막기에 바빴던 것이다. 그 속에서 철저하게 피해자가 되어 겁먹은 라딘은 최후의 용기를 자살이라 는 방법으로 표현했다. 붙잡아서 가둬도 도망치고, 벗어나려 했다. 그리고는 결국 달아나 버렸다.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르지만 라딘 라메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던 겁먹은 눈을 가진 소년은 이제 어디에도 없다. 대신. 라딘과 꼭 닮은 그 소년. 결코 굽히지 않고 마주보는 당당한 눈을 가진 그 소년은. 나는 라딘이 아니야-! 그렇게 외치던 소년은 이제 자신의 자리를 찾았다. 그렇다면 내게 남은 것은 뭐지? 내가 되찾아야 할 것은 뭐지? 그리고 누구에게 복수해야 하지? 테이드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그렇다. 복수. 가문을 몰락시키고 모든 것이 틀어지게 만든 장본인은 전 황제였지만, 증오 를 쏟아낼 대상은 아니다. 비틀린 테이드의 증오를 온 몸으로 받아낸 것은 라딘이었다. 처음에는 현실을 이겨내기 위해 시작된 그 비틀린 집착은 이제 와서는 달라 져 버렸다. 어떻게 해서 그 일이 벌어졌는지, 누가 그 일을 했는지 모두 알 게된 지금에 와서 남은 것은 타오르는 듯한 복수심이 아닌 비틀린 애정, 비 틀린 집착의 잔해일 뿐이었다. 그것이 허무하다는 것을 알지만 그래도 테이드는 자신이 붙잡아야 할 것은 그것 뿐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렇게 허무하게.... 인간은 허무 속에서 고독을 안고, 채워지지 않는 갈 증을 안고 살아갑니다." 마치 마음을 읽고 있기라도 한 듯한 그 말에 테이드는 소름이 끼쳤다. 갑작 스런 등장에 놀라기 보다 먼저 그 말이 날카로운 칼날이 되어 가슴을 찔렀 다. "권력에 가까울수록 그 고독의 깊이는 더욱 깊어집니다." 황태자의 그림자였지만 이제 동생과 같은 얼굴을 가진 소년의 그림자가 된 스위드가 벽에 비스듬하게 기대 선 채 테이드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테이드는 왜 자신의 앞에 나타났느냐고, 왜 그런 말을 하느냐고 묻지 않았 다. 조용히 스위드를 바라보았을 뿐이다. 스위드의 눈동자는 마치 밤하늘 같았다. 달빛이 비추지 않는 컴컴한 하늘. 그것은 막막할 정도로 넓고 깊었다. "왜 케이스워크를 버렸지?" 테이드는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그렇게 물었다. "어둠이 속하는 곳은 그림자가 아니라 빛의 그늘이라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테이드는 일부러 되묻지 않았다. 사실 물어볼 필요도 없는 것이다. 마음이라는 것은 간단한 이유로 움직이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너무 간단해 서 복잡하게 보인다. "원하는 것은 제국의 몰락입니까? 라메르 가문이 그랬던 것처럼 몰락해 서 예전의 치욕이 사라지기를 바랍니까? 그렇지 않으면 잡히지 않는 것에 그저 손을 뻗기 위해 애를 쓰고 있습니까?" 질문처럼 말을 던졌지만 스위드는 대답을 바라면서 질문을 하지 않았고, 테 이드 역시 그 사실을 알았다. 하지만 테이드는 독백처럼 입을 열었다. "모든 것을 잃어 버리고 벼랑 끝에 서면 무엇을 생각할까, 손안에 쥔 것 이 빠져나가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린다면 어떤 생 각이 들까. 내 경우에는 포기하지 않는다가 답이지. 그래, 손에 넣을 수 없 다는 것을 안다고 해도 말이야. 아무리 곁에 누군가가 있다고 해도..." 그렇다. 이제는 타인이지만 예전에는 깨닫지 못했던 온기를. 눈동자 속에 떠오른 강렬한 빛을 다시 보고 싶다. 타인을 향한 것이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을 향한 그 빛을. 아아, 빛의 보석은 얼마나 제대로 된 주인을 선택했는가. 손에 잡을 수 없는 빛처럼 가깝고도 멀고, 얻기 위해서 발버둥쳐야만 하는 존재를. 스위드는 자신의 존재도 잊은 듯 생각 속으로 침몰해 들어가는 테이드를 가 만히 내려다 보았다. 보통 인간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는 손에 잡힐 것처럼 쉽게 알아낼 수 있었다. 마녀의 피는 그리고 모든 어둠과 그림자 속에 녹아든 보석의 힘은 스위드에 게 다른 자들이 볼 수 없는 것을 보게 하고, 들리지 않는 것을 듣게 만들었 다. 조용히 시선을 돌리자 어느새 주위의 풍경이 뒤바꼈다. 그곳은 이제 테이드 가 머물고 있는 방이 아니라 사이드 공국의 왕성이 내려다 보이는 산 위의 풍경으로 뒤바뀌어 있었다. 소리도 없는 자연스러운 변화, 스위드에게 그것은 숨을 쉬는 것만큼이나 익 숙한 행동이었다. 스위드는 오랜 시간을 살아왔지만 휘트린과는 많이 달랐다. 휘트린의 시간 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긴 것이었다면 스위드는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최 대의 시간을 살았다. 그녀와 비교 따윈 하지 말자. 스위드는 그렇게 생각을 가다듬었다. 그녀는 어둠이다. 벗어 나려고 해도 시간이 되면 자연스럽게 찾아오는 어둠. 그리고 스위드 역시 그 어둠에 속해 있었다. 스위드는 몇 번 눈을 깜빡이다가 눈을 감았다. 시야를 채우던 풍경이 사라 지고 눈에 비치는 것은 없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흐릿한 영상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것은 말 등에 올라탄 채 툴툴거리고 있는 소년의 모습이었다.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스위드는 충분히 소년이 어떤 불만을 토해내고 있는 지 상상할 수 있었다. 어깨를 넘어선 머리카락은 윤기가 흐르는 검은색, 말의 움직임에 따라 귓가 에서 흔들리는 은색 실같은 귀걸이가 빛을 발한다. 그리고 어떤 상황에서도 힘을 잃지 않는 검은색 눈동자가 어느 순간엔가 정 면을 응시했다. 마치 스위드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것을 눈치채기라도 한 것처럼. 살짝 눈썹을 찌푸리며 소년이 말했다. 스.위.드- 그 순간 스위드는 미소지으며 소년에게로 갔다. 스위드가 나타나자 도현은 말을 제자리에 서게 하고 바닥으로 뛰어 내렸다. "그쪽 일은 확실히 끝난 거지?" 그렇게 물었지만 도현은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곧바로 말을 이었다. "뭐, 끝내고 자시고 할 것도 없지. 내가 거기 없으면 되는 거니까. 첼시 피온 그 자식은 충분히 힘이 있으니까 알아서 하겠지. 나는 우선 보석의 주 인들을 모두 만나고 뭔가 가능성을 찾는 게 중요하니까, 그것만 생각 할래." 스위드는 온화한 시선으로 도현의 얼굴을 내려다 보며 얼굴 쪽으로 흘러내 린 머리카락을 뒤로 넘겨 주었다. 스위드의 조용한 얼굴을 올려다 보던 도현은 지나가는 말처럼 아무렇지 않 게 말했다. "나, 보석의 주인들을 모두 만나보고 그들이 모두 모였을 때, 그때도 아 무런 방법이 없다면 포기 할거야. 그렇게 되면 다른 사람들이 날 라딘이라 고 부르건 뭐라고 하건 상관 안 할래." 도현은 시선을 땅으로 향한 채 발끝으로 바닥에 박힌 돌맹이를 툭툭 찼다. "내가 이곳에 온 것도 뭔가 이유가 있겠지.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어. 지 금은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움직이고 그래도 안 된다면 그걸로 된 거야." "네 마음이 움직이는 대로." 스위드가 대답하자 도현은 다시 고개를 들었다. "스위드. 스위드는 나보다는 훨씬 오래 살겠지?" 대답은 없었지만 도현은 이미 알고 있었다. "내가 여기서 살아야 한다면 그렇게 된다면, 그 때는 스위드가 나와 마 지막까지 같이 있어 줘. 그리고 내가 있었다는 걸 기억해 줘. 다른 세계에서 온 내가 있었다는 걸 기억해 줘." "언제까지나." 도현은 후련한 듯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웃었다. 발끝이 무너져 내릴 것 같은 절망은 이제 조금 엷어졌지만 그래도 아직 마 음 한구석이 아픈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테이드를 볼 때마다 완벽한 타인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형이라고 부르 고 싶고, 루사벨라가 있는 곳으로 가서 누나라 부르며 그녀가 낳은 아이를 보고 싶다. 그리고 가족처럼 다시 시작하고 싶다. 아마도 그 마음은 도현이 가족을 그리워하는 한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하 지만 언젠가는 그 바램도 희미하게 지워지고 이방인이라는 이름을 벗어 던 질 수도 있겠지. 그래, 언젠가는. 도현은 한없이 따뜻하고 한없이 편안한 스위드에게 몸을 기댔다. 스위드가 있어서 정말 다행이다. 맞닿은 몸을 통해 전해지는 온기는 살아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깨닫게 한다. "이번에 마지막 보석의 주인을 만나면 카드리와 리올에게 신세를 좀 져 야겠어. 카드리는 분명 투덜대고 있겠지." 아련하게 먼 곳을 내다보던 시선이 다시 힘을 되찾았다. "가자, 스위드." 스위드는 도현과 함께 말에 올라타자 고삐를 잡았다. 그리고 마법을 걸었다. 주변의 풍경이 흐릿하게 사라지며 새로운 길을 만들 었다. 맞닿은 곳에서 서로의 온기를 느끼며 둘은 천천히 사이드 공국을 떠났다. 2장. 내가 바라는 것 그것은 꿈처럼 아련한 기억이었다. 희미하고 희미해서 손을 대면 금방이라도 흩어져 버릴 것처럼. 공기는 온화하게 온 몸을 감싸 안아주었고, 하늘은 베일이 드리워진 것처럼 엷은 푸른색으로 흩어져 있었지만 아름다웠다. 첼시피온은 쿠션처럼 푹신한 풀밭에 누워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푸른색 하늘을 장식하고 있는 것은 투명한 몸체를 가진 아름다운 페어리들. 페어 리들이 하늘 위를 유영하듯 노니는 모습을 첼시피온은 시선으로 쫓고 있었다. 그 들에게 있어 세상은 한없이 밝고 아름다운 것이었고, 그 사실은 그들이 빛의 가 루가 되어 하늘 위에 뿌려지는 순간까지 변하지 않을 것이었다. 별 것 아닌 광경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상하게도 그 모습이 선명하게 뇌리에 남 아 있었다. 선선한 바람이 온 몸을 훑고 지나갔다. 애무하듯 부드러운 감각을 느끼며 첼시피 온은 살짝 얼굴을 찡그렸다. 이런 종류의 자극은 달갑지 않다. 그러나 첼시피온이 거부하는 마음을 가질수록 그 감각은 끈질기게 몸에 달라붙었 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것은 직접적인 자극을 가지고 피부를 건드렸다. 하반신에 아릿한 통증이 일어나며 피부 끝에서부터 달콤한 쾌감이 눈을 떴다. 싫어-! 몸을 비틀었지만, 소용없었다. 포근한 풀밭은 어느새 침대로 변하고 첼시피온은 결박당한 채 온 몸을 건드리는 자극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었다. 비웃는 듯한 보라색 눈동자가 첼시피온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눈을 뜨고 몸을 일으키자 창문 사이로 희미한 빛이 새어 들어왔다. 온 몸이 식은땀으로 젖어 있었다. " 케이스워크!" 첼시피온은 낮게 그 이름을 꺼냈다. 증오스러운 자. 치욕적인 감각이 아직도 온 몸에 남아 있다. 이미 그곳을 떠나 고국에 돌아왔음에도 불구하고 첼시피온은 아직도 과거의 악몽 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그 오만한 눈동자가 고통으로 물든 것을 보고 싶었다. 하지만 아직 첼시피온에게는 힘이 없었다. 치밀하게 계획을 세워 아무 것도 남지 않게 만들어 버리는 것도 좋지만, 첼시피 온 자신이 당했던 치욕을 고스란히 갚아주고 싶었다. 사실 나라 따위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누가 다음 황제가 되건 제국이 멸망하건 건재하건 그런 건 상관이 없었다. 단지 케이스워크가 자신의 손안에 떨어진다면, 첼시피온이 그의 모든 것을 움켜 쥐게 된다면 그걸로 족하다. 사람에 대한 집착은 케이스워크가 처음이었다. 비록 그것이 증오로 인한 것일지 라도 첼시피온은 그로 인해 다른 생각을 하지 않아도 되었다. 요정과 인간의 피 를 반반씩 가지고 산다는 것은 생각보다 훨씬 힘겨운 것이었지만 지금은 그런 사 실을 모두 잊은 채 케이스워크에 대한 분노로만 살아갈 수 있었다. 아버지와 함께하는 저녁식사. 황태자가 된 카예드에게 그것은 제왕학을 배우는 시간처럼 당연한 일과중의 하나 였다. 예전에 그저 케이스워크의 아들이라는 신분만 가지고 있었을 때는, 케이스 워크의 방문을 손꼽아 기다리곤 했었지만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필요하 다면 언제든 먼저 카예드가 아버지를 만나러 갈 수 있었다. " 입맛이 없나 보구나." 앞에 놓인 스테이크를 1/3도 먹지 못한 채 나이프를 내려놓은 카예드를 바라보며 케이스워크가 말을 걸었다. 일이 많은지 조금 지쳐 보였지만 케이스워크는 여전 히 당당했다. " 조금 피곤한 것 같습니다." 카예드는 대답하며 물이 담긴 투명한 글라스에 손을 뻗었다. 왠지 아버지의 얼굴을 제대로 바라볼 수 없었다. 그렇다. 그날부터. 마녀라고 자 신을 소개한 아름답지만 무서운 그 여자와 만나고 난 이후부터 카예드는 아버지 의 얼굴을 예전처럼 아무렇지 않게 바라볼 수 없었다. 휘트린은 카예드에게 진실을 보여주었다. 황실의 피라는 것이 권력의 중심이라는 것이 깨끗함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카예드는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황권을 유지하기 위해서가 아닌 단지 자신의 이기심을 위해서 많은 것을 짓밟아온 할아 버지와 아버지의 모습은 카예드에게는 머리 위에 벼락이 떨어져 내린 듯한 충격 을 주었다. 원래 진실이라는 것은 어떤 것보다도 무거운 법이다. 이제 카예드는 선택해야만 한다. 그들과 마찬가지인 길을 갈 것인지, 아니면 자신이 선택한 새로운 길을 갈 것인 지. 분명 바른 것이 어떤 것인지 알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카예드에게 아버지를 버릴 만한 용기는 없었다. 아니, 아직 망설이고 있었다. " 고민이 있다면 혼자 생각하는 것도 좋지만, 다른 사람과 상의해서 풀어나가 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케이스워크는 아무렇지 않게 말을 건넸지만, 카예드는 깜짝 놀랐다. 마치 아버지 가 자신의 마음을 읽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카예드의 얼굴 에 떠오른 엷은 불안은 조금만 관심을 가지고 지켜본다면 누구나 읽어낼 수 있을 만한 것이었다. " 조금만 더 생각해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아직은 너무 혼란스러울 뿐이어서 저 자신의 생각도 정리가 되지 않았습니다." " 그래, 네가 그렇게 정했다면 그것이 가장 옳겠지. 고민하고 계속 생각해 보도 록 해라. 너는 미래에 이 제국의 주인이 될 것이고, 너의 생각과 결정은 곧 제국 을 움직이는 힘이 될 것이다. 누구 한 사람의 말에만 귀기울여서도 안 되고, 너무 여럿에게 휘둘려서도 안 된다. 공평하게 모두의 말을 듣되 결국 판단을 내리는 것은 너 자신이 되어야 한다." 케이스워크의 조언은 카예드에게는 누구의 말 보다 무거웠다. 케이스워크는 카예 드가 무엇에 대해 고민하는 지 알지 못했지만, 어느때 보다 적절하면서도 최악인 조언을 해 주었다. 케이스워크 덕분에 카예드의 마음 속에는 어떤 확실한 생각이 자리잡았다. 그래, 지금은 좀 더 고민하자. 카예드는 너무 성급하게 움직이려던 자신을 다독이 며 다시 식사에 열중했다. 어떤 결과가 나오더라도 카예드는 케이스워크의 아들 이며, 둘의 혈연 관계에는 어떤 다른 요소도 끼여들 여지가 없었다. 어리지만 총명한 눈동자와 케이스워크를 닮은 외모. 아직은 비틀리지 않은 순수 한 소년 그대로 카예드는 성장하고 있었다. 서자로서 평생 이름뿐인 왕족으로 살 아갈 수도 있었지만, 케이스워크는 카예드를 황태자로 선택했고, 그 선택은 결코 틀리지 않았다. 카예드라면 케이스워크나 선대의 황제들과는 다른 황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한참 식사가 이어지던 중에 케이스워크가 물끄러미 카예드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 다. " 내 삶은 실수 투성이였다. 과거에는 그것을 실수라고 생각하지 못했지. 내가 내린 결정은 모두 옳은 것이고 내게 만족스런 결과를 안겨 주었다. 하지만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그것들은 모두 잘못된 것들 뿐이었지. 과거를 부정하지는 않는 다. 있었던 일을 없었던 것으로 만들 생각은 없다. 하지만....." 잠시 말을 멈추고 케이스워크는 옆자리에 앉은 카예드의 머리카락 위에 손을 올 렸다. 부드러운 금발 머리는 손안에서 매끄럽게 흘러내렸다. 카예드야 말로 유일하게 케이스워크와 연결된 존재다. 언제까지나 곁에 있을 것 이라 여겼던 그림자마저 사라지고 난 지금, 케이스워크에게 남은 것은 오직 그를 닮은 아들 한 명 뿐. " 나는 이미 선택한 길을 되돌아갈 생각은 없다. 마지막까지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 내 두 눈으로 직접 볼 생각이다. 카예드. 너는 너만의 길을 찾아내라." 케이스워크가 뭔가 중요한 말을 건네고 있다는 것은 확실했지만, 너무 모호해서 카예드는 어렴풋하게 무언가 느끼기만 했을 뿐 잡아내지는 못했다. 그래도 아버 지가 자신에게 진심을 전하려 한다는 것은 확실했다. " 아버지. 전 언제나 아버지의 아들입니다." 카예드의 말에 케이스워크는 미소지었다. 그리고 몇 번이고 아들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비록 다른 사람에게 절망을 안겨 주었더라도, 대부분의 사람이 케이스워크를 증 오하게 된다고 해도 카예드만은 아버지를 순수하게 바라볼 것이다. 결코 외면하 지 않을 것이다. 서로 맞닿은 체온을 통해 아버지와 아들은 그것을 느끼고 있었다. ================================================================= 내게 주어진 공간은 언제나 방 한 칸 만큼의 공간. 허락도 없이 함부로 방을 벗어날 수도 없고, 말을 나눌 수 있는 사람도 한정되어 있다. 기억나는 가장 오래된 말은 '저주받은 아이'라는 경멸 섞인 단어. 나를 볼 때 거 부감이나 경멸이 담기지 않은 시선으로 보는 사람은 드물었다. 드물게 다른 감정 을 보인다고 해도 그것은 동정에 지나지 않았다. 이유를 알지 못하던 때부터 미움 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고, 이유를 알게 된 후 에도 달라진 것은 없었다. 아니, 오히려 더 심해졌다. 형은 그 중에서도 가장 나를 미워했다. 그 차가운 눈빛을 볼 때마다 몸이 얼어붙 어서 제대로 입도 뗄 수 없었다. 내가 그런 반응을 보일 때마다 형은 더욱 더 날 경멸했지. 하지만 어쩔 수 없었어. 아무도 날 나로 봐주지 않았으니까. " 시끄러워-!" 머리 속에서 웅웅거리는 듯한 목소리를 지워버리기 위해 고개를 흔들었지만, 지 나칠 정도로 또렷하게 들려오는 목소리는 조금도 작아지지 않았다. 형은... 단 한번도 날 동생으로 봐 주지 않았어.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아무 것도 달라지지 않는다고 해도 그저 동생으로 봐주기만 한다면 그걸로 만족할 수 있었는데. 단 한번도 돌아봐 주지 않았어. " 그래서 어쩌라는 거야? 그건 네 잘못이잖아. 이제와서 왜 그런 얘길 꺼내는 거야??!" 도현은 큰 소리로 외쳤지만 전혀 들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자기 연민으로 가득찬 독백은 나직했지만 선명하게 뇌리에 새겨지고 있었다. 처음에는 내게 아무런 잘못도 없다고, 억울하다고 생각했지만. 모든 사람들이 다 내가 잘못했다고 말했으니까. 결국 나 역시도 믿을 수 밖에 없었지. 내가 태어나 지 말았어야 한다고. 그랬다면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거라고. 형은, 지독하게 날 경멸했으면서도 결코 내가 떠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손목을 끊어도, 도망쳐도 반드시 데려와서 가둬놓기를 반복했지. 그건 정말 지나 칠 정도로 악순환이었어. 도망치는 것 밖에 할 수 있는 게 없었던 내게 형은 그 것마저 빼앗아 버린 거야. 형이 내게 단순한 집착을 보이고 있다는 걸 알았을 때, 끊어버려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도망치는 게 아니라 완전히 떠나는 것 밖에는 방법이 없어. 아무리 손을 뻗어도 닿지 않는 먼 곳으로. 듣기 싫어서 외면하려던 도현이었지만 결국은 소리지르는 것도 멈추고 조용히 이 어지는 라딘의 독백을 들어주었다. 절대로 원하는 바는 아니지만 일단 라딘과 도 현은 얼굴도 똑같이 생겼고, 어떤 방식으로든 연결되어 있는 것 같았으니까. 일단 은 닮은 사람에 대한 예의로 들어주기로 한 것이다. 라딘의 과거에 대한 이야기 는 수도 없이 들었다. 마치 도현이 라딘으로서 살기라도 했던 것처럼 주변에서 끊임없이 그 얘길 해댔으니까 외우지 않으려고 해도 그럴 수가 없었다. 라딘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참 한심하다고 생각했다. 아무리 어릴때부터 그런 소리를 듣 고 자랐다고 해도, 스스로 그 상황을 벗어나겠다고 결심했다면 어떻게든 해서 벗 어났을 것이다. 라딘의 경우에는 그를 경멸하기만 하는 가족을 끝까지 버리지 못 하고 미련을 붙들다가 결국 사고를 만들어 버렸다. 그렇다. 사고. 그것은 명백한 사고다. 라딘으로 인해 도현은 연고자도 하나 없는 낯선 세상으로 떨어졌고, 돌아갈 방법 도 알지 못한다. 신의 보석이 모두 모이면 뭔가 가능성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희 망이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단지 희망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다. 겨우 가슴 속에 묻어뒀는데.... 라딘의 독백 덕분에 가족에 대한 기억이, 원래 자신이 살고 있어야 할 세상에 대 한 기억이 되살아나자 도현은 화가 치밀어 올랐다. " 한 번 태어난 이상 제대로 살아야 할 거 아냐! 자기 인생은 자기가 선택하고 바꿔나가는 거야. 그런데 대체 왜 신세 한탄만 하고, 바꿀 노력은 하지도 않은 거 야? 그래놓고 동정심을 사려는 거야?" 그렇게 외친 순간 나지막한 목소리로 이어지던 독백이 물살이 흐트러지듯이 끊기 더니 사라져버렸다. " 도현?" 그리고 이어진 것은 걱정스러운 목소리와 염려가 담긴 시선. 갑자기 눈을 뜨고 나서야 도현은 자신이 꿈을 꾸고 있었음을 알았다. " 꿈이었네......" " 상당히 기분이 나빠 보였어." " 응....." 도현은 상체만 일으킨 채로 머리카락을 쓸어넘기며 대답했다. 기분이 찝찝하다. " 라딘의 목소리를 들었어. 이곳에 오고나서 처음 있는 일이야. 이곳에 오기 전 에도 손목이 이유도 없이 갈라진 것 이외에는 아무런 조짐도 없었으니까. 기분이 나빠. 라딘과 내가 알 수 없는 뭔가로 이어져 있는 것 같아서." 바닥에 시선을 둔 채 대답하는 도현을 보며 스위드는 도현이 어떤 심정일지 짐작 할 수 있었다. 겨우 낯선 세상에 적응해 살아가고 있던 도현에게 과거를, 그것도 가장 그리운 기억을 되살리게 만들었다면 어떤 기분일지. " 서로 상대방의 존재조차도 모른 채 살아왔던 쌍둥이가 우연한 기회에 뒤바뀐 거라면 이런 느낌이 들까? 이상할 정도로 끔찍해. 지금까지 이런 기분이 든 적은 없었는데." 내일이면 최후의 보석의 주인과 만나게 되는데 도현에게 뜻밖의 일이 생기자, 스 위드 역시 걱정이 들었다. 만약 무슨 일이 생기기라도 한다면, 그로 인해 도현이 상처받게 된다면... 그것만은 절대로 막아야만 한다. 도현은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모든 희망이 사라진다면 이곳에 적응하고, 살아가 겠다고 했지만 사람의 마음이란 결심한다고 해서 한 순간에 달라지지 않는다. 스 위드 역시 오랜 세월동안 자기 위안과 자기 기만에 빠져 살아왔기 때문에 지나칠 정도로 충분히 이해하고 있는 사실이었다. " 나와 닮은 존재란 건 원래 이렇게 기분 나쁜 건가...." 도현은 독백처럼 중얼거렸다. 스위드는 대답하지 않았다. 도현이 대답을 바라고 말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도현은 지금 망설이며 두려워 하고 있다. 스위드는 도현의 가장 가까운 곳에서 계속 그를 지켜보고 있었기 때문에 도현의 민감한 변화도 쉽게 알아차렸다. 지금 까지 3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신의 보석을 가진 자들과 차례대로 만나왔다. 신이 지상을 떠나면서 남아있는 인간들을 위해 주고 간 선물인 신의 보석. 보석은 한 명의 인간을 주인으로 택해 지상에 많은 기적을 베풀어왔다. 신의 보석이 한 자 리에 모인적은 없었지만 사람들은 신의 힘이 하나가 되었을 때 커다란 기적이 생 겨날 것이라 믿고 있었다. 비록 당장 모든 보석의 주인을 한자리에 모을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도현은 보 석의 주인들을 차례로 만나왔고 이제 얼마 후면 마지막 주인과 만나게 되는 것이 다. 도현의 복잡한 심경은 충분히 이해한다. 아마도 혼란스러운 마음이 라딘과의 연결점을 만든 것이 분명하다. 도현이 가장 원하는 것은 원래 세상으로 돌아가는 것이지만, 스위드는 그것이 처 음부터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다른 세상은 결코 열리지 않는다. ============================================================== 세피디나와의 만남은 매우 유쾌했다. 아리엘은 소문으로만 들어온 불의 보석의 주인인 세피디나와의 만남을 그렇게 평가했다. 알려진 보석의 주인 중에서 유일 한 여자이자 아리엘과 마찬가지로 보석의 힘을 육체적인 것으로 바꾸어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녀에 대한 친밀감은 매우 컸다. 세피디나 역시 아리엘과 처음 만났다고는 생각할 수 없을 만큼 그를 편하게 대해 주었다. 신분으로 따지면 세 피디나는 한 나라의 공주였고, 아리엘은 기사에 불과했지만 그런 신분의 차이는 보석의 주인이라는 한 층 높은 공통점으로 인해 사라져 있었다. " 약속 시간 보다 조금 늦어지긴 했지만 딘이 도착했다는 연락이 왔어요. 잠시 후면 이리로 오게 될 거에요." 활동하기 편한 승마복 차림의 세피디나는 창가 근처를 서성이며 말했다. " 딘은 정말 좋은 친구죠. 이런 저런 소문에 휘말려 있긴 하지만 소문만 믿고 사람을 평가하거나 흥미거리로 삼는다면 크게 후회할 거에요." " 직접 보지도 않은 상대를 소문만으로 평가하지는 않습니다. 더군다나 빛의 보석의 주인인데 소문과 같을 거라는 생각은 한 번도 하지 않았습니다." 아리엘은 고급스러운 의자에 앉아 창가 근처에서 움직이는 세피디나의 뒷모습을 응시하고 있었다. " 의외라고 생각했어요. 당신이 이곳에 온 목적도 알고 있지만 딘에 대한 것을 묻지도 않고, 보석에 대해 특별한 관심을 보이지도 않았잖아요." 아리엘은 가볍게 웃었다. " 특별히 그럴 이유가 있을까요? 신의 보석의 주인이라는 사실은 물론 일반인 과는 다르다는 확실한 증거가 되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보석의 주인이 사람이라 는 사실은 변하지 않습니다. 저 역시 보석의 주인이기 때문일지도 모르지만 적어 도 저는 자신의 눈으로 자신의 몸으로 타인을 경험하지 않은 상태에서 섣부른 판 단을 내리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은 없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 그 점이 마음에 들어요." 세피디나는 아리엘 쪽으로 몸을 돌리며 미소지었다. 화려하게 치장하지도 않았고, 여성스러운 차림새를 한 것도 아니었지만 미소짓는 세피디나는 정말 아름다웠다. " 늦었어, 미안." 문이 열리며 모습을 드러낸 소년은 밝지만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리엘은 첫 눈에 그 소년이 빛의 보석의 선택을 받은 보석의 주인이자, 제국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스캔들의 주인공이라는 사실을 알아챘다. 어깨를 지나 등까지 흘러내린 검은 머리카락은 부드럽게 흘러 내려 흔들리고 있었다. 세피디나가 딘이라는 이 름을 부르며 반갑게 소년과 포옹했다. 제국의 꽃이라 불렸던 전 백작부인의 미모를 물려 받았는지 소년은 섬세하게 세 공된 듯한 미모를 가지고 있었다. 창백해 보이는 흰 피부와 검은 머리카락이 대 조되어 얼굴이 매우 선명해 보였다. " 딘, 소개할게. 이쪽은 아리엘. 피요드 공국 실버 드래곤 기사단의 기사야. 그 리고 짐작했겠지만 대지의 보석의 주인이지." 아리엘은 자리에서 일어나 새로운 손님을 맞이했다. " 처음 뵙겠습니다." 소년은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며 인사했다. " 이쪽은 스위드. 딘의 보호자야." 세피디나가 가볍게 웃음 섞인 목소리로 소개하자 아리엘은 그제서야 딘에게 시선 을 빼앗긴 탓에 존재감 조차 느끼지 못했던 다른 사람이 있었음을 알았다. 딘의 뒤쪽에 서서 고요하게 가라앉은 검은 눈으로 아리엘을 바라보는 남자는 딘 과 비슷해 보였지만 완전히 달랐다. " 자, 앉으세요." 간략한 소개를 마치자 세피디나는 바로 자리를 권했다. 스위드와 도현이 나란히 앉고 나자, 세피디나는 아리엘의 옆자리에 앉았다. 보석의 주인이 이렇게나 많이 한 자리에 모인 것은 처음일 것이라는 생각에 아리 엘은 가벼운 흥분마저 느꼈다. 피요드 공국에서 기사로 생활하면서 나라를 위해 여왕을 위해 자신이 가진 힘을 사용한 적은 몇 번 있었지만, 다른 보석의 주인들 을 만나거나 실제로 그들이 힘을 사용하는 것을 본 적은 없었다. " 각자 원하는 것이 있었기 때문에 이런 자리가 마련되었으리라 생각합니다. 복잡한 과정은 생략하고 원하는 것을 이야기 해 보도록 하죠." 딘은 자리에 앉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본론을 꺼냈다. 아리엘은 조금 의외였 지만 말주변이 뛰어난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리엘과 대화를 나누고 나서 함께 저녁 식사를 하고 나자 이미 날은 저물어 있 었다. 각자 잘 방으로 안내 받고 나서 도현은 세피와 따로 자리를 가졌다. " 보석의 주인들과 모두 만난 기분은 어때?" " 글세, 뭔가 엄청난 일이 일어날 줄 알았는데, 아무 것도 없어서 조금 실망스 러운데?" 세피는 소리 내어 웃었다. " 모두 한 자리에 모이게 된다면 엄청난 일이 생길지도 몰라. 한 자리에 모이 는 게 힘들어서 시험해 보지는 못하지만." " 어떻게든 기회를 마련해야지." " 딘, 나도 최선을 다 할게." 도현은 환하게 미소지으며 세피에게 감사를 표시했다. " 보석의 힘을 얻고 나서 평범하게 친구를 사귈 수가 없었어. 물론 우리는 동 류지만 그래도 처음엔 서로에 대해 몰랐잖아. 지금은 이렇게 서로에게 편안한 사 이가 되었고. 난 그게 정말 기뻐." 세피는 진심을 담아 말했다. 하지만 딘을 눈앞에 두고 아무렇지 않게 표정을 유 지하는 것이 점점 힘들어졌다. 낮까지만 해도 딘과 아리엘을 만나게 해 주어야 한다는 사실만 생각했고, 아버지도 특별한 언질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식사를 마 치고 나서 세피는 아버지에게 다짐을 받아야 했다. " 보석이란 건 사실 그렇게 특별하지는 않은데 말이야. 이상하지? 그 작은 돌 덩어리가 너무나 많은 것들을 바뀌게 만들었어." " 어차피 살면서 보석의 힘을 쓸 일은 그리 많지 않으니까. 시간이 좀 지나면 그저 상징적인 의미가 아닌가 생각하게 되지만, 다른 사람들은 절대 평범하게 봐 주지 않아. 그 정도가 차이일까." 세피는 그렇게 말하고 나서 금새 얼굴을 굳혔다. 뭔가 할 말이 있는 것 같았지만 한숨만 쉬더니 고개를 저었다. 도현은 처음으로 보석을 얻던 때의 일을 떠올리고 있었지만, 세피의 어두운 표정 을 보자 금새 현실로 되돌아왔다. " 무슨 일이야, 세피?" " 아무 것도 아니야." 그렇게 말하자 도현은 더더욱 아무 일도 아니라는 그녀의 말을 믿을 수가 없었 다. " 마음에 담아두면 더 무거워질 뿐이야. 어떻게 할 수 없는 문제라도 말하는 걸로 편해지기도 하잖아. 아니면, 내가 들어서는 안 되는 일이야?" " 아니, 그건 아니야." 세피는 무겁게 한숨을 내뱉더니 침울한 얼굴로 도현을 바라보았다. 평소 밝고 명랑한 세피만을 봐 왔던 도현은 그런 그녀의 변화가 생소했다. 누구 나 마음속에 여러 가지 사정을 품고 있지만 그것이 겉으로 완전하게 드러나는 사 람은 그리 많지 않다. 세피 역시 그랬다. " 딘, 너는 정말 많은 것을 봐꿔 놨어. 예전엔 그저 제국에서 스캔들을 일으킨 주인공이었던 네가 지금은 대륙에서 가장 큰 관심을 받는 존재가 되었고, 모두들 널 손에 넣고 싶어해." 그 동안 애써 존재를 감추고 살아왔지만 사이드 공국에서 벌어진 일로 인해 도현 의 존재는 이미 대륙에 완전히 드러나 버렸다. 제국을 흔들었던 사건의 주인공이 이제는 가장 손에 넣기 어려운 보석의 주인으로 탈바꿈한 채 이름을 날리게 된 것이다. 사람들은 과거의 스캔들과 함께 지금 보석의 주인이 된 소년의 이야기를 여러 가지로 부풀려 이야기했다. 하지만 도현은 그런 소문에 별 관심이 없었다. 어차피 옛 이야기는 모두 라딘에 관한 것이지 도현 자신에 관한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세피의 시선이 도현의 눈을 단단히 붙잡았다. " 그 중에는 우리 센 왕국도 포함되어 있어. 사람의 욕심이란 끝이 없잖아?" 씁쓸한 세피의 말에 도현은 그녀의 마음을 이해할 수가 있었다. " 아버지는 내가 너와 결혼하기를 원해. 라딘 라메르는 제국인이지만 지금 이 렇게 제국을 떠나 있는 딘은 제국 사람이 아니잖아. 딸을 잃지 않고 또 다른 보 석을 얻을 수 있다면 그건 너무나도 매력적이지. 당연히 그렇게 생각할거야." 아무렇지 않게 말을 이었지만 세피의 표정은 가라앉아 있었다. 권력자라면 누구 나 대륙의 패권을 쥐고 싶어한다. 평화로운 시기는 많은 사람들이 원하는 것이지 만 권력자는 평화에 만족하지 않고 보다 높은 보다 큰 무언가를 쥐길 원한다. 세 피의 아버지 역시 보다 큰 것을 바랬고, 자신의 딸이 그 열쇠와 친분이 있다는 것은 매우 좋은 기회였다. " 이런 말을 꺼내서 미안해." " 미안하게 생각할 필요 없어. 세피." 도현은 다정하게 세피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아무리 보석의 주인이라고 해도, 보 통 사람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한 힘을 가졌다고 해도 지금의 세피는 가냘픈 소녀에 불과했다. " 넌 내 소중한 친구고, 네가 곤란해지는 건 바라지 않아. 힘을 가진 사람들이 더 큰 힘을 원하는 건 당연한 거야. 사람이라면 항상 보다 큰 걸 바라니까. 그런 경우를 많이 봐 왔어." 세피는 고개를 들어 딘을 올려다 보았다. " 딘이 부러웠어. 구속하는 것들을 벗어 던지고 달릴 수 있다는 사실이. 나는 다른 사람들이 보기엔 강할 지 모르지만 내가 속한 것들을 버릴 수가 없어. 아버 지의 뜻이 마음에 들지 않지만 강하게 그걸 거부하지는 못해." 도현은 세피가 무엇을 말하고 싶어하는지 알았다. 그것은 도현도 이곳에 와서야 겨우 깨달은 가족에 관한 마음이었다. 소중한 것은 가지고 있을 때는 결코 그 가 치를 깨닫지 못한다. " 친구를 위해서라면 간단한 약속은 할 수 있어. 모든 보석이 한 자리에 모이 고, 내 소망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그때는 이곳에서 내 입지를 확실하게 마련해 야 겠지. 그렇게 되면 오히려 내가 세피에게 부탁을 하게 될 지도 몰라. 결코 제 국으로는 돌아가지 않을 생각이니까." 도현은 세피가 그랬듯이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 난 아직도 어려. 나에 비하면 세피가 훨씬 더 어른이라고 생각해. 소중한 것 을 잃지 않기 위해서 괴로워하고 있으니까 말이야. 나처럼 잃어버리고 나서야 후 회하고 되찾기 위해 발악하는 것보다는 훨씬 낫다고 생각해." " 딘..." " 세피는 지금까지처럼 세피 답게 있어 줘." 세피는 환하게 웃어 보였다. " 가장 소중한 것을 잃어버리게 된다면, 다시 찾은 소중한 것은 놓치지 않을 생각이니까. 나는 노력할거야. 그래, 계속 노력할거야. 절망은 하지 않을 거야...." 다짐하듯이 몇 번이나 말하는 도현에게 이번에는 세피가 손을 가져갔다. 친구가 가진 힘을 얻기 위해서 아버지가 당부한 말 때문에 마음이 너무나도 무거웠지만, 딘은 그 말을 듣고도 세피에게 화를 내거나 경멸하는 표정을 짓지 않았다. 오히 려 그녀를 위로해 주었다. 보석의 주인이라는 동질감 때문이 아니라 그저 비슷한 나이의 친구로서 그렇게. ============================================================ 센 왕국에서 마지막 보석의 주인과 만나고 나면 바로 쌍둥이에게로 떠나려던 도현이었지만 일은 그렇게 쉽게 풀리지 않았다. 센 왕국의 주인이자 세피의 부친인 팔라스는 딸에게 압력을 가했다. 대외적으로 도현은 여전히 제국에 속해 있었기 때문에 국가간의 마찰을 직접적으로 불러 일으키지 않기 위해 자신이 나서지는 않았지만 그의 의사는 세피에게 지나칠 정도로 무거운 짐이 되어 있었다. 전날 밤 세피에게 직접적으로 국왕의 뜻을 전해 들었기 때문에 더더욱 도현은 아무렇지 않게 센 왕국을 떠날 수가 없었다. 세피는 이곳에서 만난 몇 안 되는 친구 중의 한 명이며, 어떻게 보면 보석의 주인이라는 한 배를 탄 동료이기도 했다. “ 약혼 정도면..... 괜찮을 것 같은데...” 도현이 혼잣말로 중얼거리자 다른 곳에 시선을 주고 있던 스위드가 고개를 돌렸다. 입을 열어 묻지는 않았지만 무슨 뜻이냐는 듯한 스위드의 눈을 보고 도현은 무거운 어조로 대답했다. “ 세피와 말야... 정말 마음에 둔 상대와 약혼해야겠지만 내 결정이 세피에게 어느 정도 도움을 주는 거라면 임시로 약혼하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 같아서. 세피에겐 여러모로 빚을 졌다고 생각하니까.” “ 그렇게 하고 나서 네가 사라져 버리면 그때는 어떻게 되는 거지?” “ 그건 그때 생각해야 할 문제지. 세피에겐 미안해지겠지만 내가 원래 세상으로 돌아가게 된다면 다시 모든 건 원점으로 돌아가게 될 테니까.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해도 늦지 않을 거야. 난 지금 세피가 난처한 입장에 처하지 않길 바래.” 스위드의 표정은 평소와는 조금 미묘하게 달라져 있었지만 생각에 잠긴 도현은 그런 스위드의 변화를 알아채지 못했다. 도현이 살짝 운을 띄운 말은 금새 팔라스 왕의 귀에까지 들어가 일사천리로 약혼식 준비가 진행되기 시작했다. 말을 꺼낸 도현이 당혹감을 느낄 정도로 일의 진행이 빨라서 도현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을 정도였다. 세피는 미안한 듯한, 그러면서도 조금은 안도한 듯한 기묘한 표정으로 도현에게 사과와 감사를 전했다. 이왕 일이 진행된 김에 도현은 약혼까지 받아들이기로 했다. 세피는 정말 좋은 친구였고, 그녀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면 약혼쯤은 얼마든지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었다. 약혼식 준비가 진행되는 동안 도현은 세피와 함께 조용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그녀는 여러 가지 준비로 바쁜 와중에도 도현의 곁에 머물며 불편함을 느끼지 않도록 도와 주었다. 사흘 앞으로 약혼식이 다가왔다. 아직 실감은 나지 않았지만, 모든 일은 빠르게 진행되고 있었다. 그리고 세피가 상기된 듯한 얼굴로 도현에게 달려왔다. “ 딘, 네게 작은 선물이 될 수 있을 거야.” 그렇게 말하며 세피가 내민 것은 약혼식 초대객 명단이었다. “ 이걸….왜..?” 의아한 얼굴로 명단을 받아 든 도현에게 세피는 재촉하듯 말을 이었다. “ 딘은 항상 바래왔잖아. 모든 이들이 한 자리에 모이기를….” “ 아…” 그제서야 도현은 세피가 말한 의미를 깨달았다. 그리고 서둘러 글자를 읽어 내려갔다. 첼시피온. 세인. 아리엘. 바람의 보석과 물의 보석, 대지의 보석의 주인이 명단에 적혀 있었다. 보통 왕족의 결합이라면 이들 모두를 불러들일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불의 보석의 주인과 치유의 보석의 주인의 약혼식이 거행되는 만큼 모든 보석의 주인들이 한 자리에 모일 수 있는 기회가 생긴 것이다. 그리고 아는 이는 많지 않지만, 어둠의 보석의 주인인 스위드까지 이곳에 있다. 도현은 전혀 기대하지 않던 의외의 기쁜 소식에 너무 놀라서, 어떤 얼굴을 해야 할 지 알 수 없을 지경이었다. 생각했던 것 보다 너무나 빠르게 가장 바래왔던 일이 이루어진 것이다. 약혼식이 거행된다는 사실 보다 더욱 믿기지 않는 현실에 도현은 잠시 말을 잃었다. “ 고마워…..세피…” 실감나지 않는 다는 얼굴로 감사를 전하는 도현을 보며 세피는 환하게 미소 지었다. “ 친구란, 가장 원하는 것을 자연스럽게 들어줘야 하는 것 아니었어?” 마음이 통한다면, 서로 다른 곳에서 시작한 사이라고 할 지라도 결국에는 같은 길을 걸어갈 수 있다. 도현은 이곳에 와서 정말 많은 것을 느꼈다. 지식으로 가득한 천재가 아닌, 진정으로 타인을 이해하고, 소중한 것을 깨닫고 지키기 위해 노력할 줄 아는 그런 어른이 되어가고 있었다. 비록 자의에 의해 낯선 세상에 온 것도 아니고, 계속 이 세계에 머물고 싶다고 생각하는 것도 아니었지만 도현은 이곳에서의 경험이 너무나도 소중한 것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마음에 새겼다. 금방이라도 타오를 것처럼 선명한 붉은 색의 드레스를 입은 세피는 어느 때 보다도 당당하고 활기차게 보였다. 그리고 새하얀 예복을 입은 도현 역시 타인의 시선을 잡아 끌었다. 본래의 예복과는 조금 다르지만, 신의 보석의 주인인 만큼 그들은 자신의 힘을 상징하는 빛깔의 예복을 입은 채 약혼식을 거행했다. 약혼식이란 두 명의 남녀가 자신들의 결합을 지인들에게 알리는 행사인 만큼, 복잡한 예식은 없었다. 연회장에 초대된 손님들과 인사를 나누고 즐기는 것. 그것이 전부였지만, 중요 인사들이 초대된 자리인 만큼 누구 한 명 소홀이 지나칠 수 없었기 때문에 세피와 도현은 몇 시간 째 연회장에서 차례로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느라 점점 지쳐 가고 있었다. 연회장에는 제국의 인물들은 보이지 않았다. 도현은 그 사실을 조금 의아하게 생각했지만, 너무 바빴기 때문에 금새 잊고 말았다. 한시라도 빨리 보석의 주인들과 따로 자리를 마련하고 싶었지만 연회가 끝나기 전에 주인공들이 자리를 비울 수는 없었기 때문에 초조한 마음을 애써 억누른 채 시간이 지나기만을 기다렸다. 그리운 얼굴들이 연회장에 나타났다. 카드리와 리올. 쌍둥이는 조금 늦게 연회장에 도착했고, 도착 하자마자 도현과 세피에게 다가갔다. “ 딘, 즐거워 보이는데..?” 웃음 띤 얼굴로 다가온 쌍둥이는 세피디나에게 정중한 인사를 건네고, 도현에게 말을 걸었다. “ 답답한데 잠시 바람이나 쐬는 게 어때?” 그렇게 제안하며 쌍둥이는 도현과 세피를 테라스로 이끌었다. “ 행운을 빈다.” 리올은 도현의 어깨를 두드리며 격려했다. “ 고마워. 그리고….부탁할게.” 쌍둥이가 연회장의 빛을 막고 있는 사이, 도현과 세피는 테라스에서 정원으로 뛰어내렸다. 고대했던 순간이 다가온 것이다. 이 준비를 위해 쌍둥이는 연회장에 늦게 들어섰고, 그 동안 다른 세 명의 보석의 주인들을 약속 장소로 움직이게 만들었다. 너무 오랜 시간 자리를 비우게 되면 문제가 발생할 것이 뻔 했기 때문에 되도록 빨리 움직이는 것이 좋다는 사실을 도현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약속 장소에 가까워지자 점점 심장이 격한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런 도현의 마음을 알기라도 하는 것처럼 세피가 강하게 손을 잡아 주었다. 손끝을 타고 전해지는 온기에 도현은 조금이나마 안도감을 느꼈다. 인적이 드문 정원. 달 빛이 은은하게 빛을 흩뿌리는 고요한 정원에 세피와 도현이 도착하자 세 쌍의 시선이 모였다. “ 축하 드립니다.” 정중하게 인사를 건넨 것은 아리엘. 고개를 살짝 숙여 인사를 대신한 세인은 여전히 차갑고도 고요해 보였다. 그리고 사람 좋은 미소를 짓고 있는 첼시피온. 여전히 눈을 뗄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운 첼시피온의 표정은 예전과는 어딘지 모르게 달라 보였다. 여전히 그의 얼굴에는 미소가 떠나지 않았지만, 도현은 왠지 그 미소에 그늘이 진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깊은 생각을 할 여유도, 예전의 일을 따질 시간도 없었다. “ 힘든 걸음을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도현은 먼저 그들에게 감사를 전했다. 세피 역시 도현과 마찬가지로 고개를 숙였다. 스위드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지만, 도현은 그가 이곳 어딘가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모습을 드러내지 않더라도 모두가 모였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다. 드디어 신의 보석이 모두 한 자리에 모였다. 이유 모를 벅찬 감동이 느껴져, 신의 힘을 나눠 가진 이들은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모두 무슨 일이 일어날 지 기대하고 있었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모두의 얼굴에 엷은 기대감이 떠올랐다. 신이 지상에 남겨둔 흔적들이 한 자리에 모이자, 특별한 힘이 주변을 감싸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이제 남은 건 신의 목소리를 듣는 것뿐일까. 도현은 작은 설레임과 불안, 기쁨과 안타까움을 동시에 느끼며 초조함을 감추기 위해 노력했다. 신이 지상에 모습을 드러낸다면, 사고로 인해 뒤틀려버린 시간을 원래대로 되돌려 달라고 말 할 생각이었다. 그것은 처음부터 변함이 없는 마음의 외침이었다. 아무리 이곳에서 즐거움을 찾고 소중한 것을 발견하고, 마음 한 구석에서는 체념을 하고 있었더라도 도현은 항상 바라고 있었다. 원래 있어야 할 곳으로, 가족들의 곁으로 돌아가기를.. 그들에게 이제 진심으로 감사를 전할 수 있기를 바라면서. 신은 어떤 식으로 나타날까. 신의 존재를 믿지 않았지만, 이 곳에는 마법이 존재하고 과학이나 지식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많은 것들이 존재하며 이루어 지고 있었다. 그런 만큼 신이 나타나 말을 건다고 해도 놀라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그러나 신의 보석이 모두 모였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신의 목소리도, 신의 숨결도. 신의 존재도 없었다. 모두의 얼굴에 의아함이 떠오르기 시작한 그 순간. 어둠 속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 신은 자신의 아이들을 위해 여섯 개의 보석을 남겼다. 그리고 신들이 속한 세상으로 떠났지. 떠나버린 신은 두 번 다시 되돌아 오지 않아.” 차분한 스위드의 목소리가 차가운 선고가 되어 귓가에 울려 퍼졌다. “ 딘, 너는 이곳에 머물러야만 해.” 그리고 진실은 날카로운 화살이 되어 심장을 관통했다. “ ….알고 있었어……..” 저절로 입술이 움직이며, 변명하듯이 말을 토해냈다. “ 두 번 다시 되돌아 갈 수 없다는 것 따윈……알고 있었어…… 아직도 꿈 같지만….. 납득하고 있었어…..” “ 딘…..” 세피가 안타까운 듯이 말하며 손을 잡았다. 그녀의 따뜻한 체온이 이상하게도 멀리 있는 것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아니, 따뜻함이 몸으로 전달되지 않았다. 절망은 무엇보다 깊고 차가웠다. “ 아직 남겨진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다.” 스위드는 너무나도 차분한 얼굴로 말을 이어갔다. 숨소리도 들리지 않을 정도의 고요 속에서 그의 목소리만이 너무나도 선명하게 울려 퍼졌다. “ 신의 보석의 힘을 이은 자는 이 세계에 속한 자, 신은 이 세상을 떠났지만 신의 힘은 여전히 남아 있다. 그리고 그 힘은 자신의 세계에서 벗어날 수 없지.” 도현은 스위드가 무슨 말을 하고 싶어하는지 금방 알아차렸다. 너무나도 당연한 이야기… 하지만 절망스러운 이야기를. 그는 신의 힘을 얻은 자는 결코 이 곳을 벗어날 수 없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처음부터 답은 하나뿐이었다. 돌아갈 수 없다…. 스위드는 처음부터 이런 사실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사실을 알리지 않고 조용히 도현이 움직이는 것을 지켜 보고 도와 주었다. 하지만 이렇게 결정적인 순간에 진실을 이야기 해 주는 것과 처음부터 모른 척 하는 것. 대체 어떤 것이 더 잔혹한 행동인 것일까. “ 라딘, 네가 있어야 할 곳을 찾아.” 부드러운 어조로 말을 건넨 것은 첼시피온 이었다. 무미건조한 얼굴로 도현을 바라보며 첼시피온은 덧붙였다. “ 신은 인간 따위는 사랑하지 않거든. 뒤틀린 운명은 그저 뒤틀릴 뿐이야. 스스로 방향을 바꾸지 못한다면, 남는 건 아무 것도 없지.” 가슴을 차갑게 파헤치는 듯한 그 말에 도현은 더욱 상처 입었다. 너무나 선명한 현실의 무게가 온 몸을 짓누르고 있었다. ================================================================================== 3장. 진실 따뜻한 체온과 귓가에 울리는 심장 소리를 들으며 도현은 천천히 눈을 떴다. 요 며칠간의 일은 제대로 기억나지 않았다. 흑백 무성 영화를 보는 것처럼 주위의 모든 것들이 무채색으로 흘러 갔다. 흔들림 없는 회색 눈동자를 바라보며 도현은 입을 열었다. “ 절망이 이런 감각인 줄은 몰랐어…...” “ 직접 겪지 않은 일을 짐작하는 것과 실제는 다르니까.” 진실을 말할 때와는 달리 지금의 스위드는 다정했다. 지금으로서는 가장 믿을 수 있는 사람이지만 도현은 스위드의 다른 면모를 살짝 엿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위드는 오랜 세월을 살아온 존재인데다 마녀의 아들이다. 게다가 도현에게 오기 전 까지는 제국의 황가를 위해 움직이고 있었다. 도현은 자신의 곁에 오기 전의 스위드에 대해서는 잘 몰랐지만, 지금의 그와 과거의 그가 같지 않다는 사실은 확신할 수 있었다. 도현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생각에 잠겼다. 기억을 되살려 보면, 첼시피온을 처음 만났을 때 그가 말했었다. 신의 보석의 주인은 이 곳을 떠날 수 없다고. 그때는 그저 흘려들었기 때문에 금새 잊었다. 아니, 신의 보석의 주인이 모두 모이면 어떤 특별한 기적이 일어날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그런 이야기는 기억 저편에 묻어두고 있었다. 하지만, 첼시피온은 일찌감치 도현에게 진실을 이야기해 주었다. 첼시피온의 가식은 여전히 용서할 수 없었지만, 예전만큼 그가 밉지는 않았다. “ 스위드. 왜 나에게로 왔지?” “ 진실을 찾기 위해서.” 스위드는 간단하게 대답했다. “ 진실…..” 도현은 스위드의 입에서 나온 그 단어를 따라했다. 지금은 도현에게 무엇보다 무겁게 들리는 단어. 그렇다. 지금 도현의 눈앞에 펼쳐진 것이야 말로 진실. 두 번 다시는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이다. 언젠가 눈을 뜨면 조금은 위험하고, 조금은 즐거웠던 꿈은 끝나고 현실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고 마음 속 깊은 곳에서 바라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단지 작은 바람이었을 뿐. 처음부터 결말은 정해져 있었다. " 이제 돌아가야겠어..." " 어디로?" " 처음 시작한 곳으로." 스위드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지독한 현실을 알게된 이후로 도현은 한 박자 늦게 행동하고 생각하고 반응했다. 충격을 받을 것이라고 예상은 했지만, 이런 반응은 조금 의외였다. "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면 조금은 달라질 지도 몰라..." 도현의 시선은 정확하게 어떤 곳을 향하고 있지 않았다. 눈 앞에는 존재하지 않는 먼 곳을 보는 시선으로 다짐하듯 말하는 도현을 스위드는 조용히 감싸 안았다. 가족이란, 현실이란 내게 있어 무엇이었을까. 도현은 조용히 스스로에게 질문했다. 어째서 소중한 것은 잃어 버리지 않으면, 상처 받지 않으면 깨닫지 못하는 것일까. 어째서 인간이란 이렇게나 어리석은 것일까. 눈물이 흘러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답답하고 슬펐지만, 눈물샘이 메말라 버렸는지 눈은 젖어들지 않았다. 이제 두 번 다시는 되돌아갈 수 없다. 도현이 도현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살아 있었다는 것은 이제 도현의 기억 속에서만 존재하는 일이 되었다. 지구의 한국이라는 곳에서 보냈던 17년의 기억은 단어 그대로 기억이 되었을 뿐. 그 시간들이 실재했었다는 사실을 아는 자는 도현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없다. 그 사실이 너무나 참담하고 무서웠다. 지금도 이렇게 멀쩡하게 숨을 쉬고 살아있는데, 정작 자신이 있어야 할 곳은 없다니. 바닥이 보이지 않는 깊은 어둠 속에서 끝없이 추락하고 있는 것 같았다. 끝없는 절망이 사고를 지배했다. " 절망에 모든 것을 내던지지는 마." 스위드의 목소리가 들려온다는 것을 깨닫자 마자, 안락한 어둠이 찾아왔다. 스위드는 도현의 눈을 가리고 있던 손을 떼고, 고른 숨을 내쉬며 잠든 얼굴을 내려다 보았다. 단 이틀 사이에 몰라보게 수척해진 얼굴. 억지로 힘을 써서 도현을 잠들게 했지만, 이렇게 하지 않으면 도현은 계속해서 생각에 빠져 아무 것도 하지 않은 채 괴로워할 것이 분명하다. - 가져. 이마에 떠오른 문양이 뜨겁게 속삭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 . . . " 라딘님. 이제 정신이 드셨나요?" 어딘지 모르게 익숙한 목소리가 천개 너머에서 들려왔다. 천개 너머로 희뿌연 사람의 모습이 보이다가, 천이 젖혀지며 얼굴이 드러났다. " 리...사..?" " 네. 저에요. 오랜만이네요." " 여긴..." 어딘지 알고 있었지만, 말로 확인을 하고 싶었다. " 제가 본가가 아닌 어디에 있겠어요. 너무 오랜만이어서 혼란스러우신 모양이네요. 가끔은 돌아오셔야 하는 것 아니에요?" 바로 어제 떠났다가 되돌아 온 것 처럼 리사는 스스럼없이 말을 걸고 있었다. " 스위드는...." 뻑뻑한 눈을 깜빡이며 묻자 리사는 고개를 갸우뚱 하다가 곧 생각났다는 듯이 대답했다. " 라딘님과 함께 오셨던 분께서는 금방 떠나셨어요. 중요한 것을 찾으러 가야 한다고 전해 달라고 하셨어요." " 그래.." 도현은 나직하게 대답하고 나서 다시 눈을 감았다. 피곤할 일은 없는데도 이상하게 몸이 무겁고 나른하다. " 라딘님. 필요한 것이 있다면 불러주세요." 피곤해 보이는 도현을 보고 리사는 하고 싶은 말을 참고서 침대에서 벗어났다. 깊은 어둠이 주위를 감싸고 있었다.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어둠은 이상하게도 온화한 느낌이 들어서, 조금도 무섭지 않았다. " 진실은 언제나 가장 참혹한 법이지." 또렷한 여자의 음성이 어둠 속에서 울려 퍼졌다. " 가장 보고 싶지 않았던 진실을 본 기분은 어떻지?" 흥미로운 기색은 전혀 담겨있지 않은 질문이었다. 자신의 얼굴이 어느 곳에 있는지도 느낄 수 없는 어둠 속에서 도현은 천천히 대답했다. " 모르겠어요..." 솔직한 심정이었다. 절망감과 슬픔이 가슴을 짓눌렀지만, 그 이전에도 분명 되돌아 갈 수 없을 것이라는 말은 들었었다. 하지만, 단 하나의 희망을 버리고 싶지 않아서 보석의 주인들을 모두 만나고, 그들이 한자리에 모이면 기적이 일어날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갈피를 잃은 마음은 금새 무너져 내리고, 자신을 한 없이 작아지게 만들었다. " 스스로에게 들려줄 대답은 혼자만의 힘으로 찾아야 한다. 다른 사람이 내주는 정답은 마음을 움직이지 않아." 처음과 변함없는 어조였지만, 도현은 묘하게 위로 받는 느낌이었다. " 힘들고 지칠 때면, 날 찾아 오거라."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휘트린이 미소 짓는 것을 본 것 같았다. 어둠 속에서 깨어났을 때, 도현은 홀가분함을 느꼈다. 마음을 가득 메우고 있던 절망이 사라지고, 더할 나위 없이 가벼운 느낌이 들었다. 조금 이상하게 여길 만도 하지만 그런 생각 조차 떨쳐 버린 채 침대에서 일어났다. “ 라딘님.” 상냥하게 웃는 얼굴로 리사가 말을 건넸다. “ 노스를 부를 게요.” “ 아니, 괜찮아.” 낯익은 창문 너머에는 푸른 정원이 그림처럼 펼쳐져 있었다. 창 밖에 시선을 빼앗기며, 걸음을 옮기는 뒷 모습을 리사는 조용히 바라보았다. 연약하기만 했던 도련님은 이제 어른이 된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 라딘님. 식사를 준비할까요?” “ 응.” 어딘지 모르게 단호해 보이는 등을 뒤로 한 채 리사는 라딘의 방을 빠져나갔다. “ 라딘 라메르……” 그리고 도현은 이제 그 이름의 주인이 되기로 결심했다. ========================================================================================